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캔버스 위에 펼쳐진 초현실적 세상, 소피 리(Sofie Lee)
비주얼 아티스트 소피 리의 예술적 여정과 협업 이야기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소피 리(Sofie Lee). 꿈속을 거니는 듯 초현실적인 작품 속 세상에서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색상과 그래픽 감각을 녹여내고 깔끔한 선과 모양, 여기에 직접 손으로 그린 유기적 형태들이 더해져 작가 본연의 스타일이 무르익어 가는 요즘이다.
유년 시절 스케치북 위에 크레파스로 그려나간 그림들이 그의 예술적 여정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LA에서 모션 그래픽을 전공하고 스튜디오에서 독립해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그는 모션 디자인, 애니메이션, 에디토리얼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꿈속을 거니는 듯 초현실적인 작품 속 세상에서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색상과 그래픽 감각을 녹여내고 깔끔한 선과 모양, 여기에 직접 손으로 그린 유기적 형태들이 더해져 작가 본연의 스타일이 무르익어 가는 요즘이다. 개인 프로젝트뿐 아니라 에르메스, 샐러디 등 다수의 브랜드와 활발한 협업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작가 소피 리를 만나 그의 작업 스토리를 이야기 나누었다.
Interview with
소피 리(Sofie Lee) 비주얼 아티스트
그리는 행위에서 발견한 기쁨
모션 디자인, 애니메이션, 에디토리얼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 작업 및 협업물을 제작하고 있어요.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까지 어떤 시간들이 있었나요?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저는 유년 시절부터 스케치북과 색연필, 크레파스만 있으면 홀로 시간을 잘 보내던 아이였다고 해요. 동화책, 만화책 가릴 것 없이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좋아하는 잡지 페이지를 뜯어 콜라주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그래픽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산타모니카 대학 그래픽 디자인 과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당시 학업과 별개로 편집·브랜딩·에디토리얼 분야에 관심이 많아 <Los Angeles> 매거진에서 디자인 인턴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막상 실무를 해보니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느껴지더라고요.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이 주가 되는 분야를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교수님들의 권유로 사바나 예술 대학(The Savannah College of Art and Desig)으로 진학해 모션 미디어 디자인(Motion Media Design) 전공으로 전향했어요. 이후에는 Oddfellows라는 디자인, 애니메이션 전문 에이전시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작업에 도전하며 저만의 역량을 키우고 싶어 프리랜서로 전향했고요.
작가님의 초창기 작업물과 현재의 작업물 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요.
맞아요. 조금 부끄럽지만 2018년에 제작했던 졸업작품 ‘A Visual Poem, Dream’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요. 당시 유학생인 제가 졸업을 준비하면서 ‘꿈’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풀어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꿈을 좇느라 내 앞의 아름다움은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관해서요. 보시다시피 초기에는 추상적이고 유리같이 깨끗한 느낌을 선호했었죠. 당시 꽤 좋은 피드백을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Motionographer’에서 주최하는 The Motion Awards에서도 Styleframe 카테고리 최우수를 받았고, 이후에도 비슷한 스타일로 다양한 프로젝트 협업 요청이 들어왔었거든요. 디지털 작업이 사람들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확신하게 해 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스튜디오를 나와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 작가로서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는 테크닉적인 부분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보다 체계적으로 일하기 위해 ‘작업’과 ‘배움’이라는 종류로 영역을 나누고 있어요. 프리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습에 연습을 거쳐야 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익숙한 것도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지?’라는 질문에서 첫 삽을 뜨는 편이에요. 제 안의 무언가가 잡아당기는 걸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작품 결과도 좋은 쪽으로 따라오거든요. 그럴 때 제가 쓰는 일기장을 들여다본다던가, 브레인스토밍을 자주 하는 편이고요. 최근에는 제가 면 요리를 먹는 걸 즐겨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면(Noodle)’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면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제 모습을 표현한 작업을 진행했어요.
