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부터 서울까지, 스위스 디자인 학교가 주목받은 이유는?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 속 변화하는 디자인 교육
유명 디자이너가 강단에 서고, 명품 브랜드와 꾸준히 협업을 선보이는 디자인 학교, 바로 스위스 로잔에 자리한 에칼(ECAL)이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에칼의 디렉터를 만나 에칼만의 디자인 교육과 철학을 물었다.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The École cantonale d’art de Lausanne, ECAL, 이하 에칼)에서 석사 심화 과정을 마친 김진식 디자이너는 월간 <디자인>과의 지난 인터뷰에서 에칼을 ‘세계에서 가장 큰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표현했다. 이는 학교 내부에서 전공에 관계없이 창작자들 간의 협업이 필수이며, 기업과 브랜드와의 내외부 프로젝트에도 적극적인 에칼 특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1821년 창립된 에칼이 세기를 지나오며 정착시킨 교육 풍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2011년부터 에칼 디렉터를 역임 중인 알렉시스 제오르가코풀로스(Alexis Georgacopoulos)가 지향하는 디자인 교육 비전이기도 하다. 그는 에칼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로잔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산업 디자인 학과장으로 다양한 전시 및 브랜드 협업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해온 인물이다. 지난 5월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서 열린 ‘한-스위스 혁신 주간’의 페차쿠차 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최근 한국과 스위스 디자인계의 교류가 활발해진 배경부터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해 에칼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Interview
알렉시스 제오르가코풀로스 ECAL 디렉터
서울에서 만난 에칼
지난달 24일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서 열린 페차쿠차 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다. 무엇보다 페차쿠차에서 들려줄 이야기의 주제가 흥미로웠다. <Under Pressure Solution by ECAL>은 무엇이며,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
에칼(ECAL)은 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전시와 디자인 행사에 참여 중이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리서치 프로젝트<UPS(Under Pressure Solution)>를 전시로 소개했다. UPS 프로젝트는 생분해 가능하고 재활용할 수 있는 셀룰로오스 스펀지로 만든 압축된 가구와 오브제 시리즈이다. 콘셉트는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가 1969년 디자인한 UP5 의자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UPS 가구는 압축된 포장을 풀면 스스로 확장하는 폴리우레탄으로 만들어진 UP5 의자처럼 셀룰로오스 스펀지에 수분을 더하거나 습기가 가해지면 10배로 확장되는 식이다.
서울에서 열린 페차쿠차 행사에서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에칼의 제품 디자인(Product Design) 마스터 과정 학생들이 선보인 UPS 가구와 오브제를 소개했다. 아울러 해당 프로젝트가 무엇으로부터 촉발됐는지,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전시라는 결과물을 만들게 되었는지 등 약 2년간 진행되어 온 각각의 단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기서 말한 단계들에는 수많은 발견과 시도들, 실패와 좌절이 담겨 있는데 다양한 니즈와 조건을 충족하는 최종 재료를 찾아가는 디자인 여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난해 한국과 스위스 수교 60주년부터 올해의 ‘한-스위스 혁신 주간’까지 한국과 스위스 사이의 교류가 최근 활발하다. 특히 에칼은 <한글-헬베티카> 전시, 국내 산업 디자이너 스튜디오 방문 등 한국과의 교류에 유독 관심이 높아 보이는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
한국은 에칼 졸업생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제품 디자인, 타입 디자인, 사진 등 마스터 과정을 공부하고자 에칼을 찾는다. 무엇보다 에칼이 한국과의 교류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건 이곳을 졸업한 한국의 디자이너들 덕분이다. 전해 듣기로 이들은 졸업 후 한국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고, 디자이너들 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모교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가기 위해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 에칼에서 진행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4321 마켓’(디렉터. 박지홍) 행사를 2020년부터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에칼 졸업생들이 학교의 전통 행사를 이곳에서 이어갈 뿐만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더해 새롭게 창조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4321마켓에는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도 참여하는데 유럽의 디자이너와 디자인 환경 그리고 에칼을 궁금해하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장으로서 그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 만남을 가진 서촌라운지에서도 11월 에칼 학생들의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아직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중이다. 최종 결과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새로운 걸 디자인하기 보다 이미 익숙한 요소를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디자인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지난 학기 동안 아고라이팅(AGO Lighting)과 협업을 진행한 산업 디자인과 학생들이 아고라이팅의 조명 모듈과 디자인 요소를 활용해 서울의 여러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을 선보일 계획이다.
