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브랜딩하는 디자이너 최성희

최성희 켈리타앤컴퍼니 대표는 스테이트 타워 같은 고층 빌딩의 BI부터 동네 카페나 꽃집의 SI까지 다양한 규모의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삶을 브랜딩하는 디자이너 최성희

대기업부터 동네 빵집까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갖기 위해 디자인을 적극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최성희 켈리타앤컴퍼니 대표는 스테이트 타워 같은 고층 빌딩의 BI부터 동네 카페나 꽃집의 SI까지 다양한 규모의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의 개인 스테이셔너리부터 결혼식, 돌잔치에 사용되는 카드와 패키지까지 한 사람을 위한 작은 디자인도 불사한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전달된 명함이나 초대장은 스스로 켈리타앤컴퍼니의 홍보 대사가 되어 클라이언트로 되돌아온다. SNS을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이 추세라지만 최성희 대표는 종이의 감성과 경험을 전달하고 클라이언트의 만족에서 나오는 입소문으로 신뢰를 쌓은 디자이너다.

켈리타앤컴퍼니를 설립한 지 올해로 꼬박 10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 2월 켈리타앤컴퍼니를 시작했으니 정말 딱 10년이 되었네요. 지난 10년간 매일 디자인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책을 보며 강의를 준비하고, 재미난 디자인을 찾아 여행을 하며 보낸 것 같아요. 10년은 하루에 10시간씩만 곱해도 36,500시간이죠.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천천히 걸어가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광고 회사에 다니던 시절, 필름을 거쳐 전달되는 영상이나 신문·잡지처럼 똑같은 종이에 표현되는 인쇄만으로는 제가 기획한 디자인 감성을 다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운 적이 많았어요. 풍부한 감성이 살아 있는 다양한 종이를 사용하면 단순한 인쇄와 가공 작업만으로도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죠. 사실 제가 눈을 호사시키는 화려한 광고보다 좋은 종이 한 장에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소비자거든요. 회사를 그만두고 저희 집 빈 방에 큰 책상과 종이 장을 짜 넣고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지인의 결혼식 초대장과 돌 잔치용 패키지, 회사 로고 등을 디자인해주면서 입소문을 타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작업하다 하얏트 호텔의 스테이셔너리 작업과 당시 태평양에서 론칭한 아모레퍼시픽의 패키지 디자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법인 회사를 만들고 브랜딩과 스테이셔너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켈리타앤컴퍼니 하면 특유의 손맛 나는 드로잉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디자인한 퍼스널 스테이셔너리 디자인 전문가로 유명하지만,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도 많이 하셨죠.

켈리타앤컴퍼니를 알린 첫 브랜딩 작업은 2003년 커피 전문점 ‘테이크 어반’의 BI와 일러스트레이션이었어요. 당시에는 스타벅스나 커피빈같이 글로벌 스탠더드 디자인과 마케팅으로 무장한 커피 전문점이 인기였어요. 그 사이에서 토종 브랜드를 오픈한다는 것은 사실 모험 그 자체였죠.하지만 저는 빅 브랜드 사이에서 우리만의 이미지로 소비자에게 어필해보기로 했어요. 허술해 보이고 만만해 보이는 못난이 그림을 그려 BI를 만들고 유리창과 벽면, 머그컵 등에 적용했죠. 지금같이 드로잉의 가치를 알아주는 시절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소비자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테이크 어반 작업을 계기로 드로잉이 저의 특색이 되었고 지금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압구정동에 있는 카페 무이무이는 네이밍부터 ‘밥한끼 술한잔’이라는 브랜드 콘셉트만 1년을 고민한 애착 있는 작업입니다. 남산 스테이타워의 BI와 타임스퀘어에 있는 펍 프로젝트의 BI와 SI, 진정한 농부가 키워낸 김단사과의 브랜딩과 패키지 디자인, 메르세데스-벤츠, 페라리 등의 초청장 디자인과 대통령 PI 작업 그리고 삼성·LG·SK 등의 CEO 스테이셔너리를 디자인했습니다.

