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선 장충섭 회장, 1939~2023

완성도를 타협하지 않는 근성의 디자이너

2023년 7월 12일 원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장충섭 계선 회장이 별세했다. 그가 전념해온 회사는 국내 호텔 건축 붐이 일던 시기,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다수의 호텔 개보수와 신축 작업에 참여하며 성장했다. 오늘날 계선은 호텔과 백화점 등 고급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 사무 공간 분야 전문 설계 회사로 자리 잡았다.

계선 장충섭 회장, 1939~2023

2023년 7월 12일 원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장충섭 계선 회장이 별세했다. 성북동 한옥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늘 집을 개조하고 수리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장충섭 회장은 성장기의 이러한 환경이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여겼다. 10대 시절 반도호텔 개보수 작업에 참여한 경험은 그가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프로젝트를 총괄한 한국공예시범소 디렉터 노만 디한Norman DeHaan과 교류하게 됐고 그 영향으로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해 1963년 졸업했다. 2년 뒤인 1965년 장충섭 회장은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을 연결하는 반도조선 아케이드 2층에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Elegance Interiors’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금의 계선을 창업했다. 당시 13m² 정도 되는 공간에 책상 2개를 놓고 디자이너 이달형과 함께 회사를 꾸렸다.

창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LA에 있는 유나이티드 디자인 어소시에이츠United Design Associates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된 그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에 체류했고 귀국한 뒤에도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는 설립 초기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한 외국 항공사의 사무실을 다수 디자인했다. 1971년에는 한창기 대표가 설립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 지사를 설계하기도 했다. 당시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를 거쳐 간 디자이너들로 세계실내건축가연맹(IFI) 회장을 맡았던 민설계 민영백 회장,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아트 디렉터였던 이가스퀘어 이상철 대표, 한국 인테리어 디자이너 협회장을 지낸 아티프랜 오의조 회장 등이 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장충섭 회장은 다수의 호텔 및 사무실 설계와 시공 외에 가구 디자인과 제작에도 조예가 깊었다. 미국 체류를 계기로 미스 반데어로에의 브루노 체어, 하리 베르토이아의 다이아몬드 체어 등으로 알려진 가구 브랜드 놀Knoll과 교류하며, 제품을 원설계에 최대한 가깝도록 제작 기법을 개선하고 이를 다시 브랜드에 전수하기도 했다. 덕분에 가구 품평회에 패널로 초대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놀이 생산하는 몇몇 가구에 대한 국내 생산권을 따내 일본에 수출한 바 있다. 1975년에는 경기도 부천에 직영 가구 제작 공장을 세우고, 1988년에는 오피스 가구 전문 생산 회사 ‘계선 오피스 시스템스’를 설립하는 등 가구 분야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장충섭 회장은 50년 이상 설계, 시공, 제작 모두를 아우르는 활동에만 묵묵히 매진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장충섭 회장의 성정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필자는 2020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ACC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이너로서 장충섭 회장의 일생과 계선의 역사를 회고하는 구술 기록을 진행했다. 그는 음성 기록을 시작하며 “(녹음기가) 고장 났으면 좋겠다”라고 나직하게 혼잣말을 한다. 영상 녹화는 강경하게 거절했지만, 음성 녹음은 필자의 간청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수락하면서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속마음이다.

그가 전념해온 회사는 국내 호텔 건축 붐이 일던 시기,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다수의 호텔 개보수와 신축 작업에 참여하며 성장했다. 오늘날 계선은 호텔과 백화점 등 고급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 사무 공간 분야 전문 설계 회사로 자리 잡았다. 디자인의 개념조차 뚜렷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외 설계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가구를 수출하며 국내외로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이제 업력이 60년이 되어가는 계선이 걸어온 행보는 곧 한국의 근현대 실내 건축사나 매한가지다. 계선 창립자 장충섭 회장을 국내 디자인사 인물 계보에 위치시키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다.

디자이너 장충섭을 기리며

민영백 민설계 회장
“장충섭 회장의 동생인 장정섭 씨가 공군 선배였다. 그 인연으로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 입사 시험을 보고 근무를 시작했다. 그 시절은 모든 열정을 뿜어내던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면모도 있었지만, 나의 초기 정체성과 향후 가치관을 끌어내준 분이다. 장충섭 회장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렸지만 디자인에 대한 열정, 안목, 비즈니스 감각이 높았던 모더니즘의 신봉자였다. 한국 디자인 및 건축계에 큰 기여를 했고, 나와 후속 세대에게 큰 영향을 주신 분이다.”

최향순 두오모앤코 회장
“장충섭 회장이 가구를 대화의 주제로 삼을 때는 늘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두오모앤코 활동에도 응원과 애정을 보여주었기에 이 업을 지속하는 데 큰 힘이 됐다. 1980년대 초, 계선이 기술과 인프라가 부족한 환경을 극복하고 놀에서 품질과 생산력을 인정받은 것은 지금도 놀라운 일이다. 디자이너로서 작은 디테일에도 완벽을 추구했던 장충섭 회장의 집념과 감각은 우리가 닮아야 할 부분이다.”

이상철 이가스퀘어 대표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삶의 환경과 조건이 매우 취약했지만 장충섭 회장은 건축, 인테리어, 살림살이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현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현대화, 국제화를 꾸준히 일구어온 인물로 기억한다. 그는 전통 문화유산의 세계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현대화하는 것을 디자인 철학으로 삼았다.”

글 조옥님 큐레이팅소사이어티 디렉터
건국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계선에서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영국 킹스턴 대학교에서 디자인 큐레이팅 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공예청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인턴십을 마쳤다. 한국에 돌아와 디자인하우스 전시사업부에서 3년여간 일했고 202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계선 장충섭 회장의 구술 채록 연구를 진행했다.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는 큐레이팅소사이어티를 운영하며 국립도시건축박물관 개관전시팀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42호(2023.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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