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른 공간’에서 발견한 구찌 정신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단순한 컬렉션이 아닌, 구찌의 브랜드 정신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린다. 4월 17일부터 7월 12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는 서울의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과 그 공간들의 프로젝트를 한데 모은 전시다. 시청각, 합정지구, 통의동 보안여관, d/p, 오브, 탈영역 우정국, 공간:일리, 스페이스 원, 취미가, 화이트노이즈까지 모두 열 곳이 참여했으며 메리엠 베나니Meriem Bennani, 올리비아 에르랭어Olivia Erlanger,...
단순한 컬렉션이 아닌, 구찌의 브랜드 정신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린다. 4월 17일부터 7월 12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는 서울의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과 그 공간들의 프로젝트를 한데 모은 전시다. 시청각, 합정지구, 통의동 보안여관, d/p, 오브, 탈영역 우정국, 공간:일리, 스페이스 원, 취미가, 화이트노이즈까지 모두 열 곳이 참여했으며 메리엠 베나니Meriem Bennani, 올리비아 에르랭어Olivia Erlanger, 이강승 등 국내외 아티스트 5명도 함께했다. 이번 전시는 서울의 다채로운 문화 경관과 현대미술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헤테로토피아Eterotopia’에 대한 고찰에서 영감받았다. 미셸 푸코가 정의한 개념 헤테로토피아는 ‘다른’을 뜻하는 ‘heteros’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로 ‘다른 장소’를 의미한다. 즉 기존의 공간과 다른 ‘대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소수자의 정체성과 퀴어 문화를 탐색하는 등 정치적이며 실험적인 활동을 해온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의 속성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서울의 ‘다른 공간’일까? 지난해 구찌는 서울의 대림미술관을 새로운 구찌 플레이스 중 한 곳으로 발표한 바 있다. 뉴욕의 대퍼 댄 아틀리에스튜디오, 런던의 메종 애슐린, 홍콩의 비보 등과 더불어 구찌의 취향과 가치를반영하는, 구찌에 영감을 주는 장소로 꼽은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를 보면 구찌가 지향하는 브랜드 정신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큐레이터를 맡은 미리암 벤 살라Myriam Ben Salah의 말을 빌리면 이는 ‘다름에 대한 이해,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새로운 정치적·심미적 관계에 대한 상상’이다. 한마디로 구찌가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지한다는 얘기다.
미리암 벤 살라
큐레이터
“이른바 ‘정상’이라고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간을 생각했다.”
구찌와 이번 전시를 함께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구찌가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미술계에 대해 알아가고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외부자 입장에서 한국 미술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문화 제작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작업이 가장 의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처음 제시한 지침에는 그가 구찌를 위해 하는 디자인에 관련된 요소가 담겨 있었다. 장르와 젠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심미적 가치, 자기 표현의 긴급성, 패션의 선봉에서 외치는 영속적인 인류학적 선언 같은 것들이다. 나는 예술에서 이런 가치와 관념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었기에 주요 기관과 시장이 주도하는 미술계의 대안으로 자리한 독립 공간과 대안 공간을 조사하게 되었다.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은 역사적으로 가게 앞, 다락, 창고, 그 밖에 주류가 관심을 갖지 않는 장소에 둥지를 트는 은밀한 현장으로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정치적 성향이 강하고, 실험적이며, 상업적 가능성보다 예술적 논쟁을 중시하는 작업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번 전시에 영감을 준 것은? 고대 개념인 ‘프로크세니아proxenia’에서 착안했다고 들었다.
‘프로크세니아’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손님 접대 관습이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 개념을 구찌에 대한 비전의 중심축에 놓고 구찌가 진행해온 각종 예술 프로젝트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전시에서 구찌는 손님을 맞이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곳에서는 다방면의 예술 독립체가 함께 존재하지만 하나의 묶음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서울의 독립·대안 예술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처음 한국행을 앞두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조사하다 보니, 예술가나 큐레이터들이 운영하는 독립 예술 공간이 주요 기관 및 시장 중심 미술계의 대안으로 등장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여인영을 만났다. 이번 프로젝트의 큐레이토리얼 컨설턴트로 함께한 여인영은 내가 한국 미술계 생태계에 자리 잡은 이 구조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공간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대안’ 또는 ‘다른’ 공간의 더 넓고 더 은유적인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조금은 어두운 시점에 대안적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물리적·정신적 공간, 이른바 ‘정상’이라고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간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전시에 5명의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함께했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5명의 아티스트에게도 앞서 말한 주제에 대한 고민과 가까운 미래(‘대안적 공간’이라 정의하는 것), 그리고 현실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가상의 신화를 동시에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예를 들어 뉴욕에서 활동하는 모로코인 작가 메리암 베나니의 영상 〈CAPS에서의 파티Party on The CAPS〉는 불법으로 대양을 건너고 국경을 넘다가 대서양 한복판의 섬 CAPS에 억류된 가상의 난민과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채로운 시각적 형상을 통해 규범적인 지배 담론의 편협한 관점에 경쾌하게 의문을 던지는 예술적 개입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사실주의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10개의 공간과 그들의 전시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전시(공간) 디자인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공간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각 공간이 지닌 독자적인 정체성, 프로그램, 비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공간들이 공동 전시의 일원으로 함께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단체처럼 뭉뚱그려지지 않고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 이탈리아에 있는 훌륭한 세트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키비오 페르소날레Archivio Personale’가 모든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해서, 대림미술관 안에서 교류하는 방안이 무엇일지 함께 고민했다. 프로젝트들 사이의 교감, 공간 안의 시각적 층위, 프로젝트들 사이의 개념적 교류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큐레이터로서 요즘 당신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관람객의 다양성에 특히 관심이 많다. 더 넓은 범위의 대중에게 생각을 전파해야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전위적인 개념과 주류, 실험적인 발상과 대중문화가 마찰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마찰에서 주류와 대중문화는 더 깊은 논의에 돌입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맡는다. 패션 브랜드와 협업하고, 전형적인 미술계 관람객이 아닌 그들의 관람객을 대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이런 고민의 일환이다.
