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김현희: 전통 규방 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다

김현희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김현희 작가는 전통 규방 가구를 모티프로 제작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크리에이터만의 재해석을 강조한다. 공예, 디자인, 예술을 아우르며 활동 중인 작가를 만나 재해석의 힘을 물었다.

[Creator+]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김현희: 전통 규방 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다

editor’s note

조선시대 규방(閨房) 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규방은 당대 외부 활동이 엄격히 제한된 여성들이 머물렀던 생활 공간인데요. 김현희 작가는 규방에 놓인 전통 가구를 모티프로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해 재해석한 작품을 소개해 오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녀는 ‘가구는 서사를 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매체’라고 말하는데요. 어릴 적 제주의 일식 가옥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이야기부터 사회가 부여하는 성 역할에 관한 고민까지 ‘가구’를 통해 작가 고유의 이야기를 발화하고 있죠. 이외에도 리모와(RIMOWA), 까르띠에(Cartier), 지샌달(Jysandal) 등 국내외 브랜드와의 협업에도 적극적인 점도 눈길을 끄는데요. 특히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K-가구’의 매력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죠. 규방 가구를 주목한 계기부터 크리에이터의 일상생활까지, 홍제천 앞에 자리한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작업실에서 인터뷰 중인 김현희 작가

PLUS 1. 제주 섬 소녀, 가구 디자인에 반하다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공예가 등 다양한 수식어로 소개되고 계시잖아요. 어떤 표현이 정확할지, 그리고 또 선호하실지 궁금했어요.

표면적으로 가구를 만든다는 것은 기술을 바탕으로 한 수공예적 특성을 띠다 보니 ‘공예가’라고도 많이 불리는데요. 사실 제가 가구를 만들고 접근하는 방식은 개인의 서사를 담은 조각을 만드는 행위에 가까워요. 그런 점에서 포괄적으로는 예술의 영역이기에 ‘예술가’라는 수식어 정도가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수식어로 불리든 간에 모두 제 작업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결국 ‘저’를 말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가구를 다루는 일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셨다면서요. 어릴 적 작가님의 관심사가 궁금해요.

저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어요. 아버지가 설문대할망 등 제주도의 토속 신화를 연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회화와 조각 작업을 하는 예술가셨죠. 그래서인지 동화책을 접하는 시간보다 아버지의 화실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 뭉크, 에곤 쉴레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실은 도록을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았어요. 자연스럽게 예술가에 대한 꿈이 생겼죠.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가 돼야겠다는 건 없었어요. 어릴 적 친구들이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야’와 같이 막연한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가져다준 신문 글에서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고 마음이 바뀌었죠.

빅터 파파넥이요?

안티 디자인(Anti Design)을 추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디자이너예요. 대량 생산 체제에 일조하는 소비지향적 디자인에 반대한 인물인데요. 사물의 태생부터 폐기되기까지 전 과정이 선순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어요. 그의 디자인 철학을 접하고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미대 진학을 꿈꾸게 되었어요.

디자인 중에서도 가구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도 궁금했어요. 그래픽, 제품, 서체 등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장르도 많잖아요.

처음에는 빅터 파파넥 같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기 떄문에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산업 디자인의 꽃은 의자 디자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있고, 아버지의 권유도 있어서 홍익대학교 목조형가구학과에 진학했어요. 학교에 다녀보니 제가 생각한 것보다 커리큘럼이 훨씬 재밌고 즐겁더라고요. 특히 학과 과정 중에서도 가구 디자인에 서사를 담는 수업들이 흥미로웠죠.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타인의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기물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디자인과 예술의 중간지점에서 많은 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장르인 것 같아요.

국내에 아트퍼니처를 처음 도입한 1세대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최병훈 작가님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된 거겠네요?

