한국형 무인양품을 꿈꾼다 임선옥

소재 개발부터 공정까지, 트렌드와 디자인을 넘어 산업적 프로세스로의 접근을 시도하는 파츠파츠는 패션에서도 또 다른 해석과 확장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는 멈추지 않는, 그녀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DNA 자체이기도 하다.

한국형 무인양품을 꿈꾼다 임선옥
부암동 쇼룸에서 패션 디자이너 임선옥. 몇년 전 컬렉션에 사용하려고 구입한 여성용 모터바이크 장갑을 끼고 있다. ⓒ 김용호 01

임선옥 1962년생.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1993년 문화복장학원을 수석 졸업했다. 1996년 이고(EGO)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1998년 S.F.A.A 신진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실험적 디테일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그녀는 2003년 임선옥(Imseonoc), 2004년 세컨드 라인인 칼라 드 림(Color de Lim)을 론칭했고 이후 2011년 파츠파츠로 리브랜딩했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의상 디자인 협업(2003~2015),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3), 뮤지컬 <대장금>의 의상 디렉팅과 커스튬 디자인(2010),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한국 퍼포먼스 의상감독 등을 맡았다. 현대자동차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 ‘드림 소사이어티’의 <Object: 입으면 패션이 되고 벗으면 예술이 된다>(2013)전에 참여했으며, 소다미술관에서 <디자인 스펙트럼 Design Spectrum>(2016) 개인전을 열었다. www.parts-parts.kr

다양한 플랫폼이 넘쳐나고 스파 브랜드가 범람하는 이 시대, 패션 디자이너의 입지와 가능성은 넓어진 동시에 또한 좁아졌다. 많은 디자인 영역에서 형태나 새로움 그 자체보다 구조와 프로세스를 혁신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지만 그들은 유행과 스타일에 늘 민감하게 날이 서 있어야 하고, 컬렉션이 끝나면 곧장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기 바쁘며, 지난 시즌의 옷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늘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여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산다. 이들 사이에서 임선옥은 조금 다른 지점의 패션을 이야기한다. 2011년 임선옥이 론칭한 브랜드 파츠파츠(PartspARTS)는 네오프렌이라는 단 한 가지 소재만을 사용해 봉제선 없는 제조 방식,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내건 지속 가능한 패션을 고민한다. 파츠파츠는 옷이 부품(parts)처럼 조립되는 동시에 예술(art)를 품고 있다는 의미다. 소재 개발부터 공정까지, 트렌드와 디자인을 넘어 산업적 프로세스로의 접근을 시도하는 파츠파츠는 패션에서도 또 다른 해석과 확장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는 멈추지 않는, 그녀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DNA 자체이기도 하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글, 정리: 오상희 기자 사진: 김용호

EK 2011년 론칭한 파츠파츠는 임선옥(Imseonoc)을 선보이면서 시작된 패션에 대한 철학을 집약해 다시 탄생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죠.

SO 파츠파츠를 론칭했을 때가 디자인을 한 지 15년 정도 된 시점이었어요. 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처음 10년까지는 트렌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컬렉션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호흡이 빠르다 보니 채워지는 건 없고 남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체에서도 ‘누가 입었더라’고 기사화되는 게 전부고 그런 기사는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사라지고요. ‘이 소모적인 일을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늘 그랬지만 위기가 시작점이었던 것 같아요.

EK 파츠파츠는 네오프렌이라는 단일 소재를 사용합니다. 사실 파츠파츠 이전에도 저지나 스판덱스, 마이크로 텐셀과 초경량 박지 등을 활용한 의상을 선보였어요. 특별히 네오프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SO 소재를 먼저 찾았다기보다 앞으로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고민하다 나온 답이 네오프렌이었어요. 네오프렌은 원래 잠수복에 사용하는 원단이에요. 컬렉션 기간에 써본 적이 있었는데 봉제하지 않고 글루로 붙여도 잘 붙고 재단선이 깔끔하더라고요. 파츠파츠의 네오프렌은 기존의 네오프렌 성격을 지닌 뉴 네오프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원단 골목에 가면 자투리가 많이 나오는데, 디자인을 시작할 때부터 이것을 줄일 수 없을까 고민했어요. 이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고요. 그런 점에서 자투리까지 활용도가 높았어요. 이 소재라면 빨리 사라지고 소모되는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패션이 가능하겠다 싶었죠. 매번 같은 소재로 어떻게 컬렉션을 하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저는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EK 파츠파츠는 편직 기술, 제로 웨이스트 등 전 과정에 걸친 실험적 시도로도 주목받았어요. 소재 개발과 제작 프로세스는 특허 출원도 했고요.

