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의 전시 공간에서 소개한 다섯 번째 전시는?
프레임을 탈출한 회화적 다양성
라 베리에흐La Verrière 안에 색띠가 둘러졌다. 큐레이터 조엘 리프Joël Riff가 다섯 번째로 선보이는 전시의 주인공,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아티스트 엠마뉴엘 카스텔란이 창조한 원색의 그림들이 만든 스펙트럼 속으로 들어가보자.
라 베리에흐에서 만나는 시리즈 전시
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 La Verrière는 ‘증강된 솔로 solos augmentés’라는 테마로 2023년부터 큐레이터 조엘 리프와 함께 새로운 시리즈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한 명의 주인공과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조연들로 짜인 연극의 구성처럼 ‘증강된 솔로’에는 메인 아티스트 한 명과 그와 연계성을 가진 외부 아티스트들이 초청된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엠마뉴엘 카스텔란 Emmanuelle Castellan, 조연으로는 다섯 명의 아티스트 – 요하네스 나겔 Johannes Nagel, 다고베르트 페체 Dagobert Peche, 뮤리엘 픽 Muriel Pic, 노베르트 슈본트코프스키 Norbert Schwontkowski, 월터 스웨넨 Walter Swennen – 가 선택됐다. 그리고 카스텔란에게 이번 전시는 벨기에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정사각형처럼 보이지만 애매한 각도의 모서리를 가진 거대한 사각형 공간인 라 베리에흐 La Verrière는 매 전시 마다 색다른 공간이 창조된다. 이번 전시 <스펙트럼 Spektrum>에서는 요하네스 나겔 Johannes Nagel의 세라믹 작품들이 중앙에 일렬로 위치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방식은 조연을 드러내고 주연을 배경으로 뒷받침하도록 한다. 마치 나겔의 개인전같은 착각이 들 수도 있지만 안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벽에 걸린 회화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겔 외 다섯 명의 작가들이 하나씩 분리되어 보인다. 유사성은 유지된 채 말이다.
전시 제목이 독일어인 이유는?
전시 제목인 ‘스펙트럼 Spektrum’은 작가의 다양한 실천과 캔버스 곳곳에 나타나는 유령 같은 실루엣을 의미한다. 여기서 제목을 영문이 아닌 독일어로 선택한 것에 주목해보자. 작가에게 독일이라는 지역, 게르만 문화가 가지는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약간의 이질감과 외로움이 존재하는 삶을 원했기에 2009년 독일로의 이주를 결심했고, 10년 넘게 국경을 넘나들며 툴루즈와 스트라스부르의 예술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그래서 함께 전시하는 작가 중 요하네스 나겔 Johannes Nagel과 노베르트 슈본트코프스키 Norbert Schwontkowski 역시 독일 출생이며 요세프 호프만의 협력자였던 다고베르트 페체 Dagobert Peche(1903-1932)는 엠마뉴엘 카스텔란이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비엔나 분리파의 일원이자 아티스트, 디자이너이다.
페체의 작품을 함께 걸고 싶다는 그녀의 제안으로 조엘 리프는 브뤼셀의 아트갤러리 ‘Bruikleen van Yves Macaux’에서 아르데코 양식의 거울 한 쌍을 빌려와 전시에 참여시킨다. 마주보게 놓인 두 개의 거울은 반대편 작품을 반사시키는 일종의 게임같은 역할을 하며 전시의 재미를 증폭시키고 있다. 독어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인 뮤리엘 픽 Muriel Pic에게 도록의 글을 의뢰해 작은 부분까지 문화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간 것 또한 인상적이다. 뮤리엘 픽은 ‘부채’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도록에 첨부했다. 문구와 문구에 생기를 불어넣은 리드미컬한 문장의 그래픽적 표현이 스펙트럼을 연상시킨다.
회화, 프레임에서 탈출하다
스펙트럼을 도형으로 상상해보면 부채꼴이 연상된다. 엠마뉴엘 카스텔란의 회화들은 부채처럼 펼쳐져 프레임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벽을 넘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느슨하게 걸린 캔버스 위에 추가적인 레이어로 그림이 올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스펙트럼의 다양성은 시간을 들여 관찰해야 진가가 발휘된다. 늘어진 캔버스와 잘려진 표피 등의 표현은 2차원과 3차원을 왔다갔다하는 개방성을 보여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선을 잡아 끌며 조엘 리프가 전달하고 싶었던 카스텔란 작업의 디테일이 구석구석에서 말을 건다.
검은색 연필선 같은 착시효과를 주는 어진 캔버스의 라인, 바닥과 모서리에 숨은그림처럼 희미하게 적어놓은 단어 ‘탈출 ESCAPE’, ‘이동 SHIFT’, 심지어 들어오는 입구에 눈높이보다 높게 걸려 전시장 도우미가 알려주지 않으면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작품까지, 이렇게 계속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권위적이지 않고 친밀하고 위트 있게 갤러리 공간을 장악한다.
이는 시선의 즐거움에 지속적으로 기반을 두면서 예상 못한 가시적인 것의 발현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작가의 장치로 보인다. 엠마누엘 카스텔란의 작품에서 형상은 개방적이며 실체 없는 실체에 대한 상상을 하게끔 한다. 이는 도예가 요하네스 나겔의 물리적 탐구가 돋보이는 세라믹 작품들과 균형을 이룬다. 마치 두 작가가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작업을 한 것처럼 (실제로 둘은 이번 전시 오프닝에서 처음 만났다.) 둘의 작품은 다른 네 명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전시에서 가장 큰 시너지와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있다.
전시가 시작되기 전 라 베리에흐 La Verrière에 상주하며 작업을 한 카스텔란은 벽을 채울 캔버스를 만들고 해체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캔버스를 접고, 붓으로 덧칠하고 커터로 절단을 하기도 했다. 꾸밈이 없이 투명하고 맹렬하다. 그래서 형상들은 개방적이며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녀는 일방적인 해석을 거부하며 관객들에게 본능적으로 기억 속에 본인이 창조한 시각적 스펙트럼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듯 하다. 그래서 설명을 전달하기보다 스스로 느끼길 추천한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자세한 관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작가의 몸짓과 인내심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