최쌤(김현희 작가가 최병훈 선생님을 부르는 말)과의 첫 만남은 ‘가구 디자인의 역사’라는 수업이었을 거예요. 그 이후로 4학년에 진학하면서 스승과 제자로 작업을 매개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고요. 작업을 구상하고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해서 많이 배웠죠. 아직도 기억나는 게 최쌤은 가구에 대한 구조와 이해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대신 예술가로서 진정한 창조성을 갖추기 위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낼 수 있도록 독려하셨죠. 사실 내가 누군지, 다른 사람들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를 알아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이런 가르침 속에서 제주도, 해녀, 여성 등 나를 둘러싼 환경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됐고, 나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론을 배울 수 있었어요.

PLUS 2. 규방 가구를 재해석하다

White Nostalgia Series, 작은 궤 1(Gwe mini1), 2024, 39x22x19cm, 아크릴

반닫이, 궤, 갑게수리, 머릿장 등 규방(閨房) 가구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도 스스로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과 맞닿아 있겠네요?

맞아요. 가구 디자이너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나의 뿌리부터 돌아본 거죠. 제주도, 섬, 여성, 해녀 등의 키워드가 잡히더라고요. 제주도는 예로부터 해녀들이 물질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왔어요. 그만큼 여성들의 생활력과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죠.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학교 등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상’에 대한 의문과 갈등이 줄곧 있었어요. 그래서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니 조선시대 여성에게만 주어진 ‘규방’이라는 공간이 있더라고요. 과거 여성들이 지내는 공간인데 이들은 규방에 머무르며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강요받으며 바깥출입을 제한받고 살았던 거죠.

Ancient Future Series, Para Era, Para Area (Gab Gae Suri)갑게수리, 2019, 42x30x41cm, 스틸, 황동

특히 규방에서만 사용된 가구들이 제 눈길을 끌었는데요. 폐쇄적인 형태, 화려한 장식을 갖춘 디자인이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회가 강요한 여성의 이미지처럼도 보였어요. 심지어 당시 가구들은 대부분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의 취향이 담겨 제작됐고, 여성의 취향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가구를 사용하는 여성의 의지는 담을 수 없었던 거죠. 규방 가구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고 나서 이 가구들을 현대의 여성상으로 재해석해 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전통적인 규방 가구를 재현하는 게 아니었네요?

전통 기술과 재료를 그대로 재현해 제작하는 건 이미 저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 분야에서 오랜 시간 기술을 익히고 작업하신 장인 분들보다 더 잘할 순 없죠.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서 규방 가구의 형태는 차용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현재’의 이야기를 저만의 방식과 재료로 작업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지 이를 재해석하는 당위성이 더욱더 명확해질 수 있으니까요.

“익숙하지만 전혀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것, 그래서 동시대에 걸맞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재해석의 힘이에요”

그래서인지 전통 가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재료들을 사용하셨어요.

가능하면 ‘기존의 가구 재료’였던 목재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고요. 대신 현대 사회에서 쉽게 사용되는 플라스틱, 철, 알루미늄, 에폭시 등을 사용했어요. 예를 들어 ‘규방 연작’에서는 가구의 형태를 프레임으로만 유지하되, 막혀 있던 벽은 전부 드러냈어요. 프레임(Frame)은 관념이나 인식을 뜻하기도 하잖아요. 가구의 안과 밖의 경계를 없앴을 때 이를 보는 이들이 가구의 경계를 인지할지 궁금했어요. 궁극적으로는 어떤 대상을 하나의 관념이나 시선만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죠.

김현희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 가구에 더하는 장석은 일일이 손으로 직접 가공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재료만큼이나 가구를 제작하는 과정도 흥미로워 보였어요. 컴퓨터로 시작해서 손으로 끝맺음하신다고요.