SO 한 가지 소재를 이용해 기본 패턴을 만들고 변주하는 방법과 프로세스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레고처럼 모든 파츠(parts)가 유닛처럼 존재하고, 컬러 조합이나 디테일은 물론 소매의 유무, 오픈형과 폐쇄형 등에 따라 다른 스타일이 나올 수 있어요. 이를 소비자 요구에 따라 맞춤형 스타일로 만들 수 있고요. 시작할 때부터 이런 유통 환경까지 특허를 내야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EK 소재가 무척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자 임선옥 패션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에 기술뿐 아니라 유통까지 특허를 생각했다는 건 패션 분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개념이에요. 제작업체와의 협업도 매우 중요할 것 같고요.

SO 파츠파츠가 여느 옷과 가장 다른 점은 봉제선이 없이 글루로 패턴을 붙여 만드는 방식이죠. 시작할 때는 접착을 해주는 업체가 없어서 봉제하는 분을 찾아가 방법을 알려주고 설득해서 만들었어요. 단순히 접는 것 같아도 특별한 방식이 필요하고요. 계절감이 좀 걱정이었는데, 여름에는 직물을 얇게 짜고 겨울에는 두껍게 10겹까지 더하는 디자인과 기술을 연구했죠. 우리도 초기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파츠파츠 옷이 단순해 보여도 카피가 불가능한 건 이런 기술과 노하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파츠파츠는 달항아리 모티브의 치마, 한복을 닮은 어깨선, 레이어드되며 실루엣을 만드는 재킷 등을 통해 건축적이면서 심플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티셔츠와 블라우스 역할을 겸하는 도트 반팔. 애칭 티블.
EK 패션은 일반적으로 타깃이나 스타일이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는데, 파츠파츠는 특정 타깃이 없이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에이지리스(ageless) 브랜드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SO 파츠파츠는 모녀가 함께 입어도 되는 옷이에요. 입는 사람이 옷을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면 스타일이 전혀 달라지죠. 2015 F/W 컬렉션에서 백발의 중년 모델과 20대 모델이 같은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걸었는데 완전히 다른 룩이 되었어요. 파츠파츠는 그런 면에서 입는 사람의 감각으로 소화하는 옷이라고 생각해요.

EK 패션은 특히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인지 에이지리스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TPO처럼 상황에 따라서 혹은 암묵적이라도 연령에 맞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얼마 전 한 기사에서 ‘미니스커트가 어울리는 적정 나이는 서른아홉’이라는 식으로 단정한 글을 보기도 했어요.

SO 그런 점에서 파츠파츠는 초기부터 비즈니스하기가 어려웠어요. 백화점 바이어나 MD들은 파츠파츠를 몇 층, 어느 존에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파츠파츠 티셔츠는 낮에 사무실에서 입다가 저녁에 사이클을 탈 때도 입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특정 카테고리에 넣기도 애매하고, 또 비슷한 콘셉트의 다른 브랜드와 함께 존을 만들기도 힘들었죠.

임선옥은 원래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그래서 막연히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빨간 바지를 좋아하고 옷을 좀 특이하게 입었다던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가 잘 어울리겠다는 주변의 얘기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회사 일로 일본에 갔다가 문화복장학원 앞에서 블랙 컬러의 젠 스타일 옷을 입고 화려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슈즈를 신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경험이 그녀를 패션계로 이끈 셈이다. 1년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졸업 후에는 이세이 미야케 스튜디오의 입사 기회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서른 살 초반이었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EK 1998년 S.F.A.A 데뷔 당시 가장 주목받은 디자이너였어요.

SO 1995년에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주차장을 얻어서 시작했는데, 스타일이 독특하고 혼자서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하니까 ‘가로수길에 특이한 디자이너가 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컬렉션에 데뷔했을 때 무척 센세이션했죠. 주변에서 TV에서 패션 관련 채널만 돌리면 제가 나온다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준비가 채 안 된 채로 주목을 받아서인지 곧 딜레마에 빠졌어요. 유명해지긴 했지만 옷이 잘 팔리지는 않더라고요.

EK 디자이너의 유명도와 실제 판매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그 딜레마는 지금도 자신의 브랜드를 내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SO 어느 날 쇼룸 뒤에서 누군가가 “임선옥은 굉장히 유명한데 왜 살 만한 옷은 없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죠. 옷도 팔아야 하는 제품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쫓기듯이 컬렉션 열기에만 바빴던 거예요. 겉은 화려했지만 내공이 부족했던 거죠. 당시 인터뷰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요.

