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공예에서 3D 프린팅까지 경계 없는 도전 양승빈

옻칠공예에서 3D 프린팅까지 전통과 첨단 기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앞으로도 주요 박물관과 전시장에서 계속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옻칠공예에서 3D 프린팅까지 경계 없는 도전 양승빈
시뮬라크르 시리즈.

깊고 검은 빛을 반사하는 양승빈 작가의 옻칠 오브제 시리즈에는 유년 시절을 보낸 할머니의 집과 자개장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드로흐 디자인에 심취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른 그는 작품의 차별화를 위해서 한국적 기법으로 승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검게 빛나는 자개장의 옻칠이었다. 방학 기간 잠시 귀국해 옻칠을 배우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주로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옻칠공예의 특수성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았다. 그러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강희정 옻칠공예가를 만나 기본기를 익히고 이후 네덜란드로 돌아가 홀로 옻칠 작업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옻독이 올라서 많이 고생했어요. 약도 없었고, 자면서 무의식중에 간지러워 온몸을 긁으면 피가 맺혀서 손을 꽁꽁 싸맨 뒤 잠자리에 들곤 했죠.” 작가의 회상에서 그간 힘들었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양한 소재를 리서치해가며 옻칠을 테스트한 작가는 일반적으로 옻칠공예를 적용하는 나무가 아닌 종이를 주재료로 골랐다. 1mm 두께의 가볍고 잘 휘는 종이에 옻칠을 하면 할수록 단단한 물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업 순서는 먼저 만들고자 하는 형태에 따라 전개도를 모델링한 뒤 종이를 레이저로 커팅한다. 그런 다음 접어서 모양을 만들고 이음매 부분을 접착제로 붙인다. 이후 초벌과 사포질, 재벌을 오랜 시간 반복하는 옻칠 기법을 적용해 완성한다. 흰 종이가 검은 빛을 발산하는 묵직한 무게의 작품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마법과도 같다. 그렇게 탄생한 옻칠 작품 ‘21g’을 2016년 네덜란드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 졸업 전시에서 선보였는데 매년 우수한 졸업 작품을 시상하는 멜크베흐 어워드Melkweg Award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눈길을 끌었다.

졸업 후 개인 스튜디오를 연 양승빈 작가는 네덜란드 공예진흥원(Crafts Council Nederland)을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과 협업해 유럽인에게 낯선 옻칠공예를 알리는 교육과 시연에 몰두했다. 동시에 각 문화권에서 아이코닉하게 취급되는 도자기를 옻칠공예로 완성해보자는 생각에 달항아리와 네덜란드 델프트웨어의 형태와 사이즈를 동일하게 가져온 연작 ‘래커드 폼Lacquered Forms’과 긴쓰기 기법으로 도자기를 붙여놓은 듯이 레커드 폼을 마구 뒤섞어 복제한 ‘시뮬라크르Simulacre’ 시리즈를 발표했다. 영국 민트 갤러리Mint Gallery를 통해 2018년 런던 컬렉트 페어와 밀라노 국제 가구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작가는 유럽 무대에서 주목받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옻칠을 한 종이가 어느 정도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활용해 시뮬라르크 시리즈를 가구 형태로도 제작해보고 붉은색을 발산하는 주칠을 적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지속했다. 이후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지난해 졸업 전시에서 레퀴엠 시리즈를 발표했다. 앤티크한 유럽 가구처럼 화려하게 달린 장식을 자세히 보면 사람 뼈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지역 박물관인 에르프훗하위스 아인트호벤Erfgoedhuis Eindhoven에서 손에 넣은 18세기 이름 모를 남성의 유골을 3D 스캐닝하면서 그의 살아생전 삶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그래픽 노블과 영상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또 3D 프린터로 출력한 가짜 뼈 조각은 납골당 콘셉트의 캐비닛을 장식하는 모티브로 활용했다. 캐비닛을 열고 가지런히 전시된 두개골을 마주하는 경험은 기이하면서도 압도적이다. 이 캐비닛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초에 불을 밝히고 그래픽 노블을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고인에 대한 추모인 셈이다. 옻칠공예에서 3D 프린팅까지 전통과 첨단 기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앞으로도 주요 박물관과 전시장에서 계속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seungbinyang.com
글 서민경 기자 자료 제공 양승빈

1987년생으로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컬렉트 페어,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네덜란드 디자인 위크 등에 참가해 유럽 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올해 귀국한 작가는 무신사테라스 〈써킷 서울〉전에 이어 공예트렌드페어 주제관에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월페이퍼〉 〈디자인붐〉 〈디진〉 등에 작품이 소개되었고 그중 시뮬라크르 시리즈는 현재 영국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에서 소장 절차를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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