오늘날 한국의 디자인 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산업 국가이다. 중공업부터 가정용 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우수한 노하우를 지녔다. 높은 수준을 갖춘 제품 및 디자인 퀄리티도 인상적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아고라이팅과 학생들이 함께 전시를 준비하며 협업한다는 사실 자체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제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브랜드와 디자인을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다는 점은 한국의 디자인이 얼마나 오픈 마인드를 지녔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학교와 회사, 그리고 디자인 필드에 소개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시도가 공공의 영역에서 대중에게 소개된다는 점도 분명 유의미한 행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 달라지는 디자인 교육
2011년부터 지금까지 에칼의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오랜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에칼에서 디렉터는 어떤 일을 하나? 산업 디자이너 출신인 만큼 디자이너의 업무와는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했다.
에칼 디렉터는 두 가지 역할을 지닌다. 먼저 학교 내부의 일이다. 행정, 예산, 인사 등 학교 내의 조직과 구성을 살핀다. 14년간 일해왔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반대로 학교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레인지 하는 것도 디렉터의 중요한 임무다. 전시회, 브랜드 협업, 기관과의 교류, 대규모 파트너십 운영 등 이를 위해 네트워크를 쌓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두 가지 역할이 서로 간에 상호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의 행정 업무로만 혹은 외부의 크리에이티브 협업으로만 디렉터의 역할이 치우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내외부의 융합은 에칼이 글로벌 디자인·예술 학교 중에서도 독특하다고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절이 그립지는 않은지도 궁금하더라. 디렉터는 창작자의 역할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는 직책이지 않나.
그렇기도 하지만 또 아니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면 에칼 디렉터로서 전시, 행사, 렉처 등에서 크리에이티브 파트에도 참여하고 있고, 이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참여 정도나 수준은 다르겠지만, 아이디어를 찾아 동료들에게 공유하는 현재의 수준에서는 충분히 만족한다.
한편 창작자(디자이너)가 아닌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디자인 교육에 대한 달라진 관점도 있을까?
일반적으로 오늘날 디자인 교육은 전문 필드와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디자인 필드가 과거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차원으로 진화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디자이너들이 특정 분야로 자신의 일을 국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서의 가장 큰 도전이자 책임감은 시대의 변화와 이처럼 달라지는 학생들의 필요에 대응하면서도 교육의 본질과 퀄리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에칼만의 디자인 교육 철학이 있다면?
오늘날 디자이너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이 필수다. 따라서 에칼에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소속 학과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장려한다. 예컨대 제품 디자인 학과의 학생이라면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전시 웹사이트를 꾸리거나 사진학과 학생과 제품을 소개하는 이미지를 촬영하는 등 교육 단계에서부터 이러한 협력에 익숙해진다면 디자인 필드에 나가서도 업무 적응하기 훨씬 수월하다.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이 화두다. 에칼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져올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에 앞서 인공지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활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사실 젊은 학생들의 경우 인공지능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해하고, 스스로가 이를 활용해 학습하는 경향이 짙다. 과거 3D 렌더링 프로그램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당시 교사들은 그럼에도 수작업으로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학생들은 집에서 3D 렌더링 프로그램 경험을 다 마친 상태였다. 결국 도구를 잘 활용하고, 왜 이 도구를 사용하는지 이해한다면 어떤 도구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다르다. 세대 차이가 있는 만큼 인공지능이 아직 낯선 도구로 다가올 수 있다. 만약 한 학생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과제를 제출했는데 이를 두고 교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면? 오히려 학생들 보다 교사들에게 인공지능에 대한 교육이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 실제로 전문가를 초청해 여러 차례 프레젠테이션도 가진 바 있다. 한편 인공지능 시대임에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창의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도구를 사용해도 가치 있는 디자인을 만들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