EK 컬렉션은 일종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일인데 이를 소비자가 일상에서 소화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 간극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SO 당연히 컬렉션은 다양한 콘셉트와 연출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반면에 ‘왜 못 입는 옷만 쇼에 나오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저도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컬렉션의 DNA를 담은 웨어러블 라인 구축이 필요해요. 해외의 경우에는 컬렉션하는 디자이너가 있고, 그 밑에 전 세계 수출을 위해 각 나라의 환경에 맞는 웨어러블한 옷을 디자인하는 테크니컬 디자이너가 따로 있거든요. 아직 국내에서는 쉽지 않아요. 우리는 디자이너가 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해야 하니까요.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유통 인프라도 필요하죠.

EK 요즘은 컬렉션도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화하고 있어요. 파츠파츠도 2017 S/S 컬렉션에서는 런웨이를 벗어나 길거리에서 패션쇼를 하는 재미난 시도를 했죠.

SO 컬렉션은 여전히 디자이너의 옷을 선보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에요. 컬렉션을 준비하다 보면 새로운 역량이 나오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해요. 그런데 최근에 컬렉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죠. 거리 패션쇼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만족스러운 쇼였어요. 모델과 일반 사람들이 뒤섞여서 자연스럽게 걷고 횡단보도도 건넜어요. 힘 빼고 자연스러운 쇼를 좀 해보고 싶었어요. 패션쇼 장면을 담은 필름도 함께 만들었는데, 패션쇼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좀 부자연스럽게 연출된 부분이 있어서 아쉽긴 해요. 조만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요.

EK 그동안 건축이나 제품 등 다른 영역과 결합한 전시도 많이 하셨죠. 특히 2016년 5월 18일부터 8월 21일까지 소다미술관에 열린 <디자인 스펙트럼Design Spectrum>은 파츠파츠의 프로세스를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이 전시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SO 완성된 유닛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6개의 공방 콘셉트로 소개했어요. 소다미술관은 권순엽 건축가와 디자인 컨설턴트 출신의 장동선 관장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곳이죠.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심미안이 높은 분들이에요. 전시를 통해 파츠파츠 옷의 조각부터 완성까지 전 과정을 보여줬어요. 패션은 건축하고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언제부턴가 패션지보다 〈프레임〉 같은 건축·인테리어 잡지나 제품 관련 잡지를 더 많이 봐요. 항상 패션은 패션 영역보다 인더스트리얼 영역에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고요. 패셔너블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살고, 또 옷도 그런 지점에서 만들고 싶죠.

EK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현대무용 <자유부인>에서 의상을 맡았고, 소치 동계올림픽 한국 퍼포먼스 의상감독으로도 활동하셨어요. 대중에게는 디자이너의 감성을 다른 방식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죠. 앞으로 또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SO 해볼 만큼 해본 것 같아요. 죽을 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는 의뢰를 거절하고 있어요. 이제 나를 찾지 말라고.(웃음) 개인보다 파츠파츠 브랜딩을 완성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여느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실과 달리 부암동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은 바닥에 떨어진 실 하나 없는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글루로 소재를 붙이는 스태프 또한 이런 깨끗한 환경에 무척 만족해한다고 했다. 인근에 있는 쇼룸에는 파츠파츠의 원피스와, 바지, 베스트, 재킷, 가방과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아이템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쇼룸과 작업실에서는 20여 년간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온 그녀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2013년 현대자동차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 <드림 소사이어티>. 압축 성형으로 옷을 마치 조각품처럼 표현했다.
EK 파츠파츠는 곧 임선옥 자신이기도 하니까요. 특히 굵은 아이라이너와 선글라스와 같은 시그너처로도 유명하시잖아요. 언제부터 이런 스타일을 구축하셨나요?

SO 파츠파츠 초기부터는 아닌 것 같은데, 우연히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이렇게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힘들잖아요. 강력한 자기 이미지가 있다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다만 언제 내추럴한 임선옥으로 돌아갈지에 대한 생각은 해요. 날마다 메이크업하는 것도 힘들거든요.(웃음) 거의 블랙을 입지만 저는 화이트 컬러 옷도 좋아해요. 일하다 보면 너무 때가 타니까 못 입는 거죠. 하지만 아직은 지금의 룩을 좀 더 유지해야 할 것 같아요. 파츠파츠가 더 유명해져서 브랜드 파워가 더 생겨야 제가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아요.

