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재료에 침투한 공예라는 세계 윤라희

그 무엇도 아닌 듯하지만 그 무엇이라 명명해도 이상할 것 없는 아크릴 오브제. 수작업으로 염색한 조각을 투명한 블록에 담았는데, 오묘하게 번지는 색감이 깊고 고요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투명한 재료에 침투한 공예라는 세계 윤라희
윤라희×아키모스피어, 하나은행 본점 VIP 라운지.

2018년 공예트렌드페어 전시장에서 윤라희의 작업을 처음 만났다. 조각, 공예, 설치, 그 무엇도 아닌 듯하지만 그 무엇이라 명명해도 이상할 것 없는 아크릴 오브제. 수작업으로 염색한 조각을 투명한 블록에 담았는데, 오묘하게 번지는 색감이 깊고 고요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브랜드를 소개하거나 제품을 판매하는 데 열을 올리는 여느 부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오브제에 명확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재료를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를 나열했다. ‘사용자가 저마다의 방법대로 공간에 놓아도 좋고, 규정되지 못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소비해도 괜찮지 않을까’ 정도의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 ‘어떠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윤라희의 작업물을 구매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크릴이라는 공간에 구축한 영롱한 빛깔은 인테리어 업계 종사자들을 매료시켰고, 그는 연달아 협업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산업적인 재료에서 공예의 범주까지 경계를 넘나드는 이 전방위적인 작업 스펙트럼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학부 때는 금속, 염직, 도자, 옻칠을 아우르는 공예 전반을 두루 배웠고, 부전공으로 제품, 공간, 디스플레이 전반에 걸쳐 디자인을 공부했다. “공예 작가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어요. 공예품은 늘 전시장에 머물러 있는 듯했고 저는 여기에 갈급함을 느꼈죠.” 좀 더 대중적인 리테일 공간에서 오브제나 인스털레이션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졸업 후 VM 전문 회사 보머스 디자인에서 3년 가까이 일했고, 이후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상공간의 디스플레이 오브제를 만들었다. 당시 공간 연출에 가장 많이 사용하던 소재는 아크릴이었다. “강하게 자신의 물성을 주장하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무언가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애매모호함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순수한 대상으로 아크릴을 바라보고 손의 직감과 우연한 감각에 몰두하기도 하죠.”

윤라희는 여전히 자신을 그 무엇이라 정의하지 않는다.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고 그 사유의 결과를 시각적 이미지나 스테이트먼트로 확장하는 작업에 집중할 뿐이다. 시장에서는 그를 공예가, 디자이너, 아티스트로 일컫지만, 윤라희는 스스로를 ‘윤 용달’이라고 부른다. 간단한 작품 하나를 만들 때도 6개 공장을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디테일을 포착하고 조율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특히 아크릴 속에 빛과 색을 중첩한 ‘블록Block’ 시리즈가 대표작인데, 그 적층의 효과를 표현할 수 있는 기술자가 국내에 몇 남지 않아 긴밀한 소통이 가장 주된 과제라고. “투명한 공간에 빛과 색이 어떻게 침투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이렇게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바라봐주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제일 큰 무기인 셈이에요.” 지난 9월 분더샵에서 열린 전시 〈테제〉를 통해 그는 페터 춤토르의 건축물에서 영감을 얻은 가구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캔틸레버 구조에 질감을 농축해 테이블이자 의자이면서 동시에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심상을 자아냈다. 윤라희는 작업의 추진 동력이 되는 수많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있지만, 그 궁극의 배경에는 결국 자연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르의 벽을 허물어가는 그의 투명한 화폭에 어떠한 그림이 담길지 또 다시 궁금해지는 이유다. raheeyoon.com
글 정인호 기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1984년생 작가다. 2017년 스튜디오를 열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공예트렌드페어를 시작으로 2019년 온양민속박물관 〈민화: 일상의 공간〉전, 2020년 프리츠 한센 릴리 체어 50주년 기념 전시 〈무브먼트 인 사일런스〉, 2021년 플랫폼엘 기획 전시 〈언패러사이트〉 등을 통해 꾸준히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재료의 물성을 기반에 둔 실험에 몰두하며, 불규칙하면서도 솔직한 방식으로 결과를 드러낸다. 그의 모든 작업은 작가의 손으로부터 시작해 서울 도심 소규모 공방 및 특별한 엔지니어와의 긴밀한 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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