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놀이를 위한 디자인 타임머신, 윷 2024 프로젝트
민족 대명절 추석을 동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디자인하우스의 캠페인 '우리 문화 대수선'의 일환으로 월간 <디자인>은 '윷 2024'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텔레포트'와 함께 전통 놀이인 윷놀이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월간 <디자인> 10월호에서 만날 수 있다.
고 이어령 선생은 <우리 문화 박물지>에서 보자기, 장독대, 장승 등 선조들이 사용한 옛 물건들을 일컬어 “서명이 없는 디자인이며 조각이며 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텍스트이자 창작자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하우스의 캠페인 ‘우리 문화 대수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대명절 추석을 동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그 안에 담긴 진짜 가치를 들춰보겠다는 것이 캠페인의 목적이었다. 자매지 <행복이 가득한 집><럭셔리><스타일 H>가 각자의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가운데(지난 9월호에서 해당 캠페인을 확인할 수 있다), 월간 <디자인>이 마지막 단추를 여민다.
월간 <디자인>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윷놀이다. 네 개의 윷과 말판으로 구성된 윷놀이는 단순한 구성 덕분에 오히려 관점의 해석에 따라 파격적인 변신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파트너로 나이키, 29CM,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 등과 협업하며 독창적인 브랜드 캠페인을 선보여온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텔레포트’가 합류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윷놀이 3종을 개발한 텔레포트는 젊은 감성의 그래픽 디자인과 더불어 기존의 윷놀이 형식을 탈피한 독창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참고로 이번 프로젝트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패키지에 새겨 놓았듯 이번에 공개한 디자인은 일종의 베타 버전이다. 월간 <디자인>과 텔레포트는 내년 설을 목표로 이 놀이를 한 차례 더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전통의 현대적 계승, 윷놀이 오리지널
전통 윷놀이의 룰은 유지하되 룩 앤 필만 변주한 버전이다. 함께 개발한 다른 두 게임이 형식과 형태 양쪽에서 기존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취한 만큼 그 뿌리를 전통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 버전으로 알리고자 했다. 다만 디자인은 최대한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세대 간 통합을 은유하는 글자 ‘X’를 패키지 박스와 윷판에 새기고, 블랙을 메인 컬러로 모던하고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다른 컬러나 장식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오롯이 게임의 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네 개의 윷은 3D 프린터로 제작했는데, 다른 두 게임에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몇 가지 표식을 두었다.
다차원 공간에서의 치밀한 두뇌 싸움, 이스케이프 4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를 점수로 기록하며 진행하는 롤 앤 라이트 장르의 TRPG 게임으로, 별도의 윷판이나 말 없이 윷과 매뉴얼, 수치를 기록하는 기록지만으로 진행한다. 게임과 게임적인 것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컬렉티브 ‘isvn’이 룰 개발과 그래픽 디자인에 참여해 SF적인 내러티브와 콘셉트를 개발했다. 폐쇄된 다차원 공간에 갇힌 우주비행사가 계기판을 조작해 탈출한다는 스토리 라인이 중심인데, isvn의 게임 개발자 멜트미러는 “하드 SF 대신 농담과 아이러니한 유머를 즐겨 구사하는 폴란드의 SF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Stanisław Lem의 무드가 묻어나길 바랐다”라고 답했다. 플레이어가 윷을 던지면 숫자 4개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기록지 안의 수식으로 구성된 세 모듈에 기재해 결괏값을 만든다. 라운드 별로 도출한 결괏값을 모두 더해 가장 높은 숫자를 완성한 플레이어가 우승하는 방식이다.