EK 그러려면 소재의 낭비 없이 액세서리나 가방 혹은 다른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더욱 대중화될 필요가 있어요. 제로 웨이스트 방식이 파츠파츠의 핵심이잖아요.

SO 맞아요. 파츠파츠의 원피스는 잘라서 티셔츠가 될 수도 있고, 자투리까지 디테일과 아이템이 될 수 있어요. 사실 제로 웨이스트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런 측면에서 파츠파츠는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다룰 수 있죠. 이를 함께 소화할 만한 아티스트가 모이면 무인양품처럼 양질의 라인을 전개할 수 있겠죠.

EK 무인양품은 20대부터 80대까지 누가 쓰더라도 어울리는 가구나 물건을 만들어요. 패션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파츠파츠의 콘셉트와 시스템이라면 해볼 수 있겠다 싶어요.

SO 저는 파츠파츠의 시스템을 통해 한국형 무인양품이나 유니클로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의 일상을 충족시키잖아요. 그곳에 가면 썩 괜찮은, 기본적인 아이템은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파츠파츠는 그보다 업그레이드된 소재의 강점이 있어요. 이를 통해 일상에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이 모인 한국형 멀티 브랜드가 나왔으면 해요.

2016 F/W 컬렉션은 거리 패션쇼로 선보였다. 신호등을 건너는 모델들.
EK 그러려면 전문화된 협업이 더욱 필요하겠죠. 브랜드가 성장하는 데에는 자본의 힘과 마케팅도 뒷받침되어야 하고요.

SO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우리만의 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는 방식이 있어야 해요. 소비자 입장에서는 좀 더 친숙하고 대중적으로 풀어야 하고요. 규모나 유통의 확장이나 컬래버레이션도 필요해요. 브랜드 확장을 위한 제안도 없진 않았지만 처음에는 개념을 어려워했고, 이해하더라도 실행 가능성에는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는 인식이 좀 열린 것 같아요. 저는 패션 프로세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확신해요. 한국형 멀티 브랜드로서 일상을 책임지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고, 시스템을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요. 그래서 계속 협업자를 찾고 있어요.

EK 어떤 점에서 특히 어려워하나요?

SO 기존의 제작이나 프로세스 방식과 다르다 보니 낯설어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 제로 웨이스트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저도 가끔 제로 웨이스트나 한 가지 소재의 브랜드 전개가 가끔 미친 짓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그래서 파츠파츠가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계속 연구하고 도전하면서 우리의 DNA가 만들어졌어요.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도구라고 하잖아요.

네오프렌은 무려 120가지 컬러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블랙과 화이트, 레드를 기본으로 다양하게 컬러를 조합한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실루엣, 움직임에 따라 편안하게 적응하는 착용감, 심플한 디자인은 다양한 스타일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 ‘덜 사고 잘 고르라’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말처럼 파츠파츠의 주 고객은 편안하고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적합한 다양한 스타일링이 가능한 옷을 찾아 파츠파츠를 선택한다고 했다. 트렌디한 스타일을 좇기보다 파츠파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기에 재킷과 블레이저를 결합한 ‘블레종’, 티셔츠와 블라우스를 결합한 ‘티블’과 같은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EK 지금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예요. 3D 프린팅으로 옷도 만들고 AI가 글도 쓰고 필름도 만들죠. 지금까지는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충분한 경험이 쌓이면 지혜와 통찰이 생긴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변화에 계속 적응해야 되는 시대라는 생각도 들어요.

SO 파츠파츠를 론칭한 2011년도 혼돈의 시대였던 것 같아요. 자라 같은 리테일 브랜드와 스파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패스트 패션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시장도 바뀌었어요. 기존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고 있었죠. 당장은 아니겠지만 4차 산업에서는 옷의 유닛이 섬유의 유닛으로 더 세분화될 것 같아요. 파츠파츠는 모듈화된 유닛 단계까지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고요. 앞으로 분명히 모든 옷을 처음부터 로봇이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 시대가 올 가능성도 커요.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는 분명 과거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변화죠.

EK 전 과정의 시스템화에 대한 반발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의 창의력이나 예술적 가치와는 반하는 개념이기도 하니까요.

SO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른 크리에이티브는 생길 거예요.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느냐고 반발할 수도 있지만 노동을 줄여주는 솔루션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을 즐기는 대신 크리에이티브를 더 발휘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쏟을 수 있어야 하고요.

EK 이를 위해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요?