작가님 개인의 삶 속 경험이 작업물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겠네요. 개인적 요소에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Mathijs Luijten 디렉터 및 애니메이터분과 함께 가수 제스퍼 리옴(Jesper Ryom)의 ‘Nights’ 뮤직비디오의 기획부터 아트 디렉션, 그리고 일러스트들을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떠올라요. 각자 음악을 듣고 한자리에 모여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단계에서 비슷한 대화 주제가 나왔고, 그렇게 정해진 주제가 바로 ‘노스탤지어 메모리(Nostalgic Memories, 향수 짙은 추억들)이었어요. 한 소년의 일대기를 그린 스토리로 방향성을 잡아서, 어른으로 커버린 소년이 유년 시절 자신의 꿈속에 나타나 마주하는 몽환적인 설정을 배경으로 인트로가 시작돼요. 그다음 들판을 자유롭게 달리던 소년, 들꽃을 손으로 스치며 숲속에서 사색하는 소년, 어둠을 걸어보기도 하고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는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내용이에요. Mathijs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성장기를 상징하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었는데 전달이 잘 된 것 같아 저에게는 아직까지도 특별했던 협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기 작업들과 현재의 작업을 비교해 보면 저만의 색, 저만의 스토리 등 많은 것들이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에요. 아마도 20대 때의 다양한 경험과 흔적들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고요. 가끔 지난 스케치북을 들춰보면 추억의 잔향들이 올라와 사무치게 그리운 날도 많아요. 그때의 저를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기도 하고, 달콤하지만 복잡 미묘한 감정이죠. 그때 그 시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30대가 되면서 더 와닿았고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생겼죠.
브랜드 언어 위에 나의 색을 입히다
두바이 라마단 기간에 맞춰 진행한 ‘에르메스’ 캠페인은 어떠한 주제로 진행된 프로젝트였나요?
에르메스 캠페인의 경우 함께 협업한 Abjad Design에서 콘셉트와 스토리보드를 기획했고, 저는 그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단계에서 아트 디렉션과 일러스트 작화를 맡아 진행했고요. 이 캠페인은 두 가지의 독특한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애니메이션은 에르메스 제품으로 가득한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주인공이 여행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어요. 원래도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 활발히 전개하는 브랜드이기에 제 고유 스타일을 지지해주고 믿어 주었던 기억이 나요.
국내 러드 브랜드 ‘샐러디’와 함께 한 작업은 CF 광고 영상 위에 모션 그래픽을 올리는 작업이었어요. 해당 작업물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샐러디 프로젝트의 경우 ‘샐러드는 맛이 없다’라는 편견을 깨고, 환상적이고 꿈같은 그림을 영상에 가미해 유니크하고 임팩트 있게 맛을 표현하는 콘셉트였어요. 보통 처음 협업하는 경우 의견 조율에 시간이 꽤나 소요되는데, 클라이언트가 제 이전 작업을 레퍼런스로 가져왔던 터라 그들이 원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어떤 뉘앙스를 필요로 하는지 빨리 이해할 수 있었어요. 또한 이번 프로젝트에서 중요했던 건, 제 일러스트레이션이 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상을 메인으로 두고서 한 발짝 물러나 작업하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과하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샐러드의 고유 이미지를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함과 동시에,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과 어울리는 색상까지도 고려하며 작업했었고요.
최근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드(WIA)’에 참여한 작품이 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죠.
‘Very True Story‘라는 미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80년대의 아이코닉 한 음악들을 콘셉트로 활용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저랑은 이미 몇 차례 협업을 해온 스튜디오였기 때문에 서로의 작업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죠. 노래를 들어보면 유난히 톡톡 튀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포인트들이 있었어요.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맴도는 가사들도 있었고요. 이러한 리듬이나 가사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지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부터 고려했던 것 같아요. 각각의 요소는 크기의 대비를 주어 더욱 톡톡 튀는 느낌을 살리고 팝 하면서도 빈티지적인 색상을 배합하고자 했고, 디스코 볼을 연상시키는 반짝거림과 눈이 부신 듯한 색 대비에도 신경 썼습니다.