여인영
스페이스 원Space One 디렉터
“대안, 다양성, 소외 그리고 소수의 목소리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에 스페이스 원의 디렉터로 참여하는 동시에 큐레이토리얼 컨설턴트를 맡았다. 어떤 역할이었나?
서울, 한국의 맥락에서 이 전시를 풀어나가는 데에서 지역적 이야기를 전체 전시 콘셉트에 내포시키는 큐레이토리얼 디렉션을 맡았다. 서울 독립·대안 공간 선정과 소통을 맡고 전시 작품의 방향, 전시 구성, 전시 한글 제목 등을 정하며 웹사이트, 브로슈어 등의 전체 내용을 영어, 한글로 편집하는 등 전체적인 전시 큐레이팅을 함께 했다.
스페이스 원이 선보인 전시 〈I Love We Love We Love I〉에 대해 소개한다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은 포스터 인쇄물 설치와 3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영상 설치물 2점이다. 모두가 2017~2019년 스페이스 원에서 진행한 전시와 프로젝트의 아카이브이다. 포스터 인쇄물은 스페이스 원에서 진행한 전시 이미지와 글을 수집해 만든 것으로 하나하나의 개인(전시)이 모여 또 다른 하나의 나선형 형상을 이루도록 했다. 영상 설치물은 ‘소외Alienation’, ‘엮다Weaving’, ‘조립Assemblage’ 세 가지 주제를 다룬다. 이는 ‘우리는 오래된, 예상된 생각에서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여성들이 직물을 엮듯이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비선형적으로 엮을 수 있을까?’, ‘주위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새롭게 조립하여 미래를 만들어가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으로 담론을 생산한다.
스페이스 원이 ‘이 공간, 그 장소’로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리적 공간에서 나아가 그 공간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가 스페이스 원이 정의하는 의미의 ‘이 공간, 그 장소’인 것 같다. 스페이스 ‘1’ 또는 ‘One’이라는 명칭은 나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하나로 다시 발명하기 위해 계속되는 탐색으로서의 ‘나’를 재상상한다. 이것은 논리와 내러티브의 다양한 구조가 지닌 공존 및 순환의 패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스페이스 원은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중심에 두면서 ‘도시화’, ‘테크놀로지’, ‘젠더’라는 세 가지 주제로 담론을 확장한다. 다양한 문화의 국내외 예술가와 공간, 다학제의 전문가들과 함께, 그리고 지역 공동체와 함께 하나의 장소성이 아닌, 미시적에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우리’를 포괄하는 ‘다른 공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황수경, 구윤지
공간:일리 디렉터
“더 많은 여성 작가와 여성의 시선이 우주를 밝히고 유영하기를 고대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황수경 공간:일리의 처음은 존재론적 대안이었고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것이 예술 공간이라 불려 이곳에 소집되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4개의 모니터 역시 세대가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자기만의 방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공간:일리에서는 여성의 시선, 여성의 목소리가 중요한 화두다.
구윤지 운영진은 모두 여성이지만 세대가 다르며 각자 다른 세계관으로 예술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여성 자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독특한 시선으로 여성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런 프레임을 자꾸 드러내고 도려내어 젠더적인 기대감을 지워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작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할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공간:일리에서 선보인 전시 〈크프우프크 유영하기〉에 대해 소개한다면?
황수경 크프우프크Qfwfq는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단편소설집 〈우주 만화〉의 화자다. 이 단편들의 주인공은 모두 크프우프크로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에서부터 읽어도 똑같으며, 방향성도, 시간과 공간도, 계급도 모두 초월한 존재다. 인간 역사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추상적이고 총체적인 의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간:일리가 유영 중인 크프우프크를 표현해보고자 했다. 즉 〈크프우프크 유영하기〉는 ‘우주 밝히기’다
대안·독립 예술 공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요즘 관심을 갖는 이슈는 무엇인가?
구윤지 대안 공간은 어떻게 해야 대안적이 되는 것이며, 독립 공간은 어디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어야 하는지. 공간 운영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런 현장에서 기획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황수경 우주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우리의 전통적 여성에 관한 신화와 여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의 시선과 연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개인 작업 ‘우주선_스마일Spacecraft_Smile’에서 다루는 것처럼 이주 노동자 가정 청소년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있다. 동시에 끝없이 이주하는 우리의 유영이 ‘예술 되기’를 주입하는 사회구조에서 어떻게 소통되고 전달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글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