SO 저는 직원이나 후배들한테 지금 입을 만한 옷은 보지도 만들지도 말라고 해요. 파츠파츠는 이미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어요. 트렌드 밖에 있는 트렌드세터죠.(웃음) 이미 나온 결과물은 큰 의미가 없어요. 다만 아카이브를 만들어 놓치지는 말아야 해요. 잘 가지고 있다가 앞으로의 라이프스타일을 예측하고 그에 맞게 조합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봐요.

EK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묻고 싶은데요. <뉴요커> 표지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리스토프 니만이 “영감은 아마추어를 위한 것, 프로는 그저 아침이 되면 출근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프로들은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SO 충분히 공감해요. 어릴 때는 도처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나 직관에 의해 움직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일을 할 뿐이죠. 이제는 언제 아카이브를 꺼내 어떤 방식으로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요. 영감이 떠오른다면 바로 내놓기보다 시간을 두고 체화시키면서 준비하는 거예요.

임선옥은 올해 디자이너 감선주(the kam), 박미선(gear3), 박소현(post december), 이재림(12 ILI)과 함께 ‘웨어 그레이(Wear Grey)’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쇼룸에서 프로모션이나 전시를 하는 색다른 시도를 선보였다. 빠른 속도로 세상이 변하는 지금, 임선옥은 “패션은 무척 소모적인 속성이 있고 우리는 이를 위해 청춘을 보내고 일생 동안 노력하는데 이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디자이너를 모아 디자인 포럼을 해보자는 데에서 시작했다.

EK 웨어 그레이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보려는 시도로 보였어요. 그런 노력을 선배 디자이너가 앞장서서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SO 실력은 있는데 시장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디자이너가 많아요. 가장 큰 원인은 판매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브랜드를 선보여도 유통에서 맥이 끊기는 거죠. 디자이너가 사회성도 좋아서 네트워크를 잘 구축하고 스스로 마케팅을 잘하는 일은 쉽지 않잖아요. 웨어 그레이를 통해 여러 매체에서 이 프로젝트를 주목하고 우리의 생각과 현실을 알리게 된 것 같아 의미가 있었어요.

EK 이전보다는 디자이너들이 옷을 선보일 기회가 더 많아진 것은 분명해요. 편집숍, 온라인 등 다양한 플랫폼이 있고요.

SO 그래서 브랜드 론칭도 훨씬 쉽죠. 하지만 동시에 독인 것 같아요. 이전에는 필드 진입은 어려웠지만 컬렉션을 통해 콘셉트를 보여주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티셔츠 하나에 태그만 붙여도 브랜드가 될 수 있어요. 파츠파츠에 입사하는 디자이너 중에는 개인 브랜드를 운영해본 경험자가 많아요.

EK 요즘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창업을 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시대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창업과 브랜드 론칭을 부추기는 모습은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SO 브랜드는 일생에 걸쳐 만드는 것이지 아이디어만 특별하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뷔 이후가 더 중요하죠. 본격적으로 자신의 콘텐츠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고, 시장이 받아주지 않으면 거기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내공이 부족하면 버티기가 힘들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디자인할 수 있는 시대이고 디자이너가 더 이상 명함일 수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의 디자인에 대한 자세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먼저 필요해요.

EK 이제는 반드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일만이 디자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말씀하신, 디자인보다 조합을 위한 시스템이 더 중요할 수 있고요.

SO 이제는 프로세스 전반을 이해하고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사람도 창작자예요. 산업 간에 서로 연결점을 찾아주는 일도 디자인이고요. IT 기반에서 보면 아마존을 만든 제프 베조스도 굉장한 디자이너예요. 세상에 없던 장르를 만들었으니까요. 넘쳐나는 공급의 시대에 새로운 무엇을 또 만들어내는 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으니 제품을 만들고, 패션을 전공했으니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도 달라져야죠. 앞으로는 이미 나와 있는 결과물이 소비자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쓰일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사람이 디자이너가 아닐까 싶어요.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고 있어요.

패션 디자이너 임선옥의 버킷 리스트

죽을 때까지 공부하기
책이든 경험이든 나를 채우기 위해 공부하기.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기도 하다. 자신의 부족함은 남을 불편하게 만들고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워낙 걷는 걸 좋아한다. 오랜 기간 혼자 진득하게 걸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기를.
집 짓기
현재 진행 중이다. 집은 곧 나 자신을 담아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월든처럼 숲속에서 1년간 자급자족으로 살아보고 글쓰기
자급자족으로 매일을 살고 이를 기록해보고 싶다.
돕기
내게 가능한 범위에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특히 재능이 있지만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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