이처럼 여러 클라이언트와 협업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소통’인 것 같아요. 초반에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질문을 통해 클라이언트가 진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이해하려 하는 편이에요. 협업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건데요. 제가 생각한 파란색이 상대방이 생각한 파란색과는 다를 수가 있고, 제가 생각한 감정의 느낌이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다가갈 수 있겠더라고요. 마지막까지 끈기와 빠른 생각의 전환만이 협업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노하우인 것 같아요. 특히나 모션 디자인, 애니메이션 작업들은 많은 스킬과 분야들이 융합되어 있기에 일러스트레이션 한 컷을 그리는 작업과는 또 다른 도전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내 몫은 반드시 해내야 하기에 문제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고 지혜롭게 생각을 전환하는 스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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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관도 있어야 하고, 그림에 들어갈 요소도 구상해야 하고, 개체의 모션까지 모두 다 의도해야 하잖아요.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과정의 순서를 나열해 보자면 브레인스토밍, 프리 라이팅, 레퍼런스, 섬네일 스케치, 스토리보드, 컬러보드, 그리고 마지막 작화 과정 순인데요. 먼저 콘셉트와 구도를 잡아가며 스케치를 해요. 선으로 된 스케치보다는 이렇게 흑백 대비를 함께 주면 주제 부가 어딘지, 스토리텔링 전달이 조금 더 명확해 클라이언트 수정 없이 초반 작업 과정의 속도를 올릴 수 있거든요. 그 후에는 선을 정리하고 러프하게 색을 입혀 전체 그림의 톤앤무드를 찾아내요. 스케치 때 잡아 놓았던 명암과 대비를 고려하면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알맞은 색 조합을 찾아내는 과정인데 제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단계이기도 하고요. 좋은 색을 찾는 건 마치 맛집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요?(웃음) 색상이 컨펌 되면 그다음부터는 디테일하게 하나씩 정리해가며 그림을 완성해요. 텍스처라던가 음영도 조금 깊이 눌러줘서 볼륨감을 더 생각해 보고요. 그려지는 인물, 물체들이 실제로 제 손에 닿아있다고 상상하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작가님의 작업 방식이나 스타일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스타일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들을 가져다준 것 같아요. 빠르게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좋은 양식의 자료들을 찾아 배우는 게 가능하잖아요. 예를 들어…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웹사이트도 작품 사진이라던가 설명들이 자세히 적혀 있어,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 제 작업실에 앉아서 커피 마시며 보면 더 좋을 때가 있죠. 작업 방식 자체에는 아직까지 큰 변화는 없어요. 저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종이와 연필로 기획 및 스케치 작업을 하고, 와콤 태블릿과 어도비 프로그램을 사용합니다. 이는 창작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에너지의 포커스를 두고 싶어서 이기도 해요.
아티스트로서 가장 크게 영감을 받은 작품이나 인물이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조그맣고 평범한 것 에서부터 크고 화려한 것까지 영감을 잘 받는 편인데요. 웨슬리 칸딘스키, 제인 오스틴, 웨스 앤더슨, 미야자키 하야오, 모네, 호아킨 소로야, 인물은 아니지만 한국의 전통 민화,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미술관, 매거진에서도 좋은 영감의 자료들을 발견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이 작업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나 감정은 무엇인가요?
메시지는 하나로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어요. 아무래도 개인 작품만 하는 아티스트가 아닌 협업도 함께 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훈련된 마인드 셋 같아요. 그러한 메시지들을 표현하기 위한 주된 감정이나 느낌들에 관한 단어를 조금 모아보자면 ‘초현실주의(Surrealism)’ ‘정서적인(Emotional)’ ‘밀물과 썰물(ebb and flow)’ ‘엉뚱한(Whimsical)’ ‘다채로운(Colorful)’ ‘꿈만 같은(Fantasy-like)’ 정도일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