장르 특성상 플레이어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려면 한 번 윷을 던졌을 때 많은 숫자가 나와야 하는데, 이를 위해 isvn이 고안한 것은 일명 ‘빽도’를 나침반처럼 활용하는 아이디어였다. 즉 빽도의 방향과 역방향에 해당하는 숫자, 그 두 숫자를 더하거나 뺀 결괏값을 바탕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매뉴얼과 기록지 안에 게임의 콘셉트를 반영해 몰입을 유도했다. 디자이너는 다차원 공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계기판에 숫자를 입력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디자인을 전개했는데, 매뉴얼에는 계기판의 패널들을 연상시키는 그래픽으로 이스케이프 4의 세계관을 표현했다. 반면 기록지는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채 수식으로 구성된 모듈들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지속 가능한 패션과 윷놀이의 만남, 빈티지 옥션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빈티지 패션 트렌드를 윷놀이에 접목한 게임이다. 후드, 시계, 바지, 모자 등이 그려진 의류 카드와 윷, 도·개·걸·윷·모·빽도가 적힌 베팅 카드를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윷 4개를 모두 던지지 않고, 한 번에 윷 하나만 사용한다는 것. 던진 윷의 결과와 일치하는 베팅 카드를 지닌 사람이 먼저 의류 카드를 가져가도록 해 게임의 순서를 정한다. 1점부터 6점까지 점수가 매겨진 의류 카드를 모아 스타일링을 완성하는데, 이때 점수의 총합인 스타일링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우승하게 된다. 동점일 경우 의류 카드 구성이 더 다채로운 사람이 승리한다. 캐주얼하면서도 세련된 아메리칸 빈티지 스타일을 반영한 디자인도 돋보인다. 카드 속 의상 그래픽은 특징만 살려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했다. 텔레포트는 게임 구성품을 정리해 보여주는 패브릭 네비게이터를 별도 제작했는데 리바이스나 필슨 등 오랜 역사를 지닌 미국 의류 브랜드의 라벨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빈티지 옥션의 메커니즘 설계와 규칙 개발을 담당했다. 윷놀이의 특성을 현대적인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재해석하는 데 주력했다. 윷의 우연성을 활용해 게임의 베팅 시스템을 만들고, 라운드 진행 방식과 승리의 조건을 정립했다. 말을 움직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기존 룰을 의류 카드를 수집해 패션 스타일링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바꾸었다. 플레이어가 의류 카드를 모을 때 같은 종류의 카드는 한 장만 사용할 수 있게 제한했는데, 이는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을 조합하는 실제 스타일링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평일 보드게임 기획자
“윷 2024 패키지 브랜딩과 윷놀이 오리지널의 디자인을 맡았다. 이중 윷놀이 오리지널에서 중점을 둔 것은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탈피하는 것이었다. 윷판과 패키지에 공통으로 쓰인 윷 2024 로고 타입을 디자인하는데 특히 신경 썼다. ‘윷’의 형태가 밀도가 높은 탓에 받침이 안정감 있게 글자들을 받쳐주는 모습으로 보이도록 했다.”
이지원 텔레포트 그래픽 디자이너
“isvn의 크루원으로서 이스케이프 4의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했다. 게임에 사용하는 기록지는 한번 게임을 하고 나면 다시 쓸 수 없는 소모품인 만큼 다른 장식은 배제하고, 메모지처럼 쓸 수 있게 했다. 필요시 기록지를 편하게 복사할 수 있도록 A4 판형의 모노톤을 기반으로 디자인했다.”
정해리 슈퍼샐러드스터프 디자이너·isvn 크루원
“게임 3종 중 빈티지 옥션의 디자인 전반을 맡아 진행했다. 의류 카드 디자인 과정에서는 간결하면서도 빈티지 의류의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구현하는 데 신경 썼다. 예를 들어 빈티지 후드는 팔의 폭이 넓고 총장이 짧다는 특징이 있어서 이를 잘 나타내려고 했다. 한편, 베팅 카드 중에는 도·개·걸·윷·모 외에 빽도도 있는데, 기존 도에 위트 있게 ‘Back’ 아이콘을 작게 덧붙였다.”
김민하 텔레포트 객원 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