PI의 정확한 정의를 내려주세요. PI와 관련된 사례와 스테이셔너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PI(Personal Identity)는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상징적으로 시각화시키는 작업이에요. 대통령을 상징하는 금색 봉황, 영부인을 상징하는 금색 무궁화를 적용한 다양한 종류의 스테이셔너리나 회사 로고와 서명 등을 적용한 CEO 스테이셔너리 등이 대표적인 사례지요. 스테이셔너리 종류도 명함과 편지지, 봉투, 폴더, 메모지 등의 서식류뿐만 아니라 만찬 메뉴, 초대장, 신년 카드, 선물 카드, 연설문 커버, 수첩 등 수십가지나 되요. 이니셜을 이용해 모노그램으로 카드나 레터 헤드를 장식하기도 하고, 돌잔치 초대장에는 아기 얼굴이나 장난감을, 음악을 너무 좋아해 예술가를 후원하는 어떤 분의 스테이셔너리에는 친필 글씨와 함께 음표를 그려넣기도 합니다. 또한 건축가의 스케치가 담긴 명함이나 작품의 일부가 그려진 작가의 명함도 개인 스테이셔너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나 피아니스트, 작가, 스타일리스트 등 문학이나 예술계 인사들도 개인 스테이셔너리에 관심이 많지만 대학교수나 CEO 중에도 자신의 소속이나 지위에서 벗어나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개인 명함을 따로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시각화하는 데까지 관심이 미치는 분들이라면 안목 역시 높을 것 같아요. PI를 의뢰하는 분들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PI 디자인을 의뢰하는 분들의 안목은 정말 대단해요. 저를 항상 긴장시키세요. 그래서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모두 저의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 스테이셔너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시각화하겠다는 생각이 이미 그분을 특별하게 만드는 거니까요. 자신을 나타내는 다양한 것을 경험한 분들이 마지막에 투자하는 것이 자신만의 스테이셔너리예요. 예전에는 고가의 웨딩드레스와 예물을 준비하면서도 초대장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잠깐 보고 버릴 종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웨딩 스테이셔너리를 신경 쓰는 분들은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미안함과 바쁘신 중에 시간 내서 찾아주실 것에 대한 고마움’을 초대장으로 정중히 표현하고 싶어 하세요. 결국 가치의 차이인 것 같아요.그런 가치를 아시는 분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기쁜 마음입니다.

PI부터 대기업 BI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하셨어요.

규모에 따라 작업 접근 방식도 조금은 다를 것 같은데요. 저는 BI나 PI 모두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것이 아이덴티티잖아요. 차이가 있다면 퍼스널 아이덴티티는 제가 직접 고객을 만나 대화와 자료를 통해 지난 세월 동안 쌓인 그분의 이미지나 취향, 가치관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에요.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앞으로 만들어질 브랜드의 모습을 상상하며 디자인하죠. 또한 경쟁사의 동향과 잠재 고객의 취향, 브랜드의 라이프 사이클 등을 고려해서 장기적인 타임테이블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클라이언트가 직접 작업실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도 최성희 대표님의 능력인 것 같습니다.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브랜딩이나 스테이셔너리 작업을 진행할 때, 고객이 저희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요. ‘디자인이 필요한 사람과 직접 일한다’는 저희 회사의 원칙이기도 하고요. 발에 잘 맞는 구두를 맞추려면 구둣방에 직접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숫자로 딱 떨어지는 사이즈 이외에도 정확하고 미묘한 나만의 사이즈를 측정할 수 있고,조금 더 맘에 드는 소재와 디자인을 직접 보며 고를 수 있으니 만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가끔 구체적으로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고객이 계시거든요. 직접 방문해서 다양한 작업 방식이나 샘플을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와 정보가 생기죠. 디자인의 반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프로젝트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 PT를 하거나 따로 홍보를 하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된 초청장이나 명함이 스스로 잠재 고객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의 클라이언트 중 한 분이 초대장을 만들어 500분에게 보낸다면 그 카드를 받은 500명이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는 거지요. 굳이 홍보 방법을 말하라고 한다면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성적 체험을 통해 디자인을 전달’하는 거예요. 카드 한 장이지만 그것이 결국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니 좋은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죠. 개인 카드나 명함은 종이의 재질이나 두께,섬세한 컬러,광택,인쇄 방법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큰 차이를 만듭니다. 그 차이가 고스란히 그것을 사용하는 분의 이미지로 전달되는 거고요. 결국 좋은 디자인과 높은 품질의 명함이나 초대장이 최고의 영업 사원 노릇을 해주는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에게 배운다’고 말씀하셨듯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배우는 점도 많을 것 같아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나 디자이너로서 보람을 느낀 적은 언제인가요?

