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기념비가 아니라 구글 폼 같은 것, 〈W쇼〉 리뷰
지금까지의 디자인 전시들이 개별 디자이너나 스튜디오, 또는 역사적 맥락을 뼈대 삼아 특정한 기준에 따라 해석하고 분류한 디자인 작업물을 보여줬다면, <W쇼>는 결과치로서의 리스트가 아닌 지속적으로 확장될 중간 과정으로의 동시대 한국의 ‘여성 디자이너 리스트’(wlist.kr)를 전시 주제로 삼았다.
하나의 디자인 작업물, 예를 들어 사진가와 디자이너가 협업한 사진책 한 권을 떠올려보자. 이 책이 사진전에 놓일 때와 디자인 전시에 배치됐을 때 각기 기능하는 방식과 맥락은 달라진다. 사진전에서의 사진책은 책이라는 결과물 그 자체로 읽히기보다는 사진가의 작업이 담긴 어떤 형식으로의 묶음에 가깝다. 반면 디자인 전시에서의 사진책은 해당 사진가가 아니라 이 책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작업물로 전시된 것이다. 사진가의 사진 작업은 작가 개인의 것이지만 사진책은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다. 사진가뿐 아니라 디자이너, 편집자, 필자 등 여러 주체가 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자인 작업물은 (미술관에 놓이는) 다른 창작물과 달리 클라이언트가 존재하고, 어떤 쓰임새를 전제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협업 과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단일한 차원에서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사진책에 실린 사진 자체는 썩 좋지 않지만 그것을 책으로 묶어내는 편집이나 디자인은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떤 층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디자인 전시가 자신의 의도와 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무엇일까?
<交, 향>(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 (탈영역우정국, 2015), <예술가의 문서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6), <날개. 파티>(서울시립미술관, 2017) 같은 전시부터 지난해 제5회가 열린 <타이포잔치>까지 흔히 ‘그래픽 디자인 전시’라 부르는 전시들을 떠올려보자. 리플릿이나 엽서, 책 등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 또는 좌대, 벽면을 채운 포스터, 그리고 웹사이트나 그래픽 영상·이미지가 투사되는 모니터나 빔 프로젝터 등으로 꾸린 전시장 풍경이 그려질 것이다. 이처럼 작업물을 그대로 가져와 늘어놓거나 보여주는 것은 시각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금까지 해온 가장 일반적인 전시 방식이다. 안전하고 검증된 방법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디자인 전시에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작업물을 늘어놓는 디스플레이 방식 외의 디자인 전시는 관람객이 이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지 여부과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표면적인 이미지로만 작업을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디자인 전시에서 ‘디자인 작업물’을 직접 보여주는 것에 어떤 한계가 있다고 의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해 말 세마창고에서 열린 <W쇼: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이하 <W쇼>)는 앞서 언급한 전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디자인 작업을 전시장에 풀어놓았다. 먼저 전시 제목에서 암시하듯 <W쇼>는 기본적으로 여성 디자이너들의 성취와 활동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앞서 언급한 디자인 전시들이 개별 디자이너나 스튜디오, 또는 역사적 맥락을 뼈대 삼아 특정한 기준에 따라 해석하고 분류한 디자인 작업물을 보여줬다면, <W쇼>는 결과치로서의 리스트가 아닌 지속적으로 확장될 중간 과정으로의 동시대 한국의 ‘여성 디자이너 리스트’(wlist.kr)를 전시 주제로 삼았다. 이런 지점에서 <W쇼>는 한국의 여성 디자이너들의 개별 디자인 작업물을 전시하기보다는 그동안 늘 존재해왔지만 수면 위로 쉽사리 드러나지 못했던 어떤 세계를 관객에게 제시했다.
