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확장하는 사적인 공용 공간 중간 주거 프로젝트
사용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적인 공용 공간은 키친이나 카페가 되기도 하고 스테이나 라이브러리가 되기도 한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벗을 때 우리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인지한다. 미드에서 하이힐을 신은 채 침대에 올라가는 장면에 경악하는 것도, 식당에 갔을 때 좌식 테이블만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프라이빗 공간과 퍼블릭 공간을 심리적으로 구분해서다. 신발을 신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에 따라서 편하게 있어도 될 자리인지 아닌지가 정해진다. 그래서 ‘신발’은 문도호제 임태병 소장의 중간 주거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그의 건축은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곳까지를 공용 공간으로 전환 가능한 곳으로 구획한다. 주로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하는 키친과 다이닝 룸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개는 침실과 욕실이 배치되어 있는 프라이빗 공간은 신발을 벗는 곳부터 시작된다. 거주자가 어떻게 사용할지에 따라 각 공간의 배치와 연결 구조를 모색하는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기에 중간 주거 프로젝트를 단순히 멋진 코리빙 하우스의 연작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대신 주거 공간 안에서 공용 공간을 규정하는 장치와 활용을 모색하는 공간적 실험으로 바라봐야 한다. 임태병 소장은 공용 공간과 공유 공간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공용 공간이란 계단, 복도 등의 통로, 그 밖에 반드시 함께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공유 공간은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영역으로, 뚜렷한 관리 주체가 없다면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이 독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공유 감성이 성숙하게 무르익지 않았기에 자율성과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시민 의식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게 임태병 소장의 생각이다. 그리고 비교적 관리 주체가 명확한 ‘사적인(소유의) 공용 공간’ 위주로 제3의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가 바로 중간 주거 연작이다. 중간 주거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총 3개의 작업을 완성했다. 각 건물 내부에서는 느슨하고 유연한 형태의 공간 점유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처음 선보인 곳은 2018년 완공한 ‘해방촌 해방구’다. 기업의 CFO에서 은퇴한 건축주는 손님을 초대해 식사할 수 있는 공간과 혼자 쓸 수 있는 서재가 있는 세컨드 하우스를 의뢰했다. 일반적으로 교외에 지어 관리가 잘 안되는 세컨드 하우스와 달리 서울 용산구에 지은 해방촌 해방구는 콤팩트한 규모의 건물이지만 자주 드나들 수 있어 공간 활용도가 높다. 1층 현관에 들어서면 키친과 다이닝 룸이 바로 보이는데 여기는 신발을 신고 사용하는 곳이다. 2층 서재부터 4층까지는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사적인 공간이다. 굳이 신발을 벗지 않아도 손님을 부담 없이 초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획되는 이 구조를 건축주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두 번째로 지은 공간이 ‘풍년빌라’다. 이곳의 설계는 착착스튜디오 김대균 소장이 맡았다. 2019년 완공한 4층 건물에 3세대가 입주했는데 입주민은 다름 아닌 임태병 소장 가족과 지인들이다. 일반적으로는 층마다 한 세대씩 입주하지만 풍년빌라의 각 세대는 층마다 절반에 걸쳐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1층과 2층의 절반까지 임태병 소장 가족이, 2층의 나머지 절반과 3층의 절반은 혼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3층의 절반과 4층은 방송 작가 부부가 살고 있다.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사적인 공용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다르다. 임태병 소장 가족은 키친, 다이닝 룸, 리빙 룸을 1층에 배치해 사적인 공용 공간으로 쓰고 2층은 침실과 욕실로 사용한다. 일러스트레이터는 다이닝 룸을 빼고 키친과 다이닝 룸만 사적인 공용 공간으로 두었다. 방송 작가 부부는 탕비실과 서재가 사적인 공용 공간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의 용도를 구분해 누군가를 초대하거나 프라이빗하게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정했기에 삶의 만족도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풍년빌라의 건축주는 김은희 방송 작가 부부인데 그가 유명 인사라는 사실보다, 세입자들이 먼저 건물 부지를 선정하고 투자할 건축주를 찾는 특이한 방식이 화제였다. 건물 세입자들은 10년이라는 장기 점유권을 보장받는 대신 토지비, 건축비에 대한 이자와 임대료를 낸다. 건축주는 공실률에 대한 부담 없이 안정적인 임대 수익과 함께 10년 후 지가 상승에 대한 시세 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건축주는 다음 중간 주거 프로젝트 연작인 ‘여인숙’에도 같은 방식으로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풍년빌라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이내 거리인 여인숙은 지난해 초 문을 열었다. 1층에는 작은 카페가 입점했고 2층은 문도호제 사무실, 3층부터 5층까지는 3세대가 입주한 주거 공간이다. 사무실 옆집인 202호에는 풍년빌라와 여인숙 입주 세대를 위한 게스트 룸을 만들었다. 그러다 스테이폴리오 측의 제안으로 주말에만 운영하는 1인 스테이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신축하기 전 본래 건물의 용도가 여인숙이었으니 예전 장소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게 된 셈이다.
