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Architecture] ③ 1979년 베이징, 2023년 홍콩 -1
현상에서 맥락으로. 예술계와 건축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현상 뒤에 숨은 이야기를 고민하고 전달합니다. 매 칼럼마다 중심 소재로 세계 곳곳 현대 미술관이 등장합니다. 이곳이야말로 아트와 건축이 만나고, 이어지고, 또 하나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술 애호가를 위한 유쾌한 교양 사전을 지향합니다.
홍콩 엠플러스 뮤지엄을 아는가
엠플러스 뮤지엄 M+ Museum 은 율리 시그라는 한 개인이 기부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2021년 11월, 홍콩에 개관했다. 1980년대 사업차 중국에 간 스위스인이 중국현대미술에 매료되어 컬렉션을 시작해 30년간 모은 1,500여 점을 기증했다는 사연을 갖고 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지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겐 ‘이건희 컬렉션’이 있지 않은가. 삼성그룹 故 이건희 회장이 컬렉션한 한국 근현대미술작품을 기반으로 새로운 미술관이 탄생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담을 국제적 수준의 미술관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공 건축물이 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가. 엠플러스 뮤지엄의 현재 모습에서 배우고 또 경계해야 할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밀라노에서 율리 시그와 마주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폰다지오네 프라다를 방문했을 때였다.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건축물은 자연 채광이 되는 갤러리 여섯 개가 들어선 콘크리트 타워였다. 다들 꼭대기 층에 올라 한 층 씩 전시를 보고 아래로 내려가는 관람 방식을 따랐다. 그러다 보니, 여러 번 마주치게 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중 한 남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그를 쫓아 발걸음을 빨리 했다. 갤러리 두 개 층을 남겨 두고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말을 걸었다. “Excuse me? Can I have your name card? I think, I know you.” 맙소사. 내가 너를 아는 것 같으니 명함을 달라는 어리석은 말이라니. 그는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Uli Sigg’라 적혀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컬렉터, 율리 시그였다! 예전에 한국 출신의 정도련 큐레이터(당시 모마 큐레이터)를 인터뷰하다 ‘율리 시그’라는 존재를 알게 되어 인터넷으로 기사며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그 얼굴이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1979년 베이징
스위스인 율리 시그는 중국과 스위스가 합작한 엘리베이터 회사, 쉰들러 엘리베이터 컴퍼니Shindler Elevator Company의 부사장으로 중국을 찾았다. 당시는 문화대혁명 이후, 황폐화된 중국의 문화와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안팎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외국에 경제를 일부 개방해 중국 정부에서 서양 기업과 합작 회사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중국에서 일하기 시작한 율리 시그는 어느 순간부터 중국현대미술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비즈니스맨이었지만 그는 예술과 법학에 능한 사람이었고 성장하는 중국의 현대미술을 보며 컬렉션을 결심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휩쓸고 간 상처는 컸다. 베이징 내 갤러리도 변변찮았다.
모든 게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율리 시그는 퇴근 후 작가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중국 작가들과 하나 둘,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와의 돈독한 관계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컬렉션을 결심한 후 10년 정도는 중국 미술사를 공부하고 작가를 찾아다니며 연구했고 본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한 것은 1990년. 스위스 대사가 되어 다시 중국을 방문한 이후부터다.
광활하고 전도유망한 그 대륙에서 생산되고 있는 예술품을 아무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몇 외국인 엔지니어는 무작정 몇몇 작품을 구입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전문가의 방식으로 작품을 보존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개인적인 취향을 제쳐 두고 백과사전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수집을 결심했다.
“Uli Sigg: the collector who ‘made’ Ai Weiwei” 인터뷰 중에서 _ judithbenhamouhuet.com
컬렉션을 기증한 곳은 중국 대륙이 아닌 홍콩
엠플러스 뮤지엄 개관을 앞두고 정도련 부관장과 진행한 줌 인터뷰에서 그는 율리 시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컬렉션을 시작할 때부터 중국현대미술을 담은 역사적인 아카이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해요. 어느 정도 컬렉션이 완성되었을 때는 ‘이건 나의 사적 컬렉션이 아니다. 언젠가 중국에 반환할 것’이라 마음을 정했다고 했어요.” 2012년. 율리 시그는 홍콩에 세워질 엠플러스 뮤지엄에 컬렉션 1500여 점을 기증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확하게는 1,460여 점을 기증하고 50점을 판매했다. 소더비 옥션에서 가치를 매겨 가격을 정했다.
100% 기증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니컬하게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가 모은 컬렉션을 판매하는 상업 갤러리를 운영했다면 그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를 능가하는 명성과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그는 비즈니스맨보다 연구자의 길을 택했다. 무엇보다 중국인은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당시는 문화 말살 정책과 다름없는 문화대혁명 직후였다. “아무도 예술품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컬렉션을 시작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나. 아카이빙이라는 행위 없이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기증할 미술관을 선택하는 데 무엇보다 고심이 컸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곳은 중국 대륙이 아닌 홍콩. 첫 번째는 글로벌 수준의 뮤지엄 선택이다. 그는 엠플러스 뮤지엄이 운영과 관리 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표현의 자유 측면이 아니었을까. 예술의 본성 자체가 자유와 독립이다. 자신의 컬렉션이 정치적으로 탄압받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바다를 메워 새로운 땅을 만드는 일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짧게 줄여 WKCD라 부른다. 홍콩 남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된 간척지로 홍콩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문화적 관문이다. 이 문화지구 중심에 엠플러스 뮤지엄이 위치해 있다. 홍콩 정부가 서구룡 문화지구를 계획한 것은 1991년부터다. 영국의 포스터앤파트너스Foster+Partners를 마스터플랜 설계자로 지목했다. 12만 평 부지에 17개 문화시설이 세워질 거라 계획하고 아트와 교육, 엔터테인먼트가 한데 어우러지는 홍콩의 새로운 문화 거점이 되길 바랐다.
서구룡 문화지구는 바닷물을 빼고 흙을 메워 만든 간척지다. 홍콩 정부는 완전히 ‘새로운 땅’을 갈망한 게 아닐까. 영국이 중국에 홍콩을 반환한 것이 1997년 7월이다. (186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넘겼고 이후 156년간 홍콩은 영국 통치 아래 존재했다.) 그런 면에서 서구룡 문화지구는 영국도 중국도 소유한 적 없는, 식민 역사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땅이다.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