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밀러의 1980년대 ‘레트로’ 디자인 게이밍 의자
아케이드 게임과 팝아트의 감성을 입혔다
허먼 밀러Herman Miller가 뉴욕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아케이드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게이밍 의자 디자인을 선보였다. 컬러풀한 12종의 게이밍 의자를 디자인한 패일Faile은 스트리트 아트를 중심으로 그림, 설치물, 벽화, 타일 작업과 팝업 스토어 및 이벤트 공간을 연출하는 아트 및 디자인 스튜디오다.
가구라기보다는 팝아트 작품처럼 보이는 이 게이밍 의자들은 허먼 밀러의 기존 게이밍 라인 중 하나인 엠바디Embody의 제품들을 재해석한 것이다. 엠바디는 허먼 밀러가 지난 2020년 게이밍 기어 브랜드 로지텍 G Logitech G와 협업하여 출시했다. 원래는 블랙, 그레이, 화이트와 함께 채도 낮은 청록색과 보라색 등을 사용하는 엠바디는 이번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전혀 다른 색감의 옷을 입었다. 패일은 엠바디의 인체공학적 구조는 건드리지 않고, 그 구조에 맞춰 이미지들을 더했다. 밝고 선명한 색상을 활용한, 만화적이고 그래픽적인 캐릭터와 배경을 그렸다.
▼ 작업 과정과 디테일을 설명한 영상. 출처: Herman Miller Gaming 인스타그램
파트너로 패일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허먼 밀러의 부사장 겸 총괄 매니저인 존 캠벨은 보도자료에서 “창의성과 자기 표현을 기념하는 것은 두 회사 모두의 근본 가치의 핵심”이라며, 그런 공동의 정신이 이 프로젝트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패일은 동시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아티스트들로, 그들의 독특한 관점이 허먼 밀러의 구성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기대한다고도 덧붙였다.
게임 문화의 판타지적인 감성과 대담한 색을 담아내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패일의 디자이너, 패트릭 맥닐과 패트릭 밀러는 “게이밍 의자도 상품으로서 디자인되는 것을 넘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허먼 밀러의 의자를 일종의 캔버스처럼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게임과 게임 문화가 특징적으로 갖고 있는 판타지적인 감성과 대담한 색감이 게이밍 기어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뒤집었다. 게임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다채로움과 자유로움이, 허먼 밀러의 제품을 통해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과 팝아트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특징은 각 의자 디자인의 타이틀에서도 드러난다. ‘Invasion’, ‘CD-Rom Synth’, ‘Come Fly With Me’와 같은, 실제 게임 속 내용이나 관련 분야에서 따온 이름들은 우리가 아는 평범한 가구의 이름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밖에도 ‘Vision Deluxx’, ‘Whats Stopping You’, ‘Sensations’, ‘Victoire’, ‘Sets You Free’, ‘Into the Wild’, ‘Let’s Dance’, ‘Don’t Stop’, ‘Where Sound Meet Vision’ 등의 이름이 붙었다.
스트리트 아트 기반의 작업을 해온 페일의 디자이너들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이 콘셉트의 영감의 원천이 엠바디의 “급진적인 디자인”이었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들은 엠바디 특유의 구조에 맞추어 팩맨과 같은 아케이드 게임의 색감이나, 스케이트보드 문화, 그리고 여러 게임의 패키지 디자인의 스타일을 연구하여 의자에 적용했다. 또 쿠션과 프레임은 물론, 첫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부분까지도 디테일을 살려 레트로 느낌을 표현했다. 이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부분에 기쁨과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는 유쾌한 게이밍 가구를 만들고자 했다.
신화를 모티브로 손으로 깎아 만든 ‘조이스틱’
컬렉션에서는 12종의 의자 외에, 게임을 포함한 디지털 문화의 유산을 담은 그래픽 아트워크와 ‘조이스틱’ 조각품품들도 함께 공개되었다. 일종의 토템처럼도 보이는 이 오브제들은 신화와 지역별 민속 설화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게임 속 캐릭터들을, 목공 작업 경력이 있는 패일의 디자이너들이 직접 조각하고 색칠해 표현한 것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인 신화와 전설을 모티브 삼아, 전통적인 장인정신과 손재주를 이용해 물성 있는 작품으로 구현했다.
오래된 글과 그림, 때로는 낙서들을 기반으로 만든 100종의 캐릭터들은 각각 고유한 개성과 매력을 드러낸다. 아름다움과 정교함이 강조된 수공예는 대량생산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빛을 발한다. 패일의 디자이너들은 “오브제를 손에 잡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친밀감,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붓놀림, 손으로 펜을 잡고 그려낸 느낌이 가득한 유기적인 곡선 형태를 보면 그 안에 깃든 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조이스틱들을 만든 취지를 설명한다. 직접 쥐면 자기 손 안에 있는 이 캐릭터가 신화나 전설 속에서 어떤 정신과 마음을 대변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소개한다.
허먼 밀러의 새로운 색깔
허먼 밀러가 ‘활력 넘치는 기쁨과 에너지를 창의적인 접근법으로 표현했다’고 소개한 이번 게이밍 의자 컬렉션은 허먼 밀러의 브랜드 아카이브를 통한 공개 및 오프라인 전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즉, 실제로 이 의자들을 판매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허먼 밀러는 왜 출시도 하지 않는 의자와, 또 언뜻 의자라는 가구와는 전혀 관계 없어보이는 조각품을 만들었을까?
허먼 밀러는 지난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며 리브랜딩을 진행했다. 올해 초 공개한 새로운 로고 디자인 등에서는 클래식한 실루엣에 다양한 컬러 팔레트를 더한 이미지를 전달했다. 공개 당시 허먼 밀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켈시 키스는 “이전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25년간은 허먼 밀러와 잘 맞았지만, 지금 우리의 고객들과의 접점과는 맞지 않는 지난 시대의 것”이라고 리브랜딩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소개에 따르면, 리브랜딩에서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제시한 키워드는 ‘대담함(boldness)’, ‘기쁨(joy)’, ‘감촉성(tactility)’, ‘미래를 향한 시각을 가지고 과거를 존중(respect)하는 것’ 등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디자인되었다(Designed for a New World)”는 자체 공식 소개에서처럼, 허먼 밀러와 패일의 컬래버레이션도 그런 브랜드의 새로운 방향 안에 있는듯 하다. ‘수공예 작품이 지금 시대의 디지털 문화에 결핍된 요소들인 촉감, 따뜻함,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는 허먼 밀러의 조이스틱 제작 취지에 대한 설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자는 아카이브로만 남지만, 신화를 모티브로 한 아트워크와 조이스틱 오브제들은 허먼 밀러와 패일의 웹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의자 12종 디자인 전부도 함께 공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