작업 과정을 크게 보면 반은 가구에 서사를 부여하는 일이고, 나머지 반은 제작이거든요. 특히 제작 과정에서 절반 이상을 도면과 도안에 할애하는데 먼저 가구의 틀은 오토캐드(AutoCAD)로 도안을 그려요. 그리고 그 위에 붙이는 작은 장식품들은 손으로 직접 도안을 그린 뒤 일러스트로 벡터화해 데이터 파일로 제작해 두죠. 아크릴이나 장석 등 가구에 사용할 재료를 다룰 때는 CNC 가공과 레이저 커팅을 이용하는데요.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가공법이 주를 이루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장석을, 열을 줘서 손으로 절곡하거나, 장석 투명도와 내구성을 위해 코팅을 하는 등 생각보다 기계 공정 이후의 수작업이 많아요. 가끔 꼭 김장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공정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웃음)

가구 위에 더하는 장석 모습. 작가는 손으로 그린 도안을 컴퓨터로 벡터화해 데이터 파일을 만들어 둔다.

한편 재해석도 원본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듣기로 한국의 고가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제작 방식에 대한 기록도 많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어려운 건 없으셨어요?

맞아요. 가구의 제조에 대한 역사도 추정할 뿐이지 객관화된 사료가 많지 않아요. 말씀처럼 전통 가구 연구자들도 어려움을 겪는 부분으로 알고 있어요. 그나마 성북구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책에는 나오지 않은 다양한 전통 가구들을 볼 수 있는데요. 그게 아니면 직접 옛날 가옥을 찾아다니면서 가구를 살펴봐요. 그렇게 찾아가는 곳은 그래도 반닫이 하나 정도는 있거든요. 첫 작업으로 반닫이를 만들 게 된 이유도 제주도에 있는 고향 집에서 봤던 가장 익숙한 전통 가구였기 때문이에요.

PLUS 3. 가구에 서사를 담는 방법

White Nostalgia Series, 반닫이5 (Bandaji5), 2024, 98x44x44cm, 아크릴

앞서 작업 과정의 반이 가구에 서사를 입히는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가구는 사람이 사용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만큼 실용성도 중요한 거 아닐까 싶었거든요.

맞아요. 가구는 태생적으로 실용적이어야 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실용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용의 편리함만을 의미하진 않거든요. 가구에는 보이지 않는 더 큰 부분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인체공학적으로 아주 잘 설계된 의자와 어릴 적 할머니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줄 때 나를 앉히던 의자 중에서 소중한 의자를 고르라고 하면 전자가 아닌 후자를 고르지 않을까요? 가구를 편리함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죠. 가구는 세월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에요. 표면적으로는 사용의 과정에서 불편함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도 쓰이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가구가 그 이상으로 좋은 가구라고 생각해요.

White Nostalgia Series, 반닫이5 (Bandaji5), 2024, 98x44x44cm, 아크릴

“가구는 신기하게도 생긴 대로 쓰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옷은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입잖아요. 반면에 가구는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니까 의사 표현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행동 양식을 천천히 제어하거나 반영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제작한 가구를 어떤 분들이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제가 가구의 외관을 만들고, 규방 가구에 얽힌 해석을 담았지만, 제가 한 일은 거기까지예요. 이 가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는 관람객이나 사용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사용하는 분들이 자신만의 취향과 철학에 따라 사용하길 권하죠. 제 아이(가구)들이 단순히 오브제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자의 소중한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비로소 나만의 서사가 담긴 진정한 가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분들은 ‘나중에 딸에게도 물려주고 싶다’라는 피드백을 주셨는데, 제 가구가 두 모녀의 오랜 시간을 함께할 생각을 하니 뿌듯했던 기억도 나네요. (웃음)

PLUS 4. K-가구를 주목하는 글로벌 브랜드

지난 2024년 4월과 5월 석파정에서 열린 까르띠에 행사 ‘르 보야주 레코망쎄(Le Voyage Recommencé)’에 맞춰 선보인 화이트 노스탤지어 연작 중 일부 사진 Cartier, Glow Pumpkin

리모와, 까르띠에 등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하게 선보이고 계시잖아요. 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비결도 있을까요?