저희를 찾는 클라이언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중요한 행사를 앞둔 사람들이죠. 큰 기대와 준비된 마음, 희망에 부푼 사람들만 만나니 오히려 제가 그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또한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도예가, 장인 등 여러 전문가와 협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좋은 분들과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몇 해 전 태평양에서 론칭한 프리미엄 녹차 장원 패키지 디자인을 진행하며, 전주장으로 유명한 소목장 소병진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전주에 달려 갔어요. 작업실에는 오랫동안 보관한 나무가 많은데 그중 백두산 소나무도 있었어요. 그 나무가 가구가 될지 소품이 될지, 아파트로 갈지 사무실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14년 동안 따뜻한 곳과 찬 곳, 습한 곳과 건조한 곳을 옮겨 다니며 보관하셨데요.그 나무가 무엇이 되건 어디를 가건 뒤틀림이나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훈련을 시킨 거죠. 그래서 저는 그런 정성으로 나무를 돌보는 그분과 함께 작업하고 싶었어요.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단단하고 좋다는 얘기를 듣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차시 300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요.

얼마 후 작품이 도착했어요. 저는 흑단처럼 단단하고 까만 차시를 원했는데 결과물은 전체적으로 색이 고르지 않은 거예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 밤 10시에 그것을 들고 전주까지 내려갔더니 선생님께서 일일이 손으로 갈아서 만든 것을 다 갖고 나오시면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재료도 귀하고 강도가 너무 세서 다듬기도 힘들다며 차시 하나 만드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는 거예요. 이렇게 애쓰며 작업하시는데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급한 일정으로 같은 작품을 300개나 주문한 제가 오히려 부끄럽고 죄송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이런 분들을 만나면서 저는 새로운 인생을 여러 번 더 사는 것 같아요.

테이크 어반을 비롯해 무이무이,CGV 펍 같은 식 공간 브랜딩 작업도 많이 하셨어요. 요즘엔 개인이 꾸리는 동네 작은 가게에서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데, 실제 국내 시장의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아쿠아트리라는 꽃집부터 궁중 음식점 궁연, 중식 레스토랑 차이나 팩토리, 콰이 19 등 다양한 종류의 BI와 SI 작업을 했어요. 이제는 국내에서도 브랜드의 필요성을 많이 인식하고 작은 가게라도 차별화된 디자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멋쟁이 고객들이 정말 많으세요. 작은 프로젝트를 할 때 좋은 점은 클라이언트가 파트너가 된다는 거예요. 작은 디테일까지 생각을 공유하고 디자인에 반영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무이무이 같은 경우는 송숙 대표님과 콘셉트 잡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한식을 베이스로 음식도 내는 카페를 하고 싶다’가 시작이었죠. 1년 동안 그분의 음식을 먹어보며 지켜봤는데 음식에 대한 정성이 정말 대단하세요. 살아 있는 새우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배가 들어오는 항구까지 찾아가고, 유기농 유자를 재배하는 농장과 계약해 직접 유자차도 만들고, 직접 조청을 뽑는 할머니를 찾아가는 등 그 모습을 보며 이런 마음과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려는 사람은 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유일무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무이무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무이무이의 간판이나 앞치마 등에 사용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일본에서 전시했던 저의 개인 작품이었는데 이곳을 위해 내드렸죠. 그분이랑 1년 동안 회의하면서 저는 또 다른 세상을 배울 수 있었어요.‘이런 정성으로 밥 한 끼를 준비하시는데 나는 디자인을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기도 했습니다.

정희택 신한 BNP 파리바 프로젝트 운용팀 차장은 켈리타앤컴퍼니에 대해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잘 이해하며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부티크형 아틀리에라는 점이 믿음이 간다’고 하셨어요. 켈리타앤컴퍼니의 디자인 철학이 궁금합니다.

