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윤리와 사회적 책임 편
디자이너가 읽어야 할 책 8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역사와 개념을 총정리한 책, 나이젤 화이틀리의 <사회를 위한 디자인>.
디자인은 중립적인 성격을 띤다. 마치 언어처럼 디자인 그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다. 오히려 디자인은 기업을 살리는 구세주로 각광받았으며, 그것은 선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디자인의 윤리 문제가 발생했다. 더 많은 상품의 판매, 더 많은 생산과 소비의 창출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매력적인 디자인은 매출 곡선을 높이고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 대가로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에 더 많은 쓰레기를 쏟아붓는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지 않아도 될 소비를 부추기고 물질주의에 매몰되도록 만든다. 이런 문제에 대해 디자이너의 책임을 논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 쓴 <현실 세계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국내에서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으로 번역)은 디자인 윤리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책으로 곧 그 분야의 바이블이 되었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디자인 윤리 문제는 바로 이 책으로부터 싹텄으며,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연구 주제가 탄생했다. 디자이너의 실천도 뒤따랐는데, 그로부터 ‘그린 디자인’, ‘생태주의 디자인’, ‘지속 가능한 디자인’과 같은 개념이 등장했다. 이런 디자인의 윤리 문제,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과 역사, 그리고 개념을 총정리한 책이 1993년에 출판한 나이젤 화이틀리(Nigel Whiteley)의 <사회를 위한 디자인>이다. 이 책은 또한 지금까지 외면받았던 디자인 분야의 페미니즘 문제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
나이젤 화이틀리 지음, 김상규 옮김, 홍디자인 펴냄
이 책은 이 소비주의 디자인으로부터 시작한다. 1장 ‘소비자 주도 디자인’에서는 미국의 스타일링, 즉 소비자 주도 디자인이 유도하는 혁신이 얼마나 덧없고 얄팍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애초의 충격이 클수록 지속되는 힘은 약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디자인이 단지 패션 산업의 부산물, 즉 장식을 위한 패션 액세서리처럼 여겨진다. 시각적인 자극은 일단 구입하고 나면 또 다른 시각적인 자극에 의해 대체된다.”
빅터 파파넥의 생각에 대한 화이틀리의 반론
디자인의 고전 책 중 <현실 세계를 위한 디자인>만큼이나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책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추궁한다는 점에서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격분시켰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의 저자 화이틀리는 소비주의 디자인에 대한 파파넥의 비난을 요약한 구절로 다음의 글을 제시한다. “(디자인의) 전문직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모든 의사가 일반적인 진료와 수술을 내팽개치고서 피부과나 성형외과, 미용에만 집중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결과와 비견할 만하다.” 이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디자인의 본질은 내팽개친 채 그저 얄팍하고 허영에 가득 찬 미용 행위에나 열중하는 전문가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본질적인 디자인인가?
화이틀리는 파파넥이 제안한 우선순위의 디자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제3세계를 위한 디자인. 이 책에 쓰인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무려 30억 명의 사람들이 기초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둘째, 지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위한 학습 장치와 재활 기구의 디자인. 이들을 위한 디자인의 영역은 협소하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셋째, 내과, 외과, 치과, 병원 장비를 위한 디자인. 이 분야의 디자인이 낙후되었고 그 결과 보건 비용이 오른다고 보았다. 넷째, 실험 연구 분야의 디자인. 다섯째,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시스템 디자인. 여섯째, 난제 해결 개념을 위한 디자인. 이는 사물을 개선하지 않고 단지 특징만 바꾸거나 다른 장치를 결합하는 ‘덧붙이기식’ 디자인을 그만두고 근본 문제에 집중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디자인이야말로 앞선 비유에서 보자면 미용이나 성형수술이 아닌 본질적인 진료와 수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깨닫고 실천하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다. 아울러 파파넥은 특허와 저작권조차도 계몽적인 디자인에 방해가 된다고 지적한다. 화이틀리는 파파넥의 주장이 지나치게 순진하고 이상적이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았다. 파파넥은 디자이너들로부터 ‘자선사업가 디자이너’, ‘소수파의 전사’라고 불리는데, 이는 파파넥을 조롱한 것이다.