글쎄요. 제 작업이 시대성에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규방 가구를 모티프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게 2016년도인데 그때만 해도 국내외로 K-컬처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현재는 정말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한국이 주목을 받는 것 같아요. 아마 한국만이 지닌 문화적 고유성과 더불어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속도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브랜드는 수익을 창출하는 집단이잖아요. 대중들의 관심사를 브랜드 활동에 반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거죠. 그런 점에서 최근 주목 받는 K-컬처의 ‘고유성’과 ‘속도감’이 제 작업과 닮은 면이 있어서 주목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현희 작가는 소중한 물건을 넣어서 다니는 캐리어와 머리맡에 두는 수납함인 ‘머릿장’ 가구의 닮은 점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사진 Rimowa
독일의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RIMOWA)’가 기획한 전시 <AS SEEN BY>에 참여한 김현희 작가. 캐리어를 이동식 가구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사진 Rimowa

특히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RIMOWA)와 함께 한 전시 <AS SEEN BY>는 서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전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달랐겠어요

캐리어는 집을 떠나 이동할 때 가장 소중한 물건만을 골라 담는 이동식 가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규방 가구 중 머릿장과 비슷한 지점을 찾았어요. ‘머릿장’은 잘 때 머리맡에 둘 정도로 소중한 물건을 담는 수납함이에요. 머릿장과 리모와의 캐리어가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머릿장 가구에 리모와 특유의 수트 케이스를 더해 새로운 모습의 규방 가구를 보여줄 수 있었죠.

서울미술관 석파정에서 열린 까르띠에 행사 ‘르 보야주 레코망쎄(Le Voyage Recommencé)’를 위해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다. 사진 Cartier, Glow Pumpkin

반면 까르띠에와 함께한 행사는 ‘석파정’에서 열렸더라고요. 리모와 전와는 대비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부터 흥미롭던데요.

올해 4, 5월 한국에서 처음 열린 까르띠에의 ‘르 보야주 레코망쎄(Le Voyage Recommencé)’행사가 과거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에서 열렸어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 공간인 만큼 규방 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온 제 작업의 콘셉트와도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죠. 행사는 2층부터 4층 야외석까지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저는 2층에 자리한 전시 공간 중 한 곳을 맡아 기획했어요. ‘다시 시작되는 여정’이라는 뜻을 지닌 르 보야주 레코망쎄 행사에 걸맞도록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 속에서 하이 쥬얼리가 돋보일 수 있는 가구를 디자인했었습니다.

브랜드 협업에 적극적인 만큼 그 반작용으로 개인전이나 신작에 대한 욕심도 커지지 않을까 싶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가 가장 하고 싶고, 또 해 나가야 할 일이기에 새 작업에 대한 욕심은 늘 많아요. 동시에 브랜드와의 협업이 활발해지는 모습도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고 보기 때문에 브랜드와의 협업 또한 늘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일상의 경계에 한 층 더 가까워질 방법이니까요. 오히려 제 작업을 폭 넓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임하죠.

PLUS 5. 지치지 않고 오래 일하는 크리에이터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작품 제작에 몰두하는 아티스트로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최근에는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자 회사 생활을 정리했다.

최근까지도 회사에 다니면서 작품 활동을 하셨다고요. 

한샘에서 빌트인 가구 디자이너로 7년 간 근무했어요. ‘키친바흐’라는 프리미엄 주방 디자인과 붙박이장 등의 수납을 개발하는 일을 했어요. 올해 3월 퇴사했는데요. 건강 상의 이유도 있고, 작업 활동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회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저도 작업에 더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었죠.

퇴사 이후로는 생활 패턴이 많이 변했겠네요?

회사가 8 to 5 근무였어요. 회사일을 병행할 때는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해서는 저녁에 작업하는 사이클을 유지했죠. 퇴사 이후에도 회사 출근하듯이 8 to 5 루틴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새벽 6시에 일어나 작업실에 들어가서 5시에 작업을 놓고 나오는 게 쉽진 않더라고요. (웃음) 더욱이 개인전과 프로젝트 활동까지 겹치는 바람에 한동안은 매일 밤을 새우면서 작업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삶의 질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지난 6월부터는 낮에 작업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에 출근해 작업하고, 일이 많아도 7시나 8시에는 퇴근하는 규칙적인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일에도 리듬이 있잖아요. 집중이 가장 잘 되는 시간대가 있어요?

