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낮아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진 예술 디자인의 메카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11월 한국 미술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다.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작품 너머에 감춰진 디자인의 힘이 컸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한국 현대 예술의 중추로 만든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살펴봤다.
지난해 11월 한국 미술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다. 초기 기획단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에 거는 기대와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작품 너머에 감춰진 디자인의 힘이 컸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한국 현대 예술의 중추로 만든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살펴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축과 디자인으로 현대 예술을 논하다
뮤지엄(museum)의 어원인 무세이온 (Mouseion)은 시, 음악 등 아홉 가지 학예를 관장하는 그리스 여신 뮤사(Muse)의 신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 갤러리, 퐁피두 센터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관들은 그야말로 ‘미의 신전’다운 위용을 뽐낸다. 하지만 지난 11월 13일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은 미술관의 기념비적 엄숙함과 카리스마를 내려놓고 시민 친화적 공간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서울관이 위치한 소격동 165번지는 사실 대형 미술관이 들어서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땅이었다.
고도 제한 때문에 건물의 높이는 12m를 넘길 수 없었고 미술관을 관통하는 길을 뚫어야 한다는 서울시의 제약 조건까지 따라붙었다. 건축가 민현식은 지하 공간을 적극 활용하고 8개의 군도형 전시실을 마련해 이 난제를 풀고자 했다. 서울관은 지상 3층, 지하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8개의 전시실 중 6개가 땅 아래에 있을 정도로 지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높은 층고는 지하 특유의 폐쇄적 느낌을 완화시킨다. 자연 채광 활용은 개방적 느낌을 한결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은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서울관은 주변 풍경이나 날씨 같은 외부 조건을 공간 안으로 적극 수용한다. 외부 환경뿐 아니라 관람자와의 소통과 조화를 강조한 점 역시 눈길을 끈다.
여기저기 흩어진 전시실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데, 여행지에서 ‘어디로 가야 한다’는 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관람자들은 발길 닿는 대로 미술관 안을 거닐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용주 디자인 매니저는 “서울관은 모든 전시를 한 번에 돌아보는 기존의 미술관과 다르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미술관에 들러 개별 전시 공간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한 것이 공간의 콘셉트다”라고 말했다. 즉 미술관을 ‘큰맘 먹고’ 와야 하는 부담스러운 장소에서 영화관이나 소극장처럼 쉽고 가볍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정문을 따로 두지 않고 사방에 입구를 분산시킨 점, 진입부 가까이에 카페테리아나 아트 숍 같은 편의 시설을 설치한 점, 영화관과 멀티미디어실 등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갖춘 점 모두 이런 의도에 부합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조명에서 찾을 수 있다.보통 미술관에서는 스포트라이트 조명으로 작품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감상을 위한 최적의 환경일 수는 있지만 이런 조명은 필연적으로 작품과 관람자 간의 보이지 않는 위계 구조를 형성한다. 반면 서울관은 대형 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광등을 균일하게 설치했다. 작품과 관람자 간의 위계를 없애고 일대일의 동등한 관계에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것. 장점이 많은 미술관이지만 8개 전시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 동선 확보가 어렵다는 것은 풀기 힘든 숙제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팀은 이런 공간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 전시실 벽에 해당 전시실의 번호를 큼직하게 새겨 산발적인 전시 공간을 빠르고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친절한 서울관의 건축과 디자인은 관람객들이 좀 더 편안하게 예술을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 디자인 시스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작품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것은 공간 곳곳에 적용된 디자인 시스템이다. 다양한 그래픽 응용이 가능한 MI, 관람객의 편의와 환경적 특성을 고려한 사인물과 사인 시스템 등은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감상 포인트가 된다. 특히 서울관 개관전에서 다양한 스타일과 기능으로 변주된 그래픽 시스템은 이 미술관이 예술뿐 아니라 디자인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MI. 디자인 인피니트. 서울관 개관을 기점으로 지역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아우르는 통합 MI를 만들었다. ‘미래의 창, 문화의 창’을 콘셉트로 내부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MI 디자인은 2011년 10월 발표했으나 이후 로고가 교체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디자인으로 성장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주목하라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서울관을 향하고 있지만 디자이너들은 과천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7월 디자인 상설 전시실을 열며 서울관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천관의 전시 총괄을 맡고 있는 손주영 학예연구관은 “앞으로 디자인을 포함한 영역 예술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왔는지 역사적으로 조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관이 과감한 실험성으로 디자이너를 자극한다면 과천관은 깊이 있고 세분화된 연구로 묵직한 통찰력을 선사하는 것. 잭슨 홍, 김영나, 고만기 등이 참여한 <디자인: 또 다른 언어>전은 디자인 전시실의 역사적인 첫걸음으로 기록됐다. 디자인 상설 전시실 외에도 사진과 공예, 건축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각 전시실의 전시 디자인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천관의 전시 디자인이 이끄는 여행은 관람객에게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은 2015년에 청주관을 개관하고 4관 체제(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청주관)를 구축할 예정이다.
Interview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디렉터
“전시 디자인은 작품과 관람객의 감성적 접점을 넓혀준다.”
전시 디자이너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는 전시 기획자, 그리고 관람자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기획자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약 3년 전부터 디자인팀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전시 공간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전시 콘텐츠를 상품화하는 제품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탄탄한 프로세스와 팀워크를 구축해놓은 외국과 비교하자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매력적이고 전망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외국에서는 전시 디자이너가 10년, 20년씩 한 미술관에서 근무하며 그 미술관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나가기도 하는데, 국내에서는 아직 이 분야가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예술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전시 디자인의 역할이 궁금하다. 전시장이라고 하면 으레 화이트 큐브 안에 작품이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런 전시 방식은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배제하는 행위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누구를 위해 이 전시가 열리는가?’라고 묻는다. 전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을 전달받는 것이고 그 느낌은 개개인의 기억과 만나 하나의 경험이 된다. 전시 디자인은 작품과 관람자의 감성적 접점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공간 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관람자와 작품의 관계, 작품과 또 다른 작품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상관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디자인이 해외 디자인 어워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외국에서도 전시 디자인이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이번 수상은 전시 디자이너가 미술관을 홍보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전시 디자인의 저변과 관심이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그래픽 디자인도 담당했다. 서울관은 8개의 전시실이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분산된 동선을 하나로 이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하지만 건축가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개별 전시실의 독립성을 보존하면서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 벽면에 붙어 있는 숫자 그래픽은 당분간 유지할 계획이지만 서울관의 사인 그래픽은 앞으로 계속 보완해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