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와 민 회고전〈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

지난 1월 16일부터 3월 19일까지 교토 DDD 갤러리에서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의 회고전이 열렸다.

슬기와 민 회고전〈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
4000여 개의 이미지가 랜덤으로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

지난 1월 16일부터 3월 19일까지 교토 DDD 갤러리에서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의 회고전이 열렸다.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라르스 물레르 Lars Muller, 다나카 이코 등 거장 디자이너들이 거쳐간 이 그래픽 디자인 전문 갤러리에서 국내 디자이너의 전시가 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전시 기획자이자 예술 평론가 콘노 유키는 슬기와 민의 디자인에서 벌어지는 시간성과 공간성에 주목했다.

〈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 전시.

일시 정지의 평면 공간에서 타깃 조준하기 전시장에 소개한 그래픽 작업 대부분은, 예컨대 벽면의 포스터나 선반 위의 출판물은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한 작품은 전시 공간에서 담당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야 볼 수 있다. ‘무지개’(2010)는 CD 위에 뚜렷한 색으로 여러 개의 점이 찍혀 있는 작품인데, 플레이어의 줄을 아래로 당겨 작동시키면 점이 원을 그린다. 7분 후 음반의 회전속도가 감소하면서 원은 색점들로 다시 흩어진다. 일본 교토 DDD 갤러리에서 열린 〈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은 아카이브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2017년 페리지 갤러리나 최근 휘슬에서 열린 개인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의 ‘실험적인’ 그래픽 작품들이 비교적 얌전하게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전시를 둘러본 관람객은 자칫 디자인이라는 ‘결과물’이 전시나 퍼포먼스의 아카이브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하게 판단하기 전 단계로 돌아오자.
앞서 언급한 ‘무지개’에서 출발해 우리는 슬기와 민 작업의 중심축을 ‘실험적인’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실험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라는 의미와 다르며, 결과물은 과정을 거쳐 달구질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실험적인 결과물은 가정을 잠시 정착시키거나, 최종 결과에서 한 발짝 물러선 시간적 중간 위치를 설정한다. 모니터, 영사기, 아이패드 등으로 표현한 이번 전시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우리는 슬기와 민의 디자인이 평면에서 시공간 감각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볼 수 있었다. 예컨대 서서히 다가와 모니터 화면과 아이패드 세로 부분을 색면으로 채웠다가 다시 물러서는 ‘전환들’(2018)과 ‘통계 패턴 1, 2’(2020), 과거 디자인 작업을 여러 개 랜덤으로 조합한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2021), 한 디자인 위에 다른 디자인을 투과해 보여주는 ‘우연서 제4판’(2020)은 작품들이 단순히 아카이브나 실험성에 종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장치들은 작품을 작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작동시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하나는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와 ‘우연서 제4판’처럼 이전 디자인의 이미지를 새롭게 재사용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픽 작업에 내재한 시간성을 감지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슬기와 민의 실험적 결과물은 디자인 평면에 시공간적 여백을 채워가는 과정을 함축한다. 단위별로 누적되는 도형을 통해 양을 보여주는 ‘오프 화이트 페이퍼-브르노 비엔날레와 교육’(2014),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 포스터’(2015)의 가려지거나 뒤집힌 글자와 여백,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그래픽’(2019)에서 반복적으로 배치된 이름, ‘시간의 기술-남화연’ (2015) 포스터에서 프레임의 경계를 초과한 이미지, 화물 도장처럼 글씨가 크게 올라간 이번 전시 포스터까지, 결과물은 모두 ‘레이어가 겹쳤다’는 단순한 이야기에 ‘종착’해버리지 않는다. 슬기와 민의 작품에서 시간 감각이란 일시 정지의 장면이 기록된 평면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래픽 디자인을 화면이나 프레임 안에 완벽한 구도로 한순간을 오롯이 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도록 시선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에서 소개한 슬기와 민 작품은 움직이는 이미지와 출력물로 나온 이미지 모두 공통적으로 일시적인 시간을 간직함으로써 곧 무언가 도래할 시공간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CD가 돌아가면서 나타나는 ‘무지개’가 다시 점으로 돌아간 후에도 전개될 형상을 간직하듯이, 이들의 그래픽은 평면에 시간적 여백을 간직한다. 이 여백은 일시 정지되었지만, 곧 전환되거나 채워질 공간으로 드러나면서 우리의 시선을 미래 시점으로 돌린다. 결과적으로 슬기와 민의 그래픽 작업은 재생 장치 못지않게 우리의 시선을 장치화한다. ‘무지개’에서 출현한 과녁은 다른 작업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시간을 좇거나 ‘쫓는다’는 능동적 반응을 활성화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순간적으로 고정된 시각장으로 출현한다.
글 콘노 유키

콘노 유키는 서울과 일본에서 미술 전시를 보고 글을 쓴다. 〈애프터 10.12〉(시청각〈3X3〉 중, 2018),〈신생공간: 2010년 이후의 새로운 한국 미술〉(카오스*라운지 고탄다 아틀리에, 일본, 2019),〈한국에서의 8인 韓 からの8人〉(파프룸갤러리, 일본, 2019)등을 기획했다. 현재는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슬기와 민
최슬기, 최성민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는 깊이보다는 너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교토 DDD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연 계기가 궁금하다.

회고전이라고 하니 너무 원숙한 느낌이다. 그냥 ‘커리어 중간 정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래픽 웨스트’는 일본 DNP 문화진흥재단 주최로 교토 DDD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 시리즈인데 본 취지는 도쿄 이외 지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를 탐구하는 데 있다. 대개 교토나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 디자이너를 주제로 삼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국외 디자이너인 우리가 초청되었다. 2015년 우리의 스승인 네덜란드의 메비스 & 판 되르선Mevis & Van Deursen이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8년 열린 빔 크라우얼 Wim Crouwel 회고전은 직접 방문해 관람하기도 했는데 이런 뜻깊은 공간에서 전시를 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 고토 데쓰야와는 오랜 인연이라고 들었다.