한편 어떤 리스트를 제시하고, 대상이 되는 디자인 작업물을 전시장에 가져다놓지 않고 보여준다는 점에서 201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이하 <그, 2, 서>)과 비교해볼 만하다. 두 전시가 각자의 리스트와 디자인 작업을 어떤 방식과 태도로 시각화하는지를 통해 둘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2, 서>는 공동 기획자 김형진, 최성민이 자신들의 관점과 기준으로 뽑은 작업 목록 데이터베이스 ‘101개 지표’를 토대로 리스트 속 디자인 작업을 미술가, 사진가, 디자이너, 평론가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협업한 결과물을 전시했다. 덕분에 전시장에 놓인 것들은 (‘불완전한 리스트’를 제외하면) 그 자체로 디자인 작업이라기보다는 이를 소재로 만든 미술 작품에 가까웠고, 전시는 ‘디자인 작업을 소재로 한 미술 전시’로 읽히기를 표방했다. 이처럼 <그, 2, 서>는 리스트를 시각적으로 내세우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목록을 작품으로 ‘기념비화’하면서, 기획자들의 관점에서 2005~2015년 서울의 그래픽 디자인을 끝맺는 선언처럼 비쳐졌다. 반면 <W쇼>가 제시한 리스트는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폐쇄적인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꾸준히 갱신되고 반박돼야 하는 제안”으로, 특정 시기와 장소의 (주관적인) 결산이기보다는 그동안 지반이 기울어진 탓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영역의 지형도를 그리면서 한국의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활동의 ‘시작’으로 기능한다.
<W쇼>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소목장 세미의 ‘말하는 횃불’은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말 그대로 ‘호명’하며 순환 재생되는 설치 작업이었다. 보이스오버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름들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완결된 목록이라기보다는 마치 공항의 안내 방송처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될 것 같은 느낌으로 <W쇼>의 정체성을 은유했다. 이어서 박연주의 ‘머리말’과 양으뜸의 ‘붙은 말’은 전시 전반의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끌면서 관객을 홍은주의 ‘여성들’이 띄워진 모니터 또는 스크린 앞으로 데려왔다. ‘여성들’은 91명의 여성 디자이너들의 프로필과 대표작 소개를 담은 데이터베이스이자 각각의 요소를 혼합시켜 보여주는 미디어 작업으로, 혼합을 통해 스크린에 투사되는 실제도, 가상도 아닌 어떤 여성 디자이너의 프로필은 앞으로 이 목록에 추가될 수 있는 누군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목록’이 <W쇼>의 가장 큰 토대로 작동했다면, 텍스처 온 텍스처의 ‘아카이브’는 목록 자체를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여성 디자이너의 대표작 85점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아카이브’는 단순히 디자인 작업들을 아카이빙의 관점에서 복사 촬영이나 도판으로서의 사진으로 생산한 것이라기보다는 피사체가 되는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를 배치, 구성, 프레이밍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디자인 작업을 사진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2, 서>에서 선보인 EH의 ‘IMG’ 시리즈와 비교해볼 수 있다. 초고해상도의 대형 프린트로 ‘101개 지표’에서 소개된 책들을 촬영한 ‘IMG’는 EH의 개인 작업으로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전시장 내에서는 <그, 2, 서>가 제시한 리스트 속 작업들을 거대한 기념비로 시각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책을 피사체로 삼았지만 그것의 디자인 요소를 부각하기보다는, 실은 3차원이지만 마치 2차원처럼 여겨지는 오브제로서의 책을 다시 평면 이미지로 전환하는 데 집중하며, 마치 ‘이것이 지금 서울의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선언하듯 존재감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캡션은 책 제목과 디자이너만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방식으로 어디까지나 사진 작품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텍스처 온 텍스처의 ‘아카이브’ 시리즈는 사진 이미지 자체의 조형성을 내세우면서도 각각의 디자인 작업의 디테일이나 특징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며 작품으로서의 존재감과 <W쇼>라는 전시가 부여한 ‘목록의 도판’의 기능을 조화시켰다. 또한 85점의 작업물을 배치하는 방법에서도 ‘아카이브’는 과거 시약 창고의 기물을 그대로 살린 공간을 점유하면서 얼핏 꽉 차 있는 듯 보이지만 아직 새로이 뭔가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다는 제스처(담당 큐레이터인 윤민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환대’)를 보이면서 전시가 의도하는 방향과 태도를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