제가 PT할 때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문구가 있는데 그것이 저의철학이될것같아요.‘좋은디자인은그럴듯한것이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밥집이면 밥집답게 옷집이면 옷집답게 본질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 속에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지요. 상대적 가치를 따지기 전에 절대적 가치를 따지자는 거예요. 무이무이의 앞치마에 프린트한 것 중 “양배추를 두 번 삶을 필요 없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양배추를 너무 잘 삶으려고 두 번 삶으면 뭉개지기만 하고 못 먹게 되잖아요.너무 잘하려고 지나친 행동을 하면 결국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니 적당한 곳에서 멈춰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즐겁게 일하려면 자신의 작업 방식을 클라이언트에게 미리 알려주는 게 중요해요. 계약 기간 동안 몇 번의 미팅을 어떤 성격으로 할 것인지 말해주는 거죠. 거꾸로 클라이언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내야 해요.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단순화시키는 것도 중요해요.클라이언트 측의 담당자 한 명을 정해 주로 그 사람과 일을 진행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사람이 간섭하게 되면 당연히 실수가 생기고 실수는 오해가 되고 오해는 일을 그르치는 원흉이 되니까요. 뭐든지 단순한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최성희 대표님은 정감 있는 일러스트레이션과 종이 선별에서 남다른 안목과 실력을 가진 것으로 소문났어요. 어릴 적부터 유독 종이에 집착하신 것 같은데, 종이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나요?

아마 다른 사람도 많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 같아요.종이는 색, 질감, 두께, 무게가 다양하고 비례에 따라 느낌도 완전히 달라지죠. 똑같은 펜과 잉크를 사용해도 종이에 따라 스며듦과 번짐이 다르니 전혀 다른 감성을 전할 수 있어요. 종이는 디자인의 무궁무진한 파트너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종이 가게는 일본 나고야에 있는 ‘가미노 온도’인데 직접 손으로 떠서 만든 종이를 판매하는 곳이에요. 단어를 그대로 풀면 ‘종이의 온도’라는 뜻이죠. 나무로 만든 종이는 사람에게 항상 좋은 온도만 전해줘요.돌 성분이 많이 포함된 트레싱지나 화학 성분이 들어간 펄지는 차가운 느낌을 주잖아요. 하지만 나무로 만든 종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온도지요. 그리고 음식처럼 정말 다양하죠. 상황에 맞게 즐길수도 있고요. 제아무리 전자책이 발달한다 해도 종이 잡지나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마치 전자책은 같은 접시에 먹는 음식처럼 재미없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마다 인쇄 방법에 따라, 제본 방식에 따라 다양한 감성을 전하죠.

2006년부터 매년 여행한 곳을 일러스트레이션 달력으로 남기는 것도 켈리타앤컴퍼니만의 특색입니다.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03년경 신라 호텔과 하얏트 호텔 F&B의 그래픽물과 룸 스테이셔너리를 작업할 때였죠. 신라 호텔의 일식 레스토랑 아리아케나, 하얏트 호텔의 JJ 마호니스 등에는 항상 행사가 잦습니다. 이런 일은 늘 급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2~3일 내에 결과물을완성해야했고그러다보니2년동안잠도거의못자고 일만 했어요.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제 자신을 돌아봤죠.‘우리 회사 디자이너들은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라고요. 답이 나오더군요. ‘저 여자처럼 살지 말아야지.’ 직원들은 인생 선배로서, 디자인 선배로서 저를 바라볼 텐데, 어린아이도 있는 엄마가 집에도 못 가고 밤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은 진짜 지겹고 피곤하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이런 거구나’하고 저를 통해 깨달을까 봐 갑자기 무서워지더라고요. 그 이후 모든 걸 바꿨어요.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여행을 한다. 처음에는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바쁘면 짧게라도 다녀오고 1년에 50일 이상 여행을 해요.여행하며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를 생각해주는 지인들에게 행복했던 추억을 공유하고 365일 안부를 전하는 기분으로 캘린더를 만들게 되었지요.