그는 일본의 정통 그래픽 디자인이 ‘갈라파고스화’해 다소 정체되었다고 느끼면서 한국과 홍콩, 대만 등의 새로운 디자인을 일본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우리와는 2011년 일본 타이포그래피 협회에서 펴내는 〈타이포그래픽스 티Typographics Ti〉 한국 특집호 인터뷰로 처음 연을 맺었다. 이후 그가 객원 큐레이터로 기획한 〈그래픽 웨스트 5: 오사카 활자 여행〉전에 작가로 참여했고, 그의 기획으로 2014년부터 〈아이디어Idea〉에 연재한 신세대 아시아 그래픽 디자이너 탐구 시리즈 ‘옐로 페이지스’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 그는 타이포잔치 2013과 2015에 큐레이터로 참여하며 우리의 작업과 한국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이해를 넓혔다. 이번 〈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은 우리와 고토 데쓰야의 오랜 협업이 낳은 또 하나의 소산인 셈이다.

〈그래픽 웨스트 9: 슬기와 민〉 전시.
전시 구성 면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일본에서는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우리 작업 전반을 간결하게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큐레이터는 우리가 그래픽 디자인 작업 외에 개인 작업, 저술, 편집, 출판 등 다양한 활동을 두루 병행한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따라서 이런 여러 측면이 조금씩이라도 드러나도록 작품을 구성했다. ‘깊이를 포기하고 너비를 보여 준다’가 기획 의도였다.

코로나19로 전시 준비가 모두 원격으로 진행됐다.

전시가 확정된 2019년에는 지금 같은 상황은 상상도 못 했기에 그간 우리가 한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선보이는 전시도 생각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이어지면서, 그처럼 조밀한 전시를 실현하기는 어려워졌고, 작품을 선별할 필요가 생겼다. 큐레이터와 스프레드 시트를 주고받으며 몇 달간 작품 후보를 넣고 빼는 과정을 이어갔다. 확정된 목록에 발표 연도, 매체, 의뢰인, 협력인 등 각종 기본 정보를 더해 꼼꼼하게 대장을 만들었다. 전시 설치에 참고할 수 있도록 작품별로 필요한 전시 면적도 계산해 넣었다.

일본어로 재발행한 슬기와 민 작품 설명집 〈작품 설명〉.
작품을 목록화하고 하이퍼링크를 활용한 웹사이트에서 아카이브 전시에 충실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목록과 연결은 이번 전시의 키워드였다. 전시를 준비하던 중 스프레드 시트 자체가 훌륭한 가상 인터페이스라는 데 생각이 미쳐 스프레드 시트를 그대로 삽입한 전시 특설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거창한 가상 전시를 꾸밀 여력이 없어 고민하던 끝에 나온 해결책이었다. 또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작품 설명〉의 일본어판을 발행했다. 전시장 작품에 매겨진 번호를 리플릿과 대조하면 해당 작품의 웹사이트와 〈작품 설명〉의 지면에 접근할 수 있다. 이로써 교토 DDD 갤러리에 조성된 물리적인 전시와 전시 웹사이트, 슬기와 민 웹사이트, 개별 작품, 이에 대한 설명 등을 두루 연결할 수 있다. 실제 오프라인 전시는 큐레이터 고토 씨와 전시 디자이너 노 아키텍츠에 일임했는데 웹사이트를 3차원 공간으로 번역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포털로서의 전시’에 정확히 부합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전시 작품을 스프레드 시트로 그대로 옮긴 포스터도 인상적이다.

평소에도 작업에 스프레드 시트를 많이 활용한다. 특히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 스프레드 시트가 워낙 중추적 역할을 했기에 홍보물에도 이를 활용하면 뜻깊겠다고 생각했다. 홍보물을 일일이 디자인하기보다 기왕에 만든 스프레드 시트를 정해진 크기로 ‘내보내기’만 하면 디자인이 저절로 완성되는 과정을 상상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처럼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에 매겨진 숫자를 통해 리플릿과 웹사이트, 책을 대조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작품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 포스터’에 대해 궁금하다.

이전에 선보인 ‘닝보 스크린’ ,‘사비나 스크린’의 연작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기존에 디자인한 포스터 이미지를 재료로 완성했다. 컴퓨터가 1초에 한 번씩 무작위로 이미지 4점을 뽑아 잘라 겹쳐서 새로운 콜라주를 만드는 방식인데, 재료가 되는 이미지 조각이 4000여 점이다. 사실상 무한히 다른 콜라주가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만든 ‘닝보 스크린’이나 ‘사비나 스크린’, ‘우연서’도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닝보 스크린’과 ‘사비나 스크린’에서는 포스터뿐 아니라 인쇄물과 웹사이트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 이미지가 쓰였고, ‘우연서’는 이미지 조각이 아니라 색상 채널을 조합했다는 차이가 있다.

15년간의 활동을 회고하는 자리였던 만큼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글쎄, 막상 우리는 이번 전시에 관해 특별히 회고적인 감상이 없다. 작품을 정리하다 보니 ‘이것저것 참 많이도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은 들었다. ‘하고 싶었던 건 대충 다 했구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이내 전시 개최 사실 자체를 잊고 다른 일에 몰두해야 했다. ‘됐고, 다음!’ 이런 거다.
글 유다미 기자 사진 요시다 아키히토
©DNP Foundation for Cul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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