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 빠진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소환되는 이유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 살바도르 달리나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 대신, 세일러문과 도라에몽이 제품에 반영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현대 미술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작품과 함께하며 유쾌함과 친숙함을 추구한 컬래버레이션을 소개한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현대 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출시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에는 현대 미술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작품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브랜드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나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 대신, 세일러문과 도라에몽이 제품에 반영되고 있는 것.




신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그리다, 로에베LOEWE
애니메이션과의 컬래버레이션을 꾸준히 내놓는 대표적인 브랜드 중 하나가 로에베다. 로에베는 이 달 초 스튜디오 지브리Studio Ghibli와 함께 한 ‘S/S 2023: 로에베 X 하울의 움직이는 성’ 컬렉션을 출시했다. 2021년 영화 〈이웃집 토토로〉(1988), 2022년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컬래버레이션에 이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공개한 이번 컬렉션에는 하울, 소피, 캘시퍼, 황야의 마녀 캐릭터와 영화 속 장면을 활용한 스웨터와 티셔츠, 토트백과 액세서리 등이 포함되어 있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 대해 “마법과 과학 기술, 전쟁을 소재로 우정과 연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협업 이유를 설명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신화적인 느낌”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도피하는 것 외의 다른 관점의 대응책이 필요”하고, 지브리의 영화들이 그에 맞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소환하다, 지미 추Jimmy Choo
한편, ‘마법소녀’들을 소환하는 브랜드도 있다. 지미 추는 14일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이하 ‘세일러 문’)의 30주년을 기념한 ‘Jimmy Choo x Pretty Guardian Sailor Moon Collaboration’ 컬렉션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출시했다. ‘세일러문’은 1990년대 초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시에 나와 북미에서도 방영되는 등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지미 추는 ‘세일러 문’이 가진 에너지 넘치고, 속박에서 해방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담았다고 설명한다. 컬렉션에 속한 다섯 켤레의 구두는 극중에서 다섯 캐릭터가 신는 신발을 원작과 흡사하게 재해석하고 재현한 것이다. 만화 속 대표적인 장면을 프린트한 클러치와 액세서리 등을 포함한 이 컬렉션은 지난해 6월 일본 도쿄 롯폰기 박물관에서 열렸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박물관’ 전시에서 먼저 공개된 바 있다.





귀여운 게 최고라는 불변의 진리, 롱샴Longchamp
2020년, 롱샴은 토트백, 백팩, 실크 스카프, 휴대폰 케이스, 열쇠고리 등 다양한 제품군에 피카츄가 그려진 포켓몬 컬렉션을 한정판으로 출시해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롱샴은 브랜드 대표 상품인 ‘르 플리아쥬의 우아함에 피카츄의 귀여움을 조화시켰다’고 소개했다. 또 파리패션위크 시기에 ‘포켓몬 고’ 게임과 함께 출시 이벤트를 진행하며 기존의 고객들 외에 ‘포켓몬스터’ 원작 팬들에게도 어필했다. 롱샴의 아트 디렉터 소피 델라폰테인은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게임 업계가 최초로 함께 한 콜라보레이션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며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융합된 특별한 컬렉션”이라고 설명했다.




패션 브랜드들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하는 이유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환상의 세계와 어린 시절 롤모델이었던 소녀 전사들 그리고 우아함과 만난 궁극의 귀여움까지.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애니메이션과 협업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사실에 대해 업계 측은 명품 구입이 늘어난 Z세대 소비자들을 겨냥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인기를 누린 유명 애니메이션들은 소비자들에게는 익숙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당대의 문화를 직접 목격하지 않은 아래 세대에게는 보통의 레트로 트렌드가 그렇듯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수 있다. 브랜드들은 추억과 향수를 통해 새로운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주고 이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럭셔리한 명품과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사이의 대비는 오히려 플러스가 된다. 여전히 고급스럽지만, 그러면서도 나이 들어보이는 중후한 느낌을 피할 수 있다. 유년기를 장식했던 캐릭터들이 그려진 옷과 가방들은 다른 사람들이 브랜드를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다운 개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또 애니메이션과 콜라보한 제품들은 많은 경우 한정판으로 출시되기 때문에, 리셀(재판매)이 익숙한 세대에게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


특히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의 동북아시아 시장에서 더 강력하게 소구한다는 분석도 있다. 로에베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와의 컬래버레이션 컬렉션 출시 캠페인을 이 세 개 나라에서 먼저 시작했다. 물론 일본 작품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작품들도 계속해서 협업의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 구찌는 ‘도라에몽’과 디즈니 도날드 덕, 또 미키마우스를, 멀버리Mulberry는 ‘미피Miffy’를, 지방시Givenchy는 ‘101마리 달마시안’을, 코치Coach는 ‘나루토’를, JW 앤더슨JW Anderson은 ‘달려라 하니’를 컬렉션으로 제작했다.
유쾌함과 친숙함을 추구하는 이러한 콜라보레이션은 이제 더이상 드물지 않다. 같은 캐릭터를 여러 브랜드에서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따른 혹평도 종종 등장한다. 서구권 브랜드들이 음력 설을 앞두고 그 해의 12간지 동물을 테마로 한 한정판 컬렉션을 서둘러 발표하는 것에 대해 중국은 디자인적으로 새로울 것 없는 “게으른” 신상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컬렉션이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애니메이션을 재해석한 럭셔리가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일 터. 럭셔리 브랜드의 애니메이션 콜라보레이션에 대해 다양한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분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또는 기억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애니메이션이 수놓인 제품을 계속 볼 수 있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