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보존에서 ESG 경영까지

전배호 국립중앙박물관

공간건축에서 실내 건축설계를 하다가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준비를 하던 시기에 전시 디자이너로 합류한 전배호 디자인 전문 경력관은 1년에 7건 이상의 전시를 진두지휘한다. 그는 전시 디자인의 범위와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디자이너다. 업계 선배로서 나침반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박물관 전시가 나아가야 할 미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었다.

유물 보존에서 ESG 경영까지

1945년 광복과 함께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라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가진다. 공간건축에서 실내 건축설계를 하다가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준비를 하던 시기에 전시 디자이너로 합류한 전배호 디자인 전문 경력관은 1년에 7건 이상의 전시를 진두지휘한다. 그는 전시 디자인의 범위와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디자이너다. 업계 선배로서 나침반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박물관 전시가 나아가야 할 미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었다.


Interview
전배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디자이너는 내용을 관람객에게 충실히 전달하는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할 당시 분위기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전시 디자이너가 나 혼자이다 보니 업무를 의논할 사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한 후 규모나 조직 면에서 훨씬 커지고 현대적으로 변모했지만 전시 디자인 분야는 여전히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해외 박물관을 많이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처음에는 디자이너가 디자인 프로그램을 잘 구동할 수 있는 고사양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고 조직을 설득하는 것조차 애를 먹었다.(웃음)

디자인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전시 디자인, 그리고 홍보·출판으로 파트가 나누어진다. 어떤 전시를 할지 정해지면 PM 역할을 하는 전시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업무분장을 한다. 과거에는 기획팀이 전시 기획안을 작성해서 디자인팀에 전달하면 이를 바탕으로 전시 디자인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획이 완성되기 이전 단계부터 기획팀과 디자인팀이 함께 의견을 나눈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더 좋은 전시가 만들어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잘 만든 디자인이 전시의 흥행 성적과 관련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면서 지금의 프로세스가 안착되었다. 전시 디자인에 따라 관람객의 반응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기획팀도 공감해준다. 예전에는 단순히 진열장에 유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시가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에는 공간에서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는 추세다.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전시 디자이너가 팀 단위의 조직 체계를 갖추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디자이너가 있는 기관 자체가 많지 않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전시 부서에 소속된 경우가 많다. 해외 박물관의 디자인 조직 역시 생각보다 크지 않다. 디자이너의 필요성은 현실적으로 인지하면서도 예산 등의 이유로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일관성 있는 전시 디자인과 퀄리티 담보를 위한 공감대 형성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곳에서 일하는 것의 이점이나 강점도 분명 있을 텐데.

전시 디자이너로서 분명 일하기 좋은 환경이다. 전시 기획 학예사 대부분이 자신이 맡은 영역을 전공한 전문가이기에 깊이 있게 연구하고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 깊다. 디자이너도 자신이 맡은 전시에 대해 배경 지식을 쌓고 각각의 전시 오브제를 알아야 하는데 정보 습득이나 연구 측면에서 도움을 받기 수월하다. 또 다른 장점은 어느 곳보다 다양한 실무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 1년에 특별전 5건, 상설전 2건이 박물관에서 열린다. 전시 기획을 맡은 학예사는 1년에 1회꼴로 기획을 맡는 데 비해 전시 디자이너는 같은 기간 동안 전시를 3회 안팎으로 담당하기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박물관 전시 디자인에서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유물을 안전하게 전시하기 위한 보존 환경 구축을 우선으로 고려한다. 대부분 오래되고 보물로 지정된 것이기 때문에 온습도와 설치 위치, 조명, 이동 동선에 대한 엄격한 기준과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 특히 해외에서 이미 한 차례 열렸던 전시를 진행할 때 협업 파트너인 해외 박물관에서 요구하는 전시 보존 환경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큰 숙제다. 집기 자재와 제작 방법, 조명 조도 및 색온도 등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매뉴얼화되어 있어서다. 때론 지정된 재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수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6월부터 재개관하는 〈세계문화관: 그리스·로마실〉의 경우 전시 작품이 대부분 입체물이어서 작품을 안전하게 거치하는 ‘마운트’ 장치를 훨씬 정밀하게 설계했다. 포름알테히드가 검출되지 않는 친환경 소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본드 접착이 아닌 다른 부착 방식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미션을 해결해야 하다 보니 협업 전시를 진행할 때면 자연스럽게 해외 박물관의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공들이는 포인트가 있다면?

진입 공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시작부터 전시 주제와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징 없는 화이트 큐브 공간에 유물을 일렬로 진열하던 과거와 다르게 요즘은 전시에서 각 섹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리고 동선 중간에 컬러 톤을 바꾸거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장치를 마련하는 등 일종의 전이 공간을 조성하고, 마지막 에필로그 공간에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한다. 전시 오픈 후에는 관람객의 행위를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통로가 협소해서 이동이 정체된다거나 하면 체크해뒀다가 다음 전시 때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전은 한국 문화를 함께 보여주는 북유럽 디자인 전시로 주목받았다.

기획 초기 단계에는 국립 핀란드 박물관과 협업해 핀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핀란드 측에서 제안한 아이템을 한국의 유물과 비교하는 전시로 우리 측 기획 팀에서 제안했고 국립 핀란드 박물관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시 디자인 측면에서는 그동안 해온 전시와는 아이템과 구성 면에서 달랐기에 차별화된 분위기의 전시를 연출해야 했다. 페인트 도장을 하지 않고 나뭇결과 고유한 컬러를 그대로 노출한 소재를 진열장 등 일부 전시 집기에 활용해 북유럽 디자인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했다.

좋은 전시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정의한다면?

기획 내용이 디자인에 충실히 반영되었을 때 좋은 전시 디자인이라고 느낀다. 사회상과 시대상이 잘 반영된 주제, 그리고 관람객과 소통하는 디자인을 구현했을 때 전시는 반드시 성공한다. 주제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로 디자인 콘셉트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람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만으로 어렵게 전시를 표현한다면 오히려 관람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상업 공간은 디자이너의 콘셉트에 따라 때론 모호한 디자인도 가능하지만 박물관의 전시 디자이너는 내용을 관람객에게 충실히 전달하는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관람객이 한눈에 이해하기 쉽도록 디자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전시 유물 감상과 내용 전달에 집중하는 환경을 구현하는 것이 전시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추구하는 방향을 전시 디자인에서 어떻게 녹여낼지도 숙제다.

사물에서 사람 중심으로 박물관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모두를 위한 열린 박물관을 추구하고 있다. 문화 취약 계층의 접근성 강화를 위해 노약자, 장애인을 위한 장치와 동선을 점검하고 사용성을 개선하는 중이다. 얼마 전 리뉴얼한 ‘백자-청자’ 상설 전시실에 설치한 촉각 전시나 점자도 같은 맥락이다. 또 올해부터 디지털 점자를 도입하고, 탄소 중립 방안을 실천하는 ESG 경영을 전시에 적극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최근 종료된 〈합스브루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은 바로 직전 전시였던 〈이건희 컬렉션: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사용한 전시 집기를 재활용하고 조립식 모듈 벽체를 사용했다. 보통은 이전 구조물을 철거하고 새로 집기를 제작하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폐기물을 줄여야 한다는 인식이 차츰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친환경적 전시 연출을 확대해나가고자 한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38호(2023.04)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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