화이틀리는 파파넥의 이상주의를 지적하면서도 파파넥이 윤리적 디자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했다고 지적한다. 우선 윤리적 디자인을 순진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이기심과 탐욕스러움을 정당화하기 위한 디자이너의 자기변명라고 비판한다. 그 뒤에 파파넥이 제시한 구체적 실천 방법을 열거한다. 그 가운데 제품 평가단이나 소비자 단체 등을 위해 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는 자신의 시간 중 10분의 1을 투자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다. 파파넥은 이렇게 말했다. “디자이너로서 우리는 전 세계 75%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아이디어와 재능의 10%를 바칠 수 있다. 아무리 성공한 디자이너라도 그의 시간 중 10분의 1은 인류의 진정한 요구에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를 위한 디자인>이 디자이너들에게 던진 가장 큰 의미는 일종의 각성이다. 화이틀리는 파파넥의 기여를 이렇게 요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파파넥의 ‘현실’ 세계를 위해 디자인하는 것 사이에 거의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협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죄의식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걱정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들에게 과거에는 결코 없었던 하나의 의식이 싹튼 것이다. 책임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각성!
그린 디자인과 녹색 소비의 등장
1960년대에는 서구 사회의 정치적 불안,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경제 위기와 같은 현상과 더불어 지구환경 파괴에 대한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었다. 그 결과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 기술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책으로 <침묵의 봄>, <단 하나뿐인 지구>가 출판되었고 ‘지구의 친구들’, ‘그린피스’ 같은 압력 단체도 생겨났다. 1976년에 설립한 뷰티 브랜드 더바디샵은 생물 분해가 되는 천연 소재만을 사용하고 리필 용기를 활성화하고 포장을 최소화하는 등의 녹색 의식을 고취하면서도 상업적 성공을 거둔 기업으로 각광받았다. 이처럼 지구환경을 배려하는 제품이 탄생하자 ‘녹색 소비’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디자인 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환경 문제를 이슈로 저술 활동을 하는 영국의 존 엘킹턴(John Elkington)은 1986년에 영국의 디자인 협회를 위한 소책자에 ‘녹색 디자이너를 위한 열 가지 질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린 디자인 개념을 이해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막심한 피해를 낳을 실패의 위험이 있는가?
• 제품이 더욱 청정해질 수 있는가?
• 에너지 효율이 높은가?
• 더 잠잠해질 수 있는가?
• 더 지능적이 되어야 하는가? 일정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제품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 과도하게 디자인했는가? 예를 들어 지나치게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 수명이 얼마나 되는가? 원재료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폐기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 사용 연한이 다하면 어떻게 되는가? 재활용의 문제를 제기한다.
• 환경적인 시장을 찾을 수 있는가? 석면처럼 위험한 재료도 안전하고 유용한 제품으로 변형해 그것을 파괴하느라 드는 비용을 절감하자는 뜻이다.
• 녹색 소비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는가? 그린 디자인 제품 역시 외관 디자인이 좋아야 판매도 되고 그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엘킹턴의 이런 노력은 좀 더 적극적인 녹색주의자들에게 상업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녹색 운동을 기업인이 소화할 수 있게 잘 포장해서 제안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녹색주의자들은 엘킹턴이 칭찬한 더바디샵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품는다. “그 기업의 제품이 녹색 상품이긴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일까?” 녹색 소비자가 물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제품이 그린 디자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 제품 또는 서비스가 정말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다. “많은 녹색인은 인간과 물질 자원의 소모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무기력하게 소비문화에 더 깊이 빠져들게끔 유도한다는 점에서 비디오 플레이어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그런 관점에서 리모컨은 녹색인들의 적이다. 리모컨은 하나의 프로그램에 몰두하는 능력을 퇴화시키고 선정주의에 더욱 가볍게 빠져들도록 만든다. 생활의 편리를 돕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녹색 미학
윤리적 디자인을 실천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른다. 왜냐하면 디자이너가 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클라이언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의도가 좌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디자이너의 윤리 의식은 중요하다. 좀 더 환경친화적인 재료를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디자이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압력 단체와 윤리적 디자인을 실천하는 디자이너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정부의 규제가 만들어지고 기업은 그것에 따라야 한다. 닐스 피터 플린트(Niels Peter Flint)는 일류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반소비주의 디자이너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인 O2를 설립했다. 화이틀리는 그의 말을 인용해 윤리적 디자인 실천의 가치를 설명했다. 