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키우는 경험을 설계하는 디자이너 플랜트 소사이어티 1, 최기웅 대표
스튜디오 플레이크Studio Flake와 식물 브랜드 ‘플랜트 소사이어티 1(P-S-1, 이하 피에스원)’을 운영하는 최기웅 대표다.
멀쩡히 잘 다니던 외국계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디자이너가 있다. 스튜디오 플레이크Studio Flake와 식물 브랜드 ‘플랜트 소사이어티 1(P-S-1, 이하 피에스원)’을 운영하는 최기웅 대표다. 이름처럼 그는 식물에 진심인 소사이어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최기웅은 실제로 여러 브랜드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모색하는 자타 공인 ‘협업 천재’다. 지난 4월 피에스원은 분더샵, 키티버니포니와 손잡고 ‘베란다 가드너’ 팝업 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기획력과 추진력을 두루 갖춘 그를 보면 ‘디자이너가 하면 역시 다르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ps1.official
식물을 분양하고 키우는 즐거운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것이다.”
다양한 회사에서 디자인을 경험한 이력이 특이하다.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안상수 선생님의 날개집을 거쳐 601비상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플러스엑스, 씨드 포스트, JOH를 거치면서 UI 디자인을 처음 경험하는 한편 단행본과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회사에 1년 이상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네이버 디자인센터 브랜드 익스피리언스(BX) 디자이너로 자리 잡으면서 4년 동안 브랜드 경험 설계 업무를 했고 다시 이베이 코리아에서 4년간 BX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20년 퇴사했다.
굵직한 디자인 스튜디오와 IT 기업, 외국계 회사를 거치며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뒤늦게 독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회사를 다니다가 은퇴하면 뭘 할지 생각해봤는데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독립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관리자 업무를 맡게 되는데 아직 실무를 더 하고 싶더라. 스튜디오 플레이크를 차리게 된 이유다. 주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는데 프로젝트 단위로 디자인을 수주하는 방식으로도 일하지만 시간을 파는 개념으로도 일한다. 말하자면 스타트업과 주당 일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서 일하는 방식이 특징이기 때문에 스튜디오 이름도 작고 얇은 조각이라는 뜻의 ‘플레이크’라고 지었다. 보통 디자인 구직자들은 좀 더 규모가 크고 안정적인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데 비해 신생 스타트업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를 고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 스타트업을 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또는 디자인 컨설턴트가 되어 시간 단위로 실무를 처리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스튜디오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 피에스원을 론칭했다.
이베이에서 퇴사하기 전 경리단길에 공간을 하나 빌려놓았는데 그곳이 현재 피에스원 쇼룸이다. 식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피에스원에서 식물을 콘텐츠로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을 마음껏 펼쳐볼 요량이었다. 피에스원은 단순한 식물 숍이 아니다. 스튜디오 플레이크의 여러 모습 중 하나가 피에스원이라고 보면 된다. 보통 디자인을 할 때는 클라이언트가 있고 정해진 형식을 따라야 하지만 피에스원에서는 어떤 규칙이나 가이드 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다. 디자인을 통해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일에서 한 발짝 벗어나 식물을 가꾸는 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피에스원 오픈 시기가 코로나19와 겹쳐 우여곡절을 겪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피에스원에서 기획한 첫 전시가 취소되었다. 한동안 공간을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베를린에서 독립 서점 겸 갤러리 ‘아인부흐 하우스einBuch.haus’를 운영하는 프라우 김Frau Kim 관장의 연락을 받았다. 그래픽 아티스트 패트릭 토머스Patrick Thomas의 작품을 한국에서 전시할 공간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피에스원의 정식 오픈과 함께 패트릭 토머스의 식물 패턴 리소그래피를 선보이는 〈인디고〉전이 열릴 수 있었다. 워낙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꺼운 아티스트라 주요 작품은 첫날 매진되었고 전시를 위해 준비한 굿즈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떻게 보면 신생 공간이었는데 믿고 선뜻 전시를 결정한 관장과 아티스트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패트릭 토머스 개인전 이후 어떤 이벤트가 있었나?
팝업 레스토랑을 여는 것이 다음 프로젝트였다. 식물을 먹는다는 것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프트 펑크의 프라이빗 셰프 출신으로 LA에서 레스토랑 두 곳을 운영하고 있는 맥 타비시Mc Tavish를 초청했다. 수년 전 그의 레스토랑인 샐비지Salvig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코스 요리에 스토리텔링을 곁들인 콘셉트가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뿌리부터 열매까지Root to Fruit’라는 테마로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테마형 팝업 레스토랑을 열자고 제안했다. 플레이팅마다 지구의 순환에 대한 스토리를 들려주는 기획으로 원데이 레스토랑을 열었다. 연말에는 수공예 주얼리 브랜드 노악Noakk과 컬래버레이션해 식물을 콘셉트로 ‘플로리다 뷰티 에디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액세서리라는 조연에서 벗어나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주연이 될 수 있도록 화려하게 디자인했다. 원래 팝업 전시도 열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무산돼서 아쉽다.
그래픽부터 음식, 주얼리까지 식물을 테마로 한 아이디어가 실로 무궁무진하다. 요즘에는 플랜테리어 디자인도 한다.