사용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적인 공용 공간은 키친이나 카페가 되기도 하고 스테이나 라이브러리가 되기도 한다. 마을 안에 이러한 중간 주거 모델이 많아지면 커뮤니티 공간으로 확장할 수도 있고 이를 연결해 다양한 동네 탐험 프로그램을 기획해볼 수도 있다. 이처럼 사적인 영역이지만 공용 공간으로의 전환이 용이한 중간 주거 연작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글 서민경 기자 사진 제공 문도호제
여인숙
기획ㆍ디자인 문도호제(대표 임태병), mundoehoje_oficial
클라이언트 개인
연면적 222㎡
규모 지상 5층
준공 연월 2020년 1월
주소 서울시 은평구 응암로21길 17
문도호제
임태병 소장
“집도 아니고 오피스도 아닌 곳을 제3의 공간이라 부르는데, 동네에 이런 완충 역할을 하는 사적인 공용 공간이 많아질수록 좋은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리라 본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사이건축에서 2016년 문도호제로 독립하면서 건축이라는 형식 말고 기획부터 설계, 시공 감리, 운영과 관리까지 공간 프로젝트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연희동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연희동은 전용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일반 주거지역으로 지정된 곳과 달리 건폐율과 용적률, 쉽게 말해 면적과 층수를 까다롭게 제한해 비슷한 규모의 집을 지으려고 해도 다른 지역보다 넓은 땅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맞춰야 했기에 정원이 딸린 2층 단독주택으로 대부분 지어졌다. 이곳의 집주인들은 대개 자녀가 독립하면 넓은 집에 대한 관리 부담으로 집을 팔고 서울 외곽으로 이주하게 된다. 주민들이 계속 정든 동네에 살면서 실내 빈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중간 주거 형식의 실험을 떠올리게 됐다.
중간 주거에서 공용 공간을 현관의 확장으로 보는 개념이 흥미롭다.
현관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장소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집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는 문화권에서 현관은 외부와 내부, 퍼블릭 공간과 프라이빗 공간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공기, 냄새, 온도가 미묘하게 전환되는 곳이 바로 현관인데, 보통 집 구조에서는 규격화된 평수에 따라 현관 크기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현관 크기를 확장해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키친이나 서재 등의 용도를 추가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문을 닫으면 완전한 프라이빗 공간이 되었다가 문을 열면 퍼블릭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도 아니고 오피스도 아닌 곳을 제3의 공간이라고 부르는데, 동네에 이런 완충 역할을 하는 사적인 공용 공간이 많아질수록 좋은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리라 본다.
세 번째 중간 주거 프로젝트 결과물인 여인숙에는 1인 스테이인 ‘여정’이 있다. 이곳의 체크인을 문도호제 사무실에서 한다고 들었다.
오후 5시부터 체크인을 하는데, 같은 층 사무실을 쓰는 내가 직접 방 안내를 하면서 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됐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웰컴 드링크 쿠폰도 만들었는데 이 쿠폰으로 여인숙 1층과 풍년빌라 1층에 위치한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여정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공간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늦잠을 자거나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멍 때리기 좋다.
숙박객들이 남긴 메모를 사진으로 찍어 여정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포스팅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어제 여기서 머물다 간 한 손님이 “그늘 속에서 한껏 느긋하게 뒹굴거리다 갑니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여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었다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이 메모가 정말 바라던 피드백이었다. 여정에는 TV가 없는 대신 책을 비치해두고 원하는 구절을 필사할 수 있도록 연필을 준비해두었다. 그런데 숙박객들이 메모지에 소감을 남겨놓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숙박객이 다녀간 다음 날 이 메모를 읽어보는 게 기대하지 못했던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현재 진행 중인 중간 주거 프로젝트는 어떤 내용인지 소개해달라.
청운동에 있는 고야네집 프로젝트를 2018년부터 진행해 올해 9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베를린에 거주 중인 건축주가 1년에 3~4개월 정도 서울에서 머무를 용도로 집을 의뢰했다. 나머지 기간 동안 건축주의 집과 차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게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1층은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오도록 하고 2층부터는 빈집을 스테이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누군가 그 집에 상주해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그 밖에도 각 지역에 중간 주거 형태로 공용 공간을 만드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올해 중순 쯤 열릴 예정인 ‘코리아 하우스비전’ 준비로 서울과 진천을 바쁘게 오간다. 충북 진천에서 여는 것인 만큼 중간 주거의 농촌형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풍년빌라
기획 문도호제(대표 임태병)
디자인 착착스튜디오(대표 김대균)
클라이언트 개인
연면적 220㎡
규모 지상 4층
준공 연월 2019년 4월
주소 서울시 은평구 가좌로 9길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