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로 진입한 버내큘러 서체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은 을지로에서 열리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랩톱을 통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참여형 전시 콘텐츠다.

디지털 세계로 진입한 버내큘러 서체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 포스터. 포스터에서 표현한 9개의 문은 전시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잇는 열쇠다.

“작년에는 살짝 헐어진 폰트를 내놓더니 올해는 닳고 닳아 읽히지도 않는 풍찬노숙의 해진 폰트를 내놨다. 간판이 100년은 지난 것 같다. 디자인을 한 건지 사포로 문지른 건지 알 수 없지만, 온라인 글꼴 전시회를 한다.” 서체나 전시를 본 기자의 감상이 아니다. 배달의민족이 9월 29일부터 개최하는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을 두고 한명수 디렉터가 쓴 서문의 일부다. 글을 작성하는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권혁웅 시인의 〈꼬리 치는 당신〉. 시집이자 사전이며 그림책이고 또 생물학이나 철학 서적 범주에도 들어갈 법한 이 책을 보며 그는 개연성에 관해 생각했다. 배달 회사가 왜 폰트를 만들까? 배달의민족은 9년 전부터 글자에 주목했다. 옛날 간판 글씨 같은 ‘한나체’, ‘주아체’를 시작으로 아크릴 판에 시트지를 잘라 만든 ‘도현체’, 가판대의 붓글씨 같은 ‘연성체’, 매직으로 쓴 화장실 안내판 글씨 같은 ‘기랑해랑체’ 등 도시의 투박한 조각들을 서체로 출시했다. 새로운 폰트를 선보일 때마다 ‘왜?’라는 물음이 공식처럼 따라다녔다. 배달 회사가 앱을 만들고 글씨를 디자인하고 전시를 기획하는데,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당위성을 찾았다. 배달의민족은 늘 같은 답변이었다. “재밌으니까.” 2019년부터는 을지로에 시선을 돌려 무명 타이포그래피 장인이 쓴 간판 글씨에 주목했다. ‘을지로체’, ‘을지로 10년후체’를 차례로 개발했으며 올해는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을지로오래오래체’를 선보인다. “그런데 서문을 준비하며 개연성에 대해 찬찬히 고민해보니 아주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배달의민족은 음식과 문화를 실험하는 기업이고 배민 글꼴은 한마디로 좀 맛이 있지 않나. 글씨라는 것이 원래 손맛도 있고 말맛도 있고 이야기 맛도 있다.” 한명수 디렉터의 말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공개하는 을지로오래오래체를 도톰한 만두에 비유한다. 낡고 훼손되어 제대로 읽기조차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푸근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은 을지로에서 열리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랩톱을 통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참여형 전시 콘텐츠다. 관람객은 을지로체에 세월이 덧입혀지며 을지로오래오래체로 변해가는 과정을 향유하고, 가상의 도시에서 분위기 그 자체를 즐기게 될 것이다.
euljiro-exit99.com

지하철 문에 ‘문’을 삽입한 옥외광고. QR코드를 찍으면 곧바로 전시장에 입장할 수 있다.

한명수
배달의민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편안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조형은 대체로 둥글다. 통통한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을지로체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둥그런 획은 할머니가 빚은 만두처럼 포슬포슬하고, 끄트머리 삐침은 외삼촌이 후딱 찍어 먹는 가래떡의 조청처럼 멀끔하다. 한눈에 봤을 때 형태적으로 기분 좋은 서체. 배달의민족 폰트에 이런 맛이 담기면 좋겠다.”

신해옥, 홍은주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 공동 기획자 및 그래픽 디자이너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자 했다.”

〈을지로입구 99번출구〉전
주최 배달의민족
전시 기획 배달의민족, 홍은주, 신해옥
사이트 디자인 및 개발 티슈오피스(이상익, 조영,
최하준), 박광은, 민구홍 매뉴팩처링
포스터 디자인 수퍼샐러드스터프(정해리),
민구홍 매뉴팩처링, 배달의민족
협력 을지예술센터, 박다함, 씨씨, 최태현
전시 기획부터 웹 구현까지 맡았다.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은?

홍은주 과거가 아닌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자 했다. 올해 출시하는 을지로오래오래체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이 뜯겨져 나갔다. 이렇게 훼손되고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해옥 온라인 전시 특성상 관람객의 시점이 과거로 향하면 전시보다는 기록에 머물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장소를 그대로 구현하기보다는 을지로라고 상정한 특정 공간에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이벤트에 관해 고민했다.

웹 전시장에서는 여덟 가지 해프닝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이를테면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는지?

홍은주 배달의민족이 강조한 목표는 한 가지였다. 글자를 체험하는 공간을 만들 것. 관람객은 입장하는 순간 입구에서 제시하는 단어를 조합하게 된다. 이 단순한 문장은 을지로오래오래체로 써 내려간 말풍선이자 곧 아바타다. 신해옥 서체의 시각적 형태에 집중하는 해프닝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순간을 즐기면 그뿐인 이벤트도 곳곳에 심어두었다. 마치 도시를 산책하듯 전시장을 거닐 수 있도록 말이다.

키 비주얼로 등장하는 ‘8개의 문’은 무엇을 뜻하나?

홍은주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구, ‘포털’이다. 가령 세운상가아파트를 걷다 보면 집집마다 따로 리모델링을 해서 아파트 문이 제각각이다. 이것이 온라인 아닐까? 각기 다른 문을 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누군가와 만남을 약속할 수도 있고 마법처럼 어떠한 우연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보는 것.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장치는 무엇이었나?

신해옥 조르주 페레크Georges Perec의 〈인생사용법〉이 힌트였다. 그는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을 순차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행마법에 따라 서술하며 사람들을 연결한다. 그로 인해 서사의 배경 자체가 거대한 퍼즐이자 도시가 되는 묘를 발휘한다. 〈을지로입구 99번 출구〉전도 그렇다. 혼자서 둘러보는 온라인 전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공간이다. 각각 다른 낱말로 이루어진 각양각색의 아바타들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 풍경을 연출해낸다.
글 정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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