지난 12월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1층에 로컬스티치가 입점하면서 공간에 어울리는 식물을 구성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다음 프로젝트는 올해 2월 오픈한 더현대 서울 6층 문화센터 ‘CH 1985’였다. 이곳의 사이니지와 집기를 제작한 전산시스템이 자신의 디자인과 어울리는 식물을 함께 연출하고 싶다고 해서 플랜트 큐레이션을 맡았다. 프리츠 한센 라운지 한남의 플랜테리어 작업도 했다. 사실 현장을 둘러보니 유러피언 감성이 돋보이는 프리츠 한센에 피에스원에서 취급하는 열대 식물과 관엽 식물을 매치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농장을 돌아다니며 가구에 어울리는 식물을 찾아 배치하면서 브랜드의 분위기를 살렸다.
분더샵에서 4월 한 달간 열린 ‘베란다 가드너’ 팝업 숍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피에스원이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분더샵에서 희귀 식물을 콘셉트로 팝업 스토어를 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도시에서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제안한다는 콘셉트였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물질적인 소비보다는 스스로를 가꾸는 가치 소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운동을 열심히 해서 보디 프로필 사진을 찍거나 문화 강좌를 들으면서 교양을 쌓는 행위도 가치 소비의 일환이다. 식물 수요가 늘어난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집에 오래 머무르면서 식물에서 위안을 받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멘탈 관리를 위해 반려식물을 키운다. 베란다 가드너 팝업 숍은 이처럼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사람을 타깃으로 집에서 가드닝을 하도록 제안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다.
희귀 식물의 가격이 상당한데 수요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
희귀 식물이라고 부르는 식물 종은 기본적으로 개체 수가 적어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런데 한 달 동안 분더샵에 식물을 두면 빛이 들어오지 않고 환기가 잘 안되는 실내 환경 때문에 식물이 시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팝업 스토어를 열기 전부터 매장 한편에 식물을 가져다 두고 관찰해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팝업 스토어 공간이 출입문 근처라 환기가 잘되고 간접광이 잘 들어오는 편이었다. 원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디스플레이된 식물을 계속 바꿀 계획이었는데 예상을 깨고, 한 달 동안 판매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분량이 일주일 만에 다 소진됐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알고 봤더니 NCT 멤버 태용이 여기서 식물을 구입하고 브이 라이브에서 소개했다더라.(웃음) 사실 나는 희귀 식물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입 관엽식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그런데 얼마 전 관엽식물에 대한 수입이 제한되고 공급량보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시장 자체가 과열되는 분위기다.
‘베란다 가드너’ 팝업 이벤트에서 키티버니포니와 협업한 가드닝 키트도 눈길을 끌었다.
시중에 파는 분갈이 매트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가드닝 키트를 꼭 한번 제작해보고 싶었다. 키티버니포니는 패브릭 원단과 제작에 대한 노하우가 있어서 가드닝 제품을 만들어보자고 여러 번 설득했다. 그 결과 탄생한 방수용 원단 소재의 매트는 똑딱이 단추가 달려 매트 위에 흘린 흙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다. 통기성이 좋은 메시 천으로 만든 가방도 출시했는데 키티버니포니의 수영복 가방을 응용한 제품이다. 화분을 담아서 이동할 수 있는 최적의 사이즈로 제작했다. 키티버니포니 매장에서도 같은 기간에 동시에 팝업 이벤트를 열었다. 따뜻한 분위기의 아기자기한 소품을 주로 취급하는 키티버니포니의 특징에 맞춰 식물을 큐레이션했다. 희귀 식물을 테마로 고가의 식물을 선보인 분더샵과 달리 이곳에서는 합리적인 가격대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의 식물을 선보였다.
식물을 감싼 패키지와 네임 태그에도 디자이너다운 센스가 드러난다. 게다가 가드너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두갸르송 화기에도 피에스원 로고가 새겨져 있다.
분더샵 팝업 이벤트를 위해 두갸르송과 협업해 화기를 한정판으로 제작했다. 표면에 피에스원 로고를 새겨 가마에 한 번 더 구워낸 화이트 컬러 모델이다. 좋은 화기는 식물을 돋보이게 하는데 두갸르송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하다. 분더샵에서 사용한 패키지는 지난해 피에스원 식물이 제주도 플레이스캠프 내 편집숍에 입점할 때 구상했던 것이다. 일단 패키지에 플라스틱 소재를 썼는데 이동할 때는 편리하지만 환경을 생각하면 사용하지 않는 게 맞기 때문에 대체 소재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피에스원이 아직 온라인 진출을 하지 않은 이유도 부자재를 줄이고 식물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배송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 피에스원의 시그너처 컬러인 블루 컬러 태그가 달린 패키지.
피에스원은 스튜디오 플레이크가 보여주는 다양한 디자인 실험 중 하나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베란다 가드너’를 통해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식물을 키우는 ‘경험’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여행지에 갔을 때 기념품 숍에 들러 뭔가 기념할 만한 것을 사게 되지 않나. 오프라인에서 뭔가를 사는 행위는 온라인과 확연히 다른 경험이다. 피에스원에서 식물을 분양해 간 고객들도 식물에 물을 줄 때면 나와 나눈 대화나 쇼룸의 분위기를 떠올릴 것 같다. 식물을 분양하고 키우는 즐거운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것이다. 6월에는 패션 브랜드 구호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려고 준비 중이다. 피에스원이 준비한 새로운 경험을 기대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