일본, 뉴칼레도니아, 뉴욕 등 다양한 나라를 캘린더에 그리셨는데, 여행지 선택에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디자이너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뉴칼레도니아나처럼 자연환경이 특별하거나 모나코같이 동경하는 문화가 있는 나라를 먼저 생각해요. 또한 작가를 찾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여행을 하기도 해요. 한때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판화에 빠져 브루주아가 다니는 뉴욕의 판화 공방을 찾아가 프린트 마스터를 직접 만나고 작업 현장을 돌아보기도 했고요, 캘리그라피의 거장들을 만나고 싶어 파리나 뉴욕으로 찾아 다니기도 했어요.여행지 선정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 잘 맞는 여행 친구라고 생각해요. 저는 가족 여행도 자주 가지만 레스토랑 컨설팅 전문가 김아린 비마이게스트 대표와 건축과 인테리어를 하시는 이성란 소장님 등의 지인과도 자주 다녀요. 그들과 함께 여행하면저는그나라의그래픽디자인에대해설명하고한분은 유명 레스토랑을 소개하며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죠. 또 다른 한 분은 건축에 대해 알려주니 셋이 모이면 얼마나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겠어요. 모두가 서로의 선생님이 되는 거죠.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행 친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점심 후 독서 1시간이라는 기업 문화가 인상 깊었어요. 직원들을 위해 독서 문화를 만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독서 문화는 매일 12시 반부터 1시간씩 시간을 정해 일주일에 1권씩 책을 읽자는 취지였어요.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면 1년이면 50권 정도 되잖아요. 5년이 되면 250권인데 우리 회사에 5년 이상 다닌직원이라면5년전의자기모습과는전혀다른큰사람이 될수있을거라생각했어요.제가직원들에게줄수있는가장 큰선물이될것같아시작한건데,늘급한일에쫓기다보니 직원들이 제대로 마음의 짬을 내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독서 시간에 불어, 일어, 중국어 등 자기가 원하는 제2외국어 공부를 해요.영어는 기본이니 그 외에 언어를 알면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10배는 더 많아지거든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면 무조건 여행하기를 강조해요. 디자이너가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여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디자인 전공 학생의 남녀 비율을 살펴보면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습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끝까지 남아 활동하는 디자이너는 대부분 남성 디자이너예요. 여성 디자이너로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과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디자인보다 남자 친구가 더 중요할 수도 있고 가족,육아 등이 더중요한가치로여길수도있겠지만저는모두방법을찾고 병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생기기도 전에 무언가를 빨리 이루고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탑을 쌓으려면 바닥에 돌 16개를 쌓고 그 위에 9개를 쌓고,또 그 위에 4개를 쌓아 가면서 순서를 밟고, 쌓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내려놓고 다시 쌓으면 되는데,요즘 젊은 친구들은 한 줄로 쌓길 원해요. 빨리 결론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러다 무너지면 마련해놓은 터전이 없으니 포기도 쉬워지는 거고요. 자기 인생에 대한 고민을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매일 하는 것 같더라고요.매일 고민만 하다보면오늘에집중을못하고,그러다보면내일이만들어지지 않는데 말이죠.

후배 디자이너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요?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삶과 관련된 부분을 공유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상식도 많아야 하고 인문학적으로도 풍부한 사람이 디자이너로 어울려요.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깊이와 폭이 필요하죠. 특히 브랜딩은 본질을 간파하고 해석해내야 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소양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학파 디자이너도 많아지고 디자인 교육 수준도 날로 높아지는데 정작초등학생도볼수있는사물의본질을못보는디자이너가 많은것같아요.어렸을때달콤함,심심함,미끌미끌한감촉등 다양한감성을경험해야하는데이모든걸무시하고학원다니며 문제집만 풀어서 그런 것 같아요.

최성희 대표님이 그리는 켈리타앤컴퍼니의 미래가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꾸준히 잘하고 싶어요.켈리타가 저의 영문 이름이기도 하지만 성경책을 들고 다니며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의 이름이기도 해요. 선지자가 들고 다니는 성경책은 결국 종이잖아요. 종이에 표현된 아름다운 디자인의 가치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싶어요. 섬세하게 느껴지는 촉감과 작은 디테일이 주는 큰 기쁨을 전하고 싶습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