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김기현 교수

재스퍼 모리슨을 동경하는 디자인학도였던 김기현이 유럽과 한국에서 주목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린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그간 가구와 제품, 공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업 분야를 오가며 선보여온 수많은 작업 이면에는 소재와 물성에 대한 집요하고 독창적인 탐구가 숨어 있다. 202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학생들의 작업에 여전히 자극을 받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디자이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기현 교수
디자인 멘토 2 f
RCA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작품으로 만든 ‘1.3 체어’ 컬렉션을 밀라노에서 론칭했다. 서울로 돌아와 디자인 메소즈를 공동 설립해 디렉터로서 국내외 다양한 기업과 제품, 가구, 공간 분야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이 주최하는 ‘올해의 디자인(Design of the Year)’, 블루 프린트 어워드, 코리아디자인어워드를 비롯한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해 교육자로, 또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과 교수로 부임한 지 올해로 3년째다. 어떤 계기로 학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

오래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지향점을 묻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처음부터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릴 때 건축학도의 꿈을 품고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그곳의 커리큘럼으로는 건축학과에 갈 수 없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웃음)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의 디자이너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디자인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유학까지 결심하게 됐다. 내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던 것처럼 지금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교육을 통해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학교에 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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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체어’(2011). 발사 나무를 압축 성형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나무 의자를 만들었다.
독일 자이트라움(Zeitraum)사에서 동일한 디자인에 다른 소재를 적용한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활동보다 산업 디자인 신에서의 업력이 더 길다. ‘1.3 체어’로 처음 이름을 알렸는데.

학창 시절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과 콘스탄틴 그리치치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들이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찾아보니 두 사람 다 영국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RCA) 출신이더라.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유럽의 산업 디자이너들은 공간과 매체를 오가는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며 장르 불문하고 여러 디자인 활동을 경험해보고 싶어 RCA에 입학했고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게 1.3 체어였다. 애초부터 경량화가 목적은 아니었는데 발사 나무라는 소재에 집중하다 보니 무게가 1.3kg밖에 안 되는 가벼운 의자가 탄생했다. 학생 작품으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졸업 전시 도중 독일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아 곧바로 제품 양산까지 이루어졌고, 이듬해인 2012년 모든 디자이너의 꿈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1.3 체어 첫 컬렉션을 론칭했다. 그때 디자이너로서 최상의 작품을 만드는 것과 현실적으로 양산 가능한 제품을 만드는 데에 괴리가 있다는 걸 뼈아픈 경험으로 깨닫기도 했다. 1.3 체어는 디자이너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우여곡절을 모두 함께한, 개인적으로 무척 뜻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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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울’, 2014. 양털 직물을 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해 양모 의자와 조명, 벽 타일과 바닥재를 만들었다. ©이상필
1.3 체어를 비롯한 대다수 작업에서 소재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사물을 디자인하든 소재로부터 출발하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뒤따르기 마련이다. 소재를 깊이 연구하다 보면 그것의 물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구조와 가공 방식을 도출할 수 있다. 구조와 형태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심미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 치중하기보다는 재료와 소재를 물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정답이야 없겠지만 그 접근 방식이 내게는 좀 더 맞는다.

크고 작은 디자인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2010년을 전후로 국내에서 디자인 전시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가 전시에 참여하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고, 심지어 ‘디자인 스튜디오’라는 표현마저 산업과 동떨어진 뉘앙스를 풍긴다는 이유로 언짢아하는 기성세대 디자이너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클라이언트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만든 창작물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소중했기 때문에 국내외 여러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2년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설립한 디자인 스튜디오 ‘디자인 메소즈’를 운영하기 위해 여러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늘 개인 연구 작업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디자이너가 스스로의 힘으로 작업을 계획·진행하고 대중 앞에 직접 선보이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크리에이티브를 함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금전적 지원 없이 홀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클라이언트 작업과 개인 연구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2020년 디자인 메소즈 활동을 마무리한 뒤 학교에 정착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어떤 가치에 중점을 두나?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디자이너로서 나의 기호는 잠시 접어두고 학생 스스로 작업 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간혹 학생의 작업을 내 것처럼 욕심내다 보면 나의 취향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어 자제하려고 노력한다.(웃음) 다만 디자인 과정에서 적합하고 부적합한 것,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의논하곤 한다. 디자이너에게는 감각도 있어야 하고 스킬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탐구하는 태도다. 대상을 파고들어 연구하고 실험하고, 그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균형을 찾아나간 흔적이 드러나는 결과물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 출신의 주목받는 신예 디자이너가 멘토로 돌아왔다. 올해 영 디자이너 멘토로 참여하는 소감은?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을 계기로 밀라노 전시까지 참가할 기회를 얻었던 게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좋은 동료도 많이 얻었다.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른 행사이기 때문에 올해 영 디자이너 멘토 제의가 왔을 때 무척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수나 멘토 같은 거창한 표현보다는 디자이너로서 나의 작업을 보여주는 게 영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오래전 재스퍼 모리슨의 오피스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가 직접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 그가 만든 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르곤 한다. 나도 연구실에 이런저런 오브제와 물건을 많이 가져다 놓았다. 학생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나름의 영감과 자극을 얻어 갔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물론 나를 재스퍼 모리슨에 견주겠다는 말은 아니다.(웃음)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3호(2024.07)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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