일단 저는 물리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있어야 정신적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져요. 그래서 낮 동안에는 몸을 쓰는 일을 주로 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밀린 메일과 서류 작업을 하는 거죠. 지난 7년간 밤에 작업하던 버릇이 있어서인지 시간대로는 확실히 낮보다는 밤이 집중하기 좋아요. 하루를 보내다 보면 아침보다 밤에 가까워질수록 생각의 크기가 커지니까요.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물리적인 힘도 필요로 할 텐데 건강하게 오래 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도 궁금해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서 지켜야만 건강하고 오랫동안 작업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루틴이 없으면 일상이 쉽게 깨지고 감정적인 상태가 되어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거든요. 어느 정도의 루틴이 있다면 느리더라도 나 자신에게 고통을 덜 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김현희

PLUS LIST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김현희가 좋아하는 예술가 3

  • 프란츠 카프카

김현희 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 이름은 ‘The Metamorphosis’이다. 이는 세기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대표작 <변신(The Metamorphosis)>의 제목과 동일하다. 그녀가 얼마나 프란츠 카프카를 동경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소설 속 주인공 ‘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끔찍한 벌레로 변신하게 되면서 개인, 가족, 사회와의 새로운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김현희 작가는 이렇게 ‘익숙한 일상 속의 낯섦’을 만드는 방법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날카롭고도 세밀한 관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상이 담긴 ‘전통 규방 가구’라는 소재를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 최병훈

홍익대학교 목조형가구학과를 졸업한 김현희 작가는 1세대 아트 퍼니처 아티스트 최병훈 작가와 사제지간이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최병훈 교수는 늘 오전 8시에 한 시간씩 수영하고 수업했다고. 건강하게 오래 작업하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교수님의 피드백이 필요할 때면 늘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맞춰 가면 됐어요. 홍익대학교 홍문관 앞에 ‘르방(Levain)’이라는 빵집이 있는데 아침에 수영하시고서는 늘 그곳에서 빵과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계셨거든요. 시간관념이 정말 투철하셨던 거죠. “

또한 최병훈 교수는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줄 때도 방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더 파고 들어가 봐’라는 말은 당시 학생이던 김현희 작가에게는 노이로제처럼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교수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피드백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네모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네모 말고 세모는 어때? 가 아니라 네모 좋은데, 왜 네모를 만들고 싶은지 더 알아봐봐라는 식. 세모는 교수의 취향이지 학생의 취향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자기 자신에 관해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독려했다고.

  • 콘스탄틴 브랑쿠시

김현희 작가는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좋아한다. 특히 ‘받침대는 조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철학에 공감한다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끝없는 기둥(Endless Column)’(1937-1938)을 컬러링 해 타투로 새겼는데, 작품은 조각 그 자체임과 동시에 조각을 받치는 받침대로 끊임없이 쌓여가는 모양을 갖췄다.

“브랑쿠시는 재현의 영역 속에서 조각의 추상적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정말 멋진 예술가예요. 특히 그의 조각을 보면 받침대(혹은 좌대)는 실용적 대상이 되기도, 또 조각의 일부이기도, 혹은 그 자체로, 작품으로 존재하거든요. 완전히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제가 만든 가구들도 무언가가 놓이는 받침대의 역할과 동시에 조각의 특성을 가지는데 그의 작품으로부터 늘 영감을 많이 얻죠.”

TIPPING POINT

세상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김현희 작가의 크리에이티브가 돋보인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도라는 뿌리에서 시작해 전통 규방 가구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작품 세계의 단단한 줄기와도 같다. 다른 한 가지는 재해석의 힘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재밌는 이야기라도 보기 좋고 듣기 좋아야 하는 법. 전통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 제작 과정, 기법, 네이밍, 브랜딩 등 동시대에 걸맞은 문법으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중적이고도 세련된 모습으로 비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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