일본의 10대들을 위해 수백 가지의 냉장고나 2000가지 문손잡이 세트를 디자인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오염이 적고 에너지 소비가 적게 들도록 물건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의 기본적 가치관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디자인에는 일반적인 디자이너들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창의성이나 다양한 미학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녹색 미학은 한결같고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있다. 1990년대 이전의 친환경 제품은 디자인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디자인한다는 건 겉모양만 세련되게 꾸민다는 걸 의미하며 상업적이고 소비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친환경 제품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닌 주류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아크(Ark)의 제품은 재생 판지와 생물 분해성 플라스틱 용기로 만들지만 다양한 색상을 활용해 서민적이고 소박한 기존 친환경 제품의 이미지에서 탈피했다. 사실 그린 디자인이 하나의 기호로 보편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지 기호만을 취함으로써 친환경적인 제품인 척하는 가짜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제 단일한 녹색 미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멋을 추구하고 다각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린 디자인도 소비자의 취향이라는 세속적 욕망을 수용한 것이다. 환경 단체인 ‘지구의 친구들’의 변화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된 로고와 포스터, 소책자의 디자인은 늘 상투적인 이미지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디자인 전문 회사가 참여하면서 과하지 않으면서도 전문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화이틀리는 녹색 미학의 이러한 디자인 다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잊어서는 안 될 원칙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 원칙은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재활용하기 쉽게 분류할 수 있도록 좀 더 적은 종류의 소재를 적용하고 각 소재의 사용도 줄이면 생태학적인 의미를 살릴 수 있고 녹색 패키지가 장식적이고 번지르르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디자인의 페미니즘 문제
디자인에서 페미니즘 문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먼저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디자인 스타일의 문제가 있다. 섬세하고 장식적인 것을 여성스러움과 동일시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때 여성스러운 스타일이란 본질에서 벗어난 하찮은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디자인에서 장식은 하급 디자인으로 취급되는데, 여성스러움을 그런 장식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성스러움의 기호란 생물학적인 여성성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순전히 가부장제 문화가 조작해낸 고정관념일 뿐이다. 화이틀리는 여성에게 강요된 이러한 여성스러움의 디자인 기호는 그것을 수용하는 여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대상화해서 바라보고 감상하는 남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디자인의 두 번째 문제는 많은 여성용 도구가 여성의 신체를 배려하지 않아 육체적 고통을 겪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할 때 여성은 도구의 디자인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신체적 무능력을 탓하게 된다. 이런 의식은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태생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불어넣는 데 일조한다. 대체로 기계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잘 이해하고 능숙하게 다룬다는 관념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즉 집 안에서 여성이 아이를 돌보거나 잡다한 살림살이를 하는 동안 남성은 오디오나 비디오 같은 좀 더 복잡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다. 이런 기회의 차이로 인해 여성은 첨단 기계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면 기업은 남성용이라고 여겨지는 물건을 더욱더 전문적으로 보이게끔 디자인하는데, 여성은 그런 물건을 볼 때 사용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포기를 해버린다. 남성적인 물건으로부터 여성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자동차, 오디오 시스템처럼 주로 남성이 주도하는 장비는 테크놀로지적 느낌을 주고, 진공청소기, 조리기, 재봉틀과 같은 여성용 기계는 덜 공격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화이틀리는 여성을 위한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부드러운 스타일은 모두 기본적인 페미니스트 쟁점들을 무시하는 또 하나의 피상적인 소비주의 미학에 불과할 수 있다. 말하자면 디자이너-소비자를 위한 여성스러움일 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여성 디자이너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즉 남성 중심의 사회는 여성의 재능을 특수한 분야에 한정해서 보려는 태도가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서 여성은 유독 색채 부서에 집중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패션, 텍스타일 분야로 많이 진출한다. 그래픽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에 비해 산업 디자인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은 많지 않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여성 디자이너의 잠재적 능력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 채 한정된 분야로 국한되는 것이다. 화이틀리의 <사회를 위한 디자인>은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디자인 철학서이기도 하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 구매력이 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를 위해, 또 이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 남성 사회를 위해 봉사해온 기존 디자인의 가치관에 도전장을 내민 발자취를 밟아간다. 그리고 지배적인 디자인 문화로부터 벗어난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실천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좇는 돈키호테의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디자인의 배후에 있는 지배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