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스튜디오의 아카이브 프로젝트
유행을 넘어 현상으로
그칠 줄 모르는 아카이브 열풍은 동시대 디자인에 새로운 흐름을 촉발하며 흥미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동시대 디자인 스튜디오의 아카이브 활동을 이끄는 원동력은 완성된 결과물 이면에 담긴 디자인의 다채로운 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것을 요청하는 디자이너들의 오랜 바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던 지난날, 무언가를 ‘아카이브’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생소한 일이었다. 한때 스치는 바람인 줄만 알았던 아카이브가 어느덧 디자인 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칠 줄 모르는 아카이브 열풍은 동시대 디자인에 새로운 흐름을 촉발하며 흥미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하드 디스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물성없는 자료를 앞다투어 기록으로 엮어내고 있고, 각종 프로토타입과 도면에 파묻혀 일하던 산업 디자이너와 공간 디자이너들도 주위에 산재한 크고 작은 사물과 공간이 살아 있는 아카이브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처럼 동시대 디자인 스튜디오의 아카이브 활동은 유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 Arlette Farge는 “일상이 옷감이라면 아카이브는 옷감의 해진 구멍이라 일상의 안쪽을 엿보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디자인 아카이브를 추동하는 힘은 완성된 결과물 이면에 담긴 디자인의 다채로운 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것을 요청하는 디자이너들의 오랜 바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카이브로 새로 그리는 그래픽 지형도
지난해 4월 출간한 〈그래픽〉 48호는 ‘워크룸 15년(2006~2021)’을 주제로 다뤘다. 2006년 오픈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지난 행보를 묶어내는 기획이었다. 워크룸이 그동안 수행한 프로젝트 소개와 더불어, 스튜디오의 지난날을 함께해온 22명의 협업자와 디자이너의 에세이를 더해 다각도로 이들의 활동을 조명했다. 워크룸의 15년 치 발자취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지난 십수 년간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지형도를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그래픽〉 편집부의 설명이다. 같은 해 8월에는 땡스북스에서 ‘가가린’ 간판과 함께 절판된 책까지 포함해 워크룸프레스에서 출간한 모든 책의 실물을 볼 수 있는 쇼윈도 전시를 열기도 했다.
한편 활자로부터 느껴지는 감정과 형태 사이의 상관관계를 고민하는 글자 디자이너 채희준은 지난 10월 프로젝트렌트 1호점에서 〈채희준 2022년 프레젠테이션〉전을 열었다. ‘탈’, ‘청조’, ‘클래식’, ‘신세계’를 비롯해 지난 10년간 제작한 11가지 서체를 한데 모아 소개하는 자리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막연한 감정을 포착하고, 그 감정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글꼴의 요소를 살려 디자인하는 그의 작업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디자이너는 관람객이 조판 샘플을 직접 골라 가져갈 수 있도록 했는데, 글쓰기 재료로서 글자에 익숙한 대다수에게 창작물로서의 서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영리한 기획으로 주목받았다.
2021년과 2022년은 DDP에서 듀오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업물을 모은 전시가 연달아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먼저 열린 〈집합이론〉전에서는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김형재가 참가했는데 이들은 2인조로 그래픽 디자인 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점 외에도 두각을 드러낸 시점과 작업 영역 면에서 뚜렷한 교집합을 공유한다. 작업물이 한데 모인 공간에서 교집합만큼이나 두드러졌던 것은 그 교집합을 비집고 나온 차집합의 영역이었다. 세 팀이 지닌 고유한 어법과 독자적인 방법론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더 큰 존재감을 발휘했다. 교집합 속에서 공고한 유대감을 공유하면서도 각자만의 길을 걷는 세 팀. 발자국이 모여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꾸준한 힘이 디자이너들로부터 나왔다면, 그 세 갈래 길을 모아 동시대 그래픽 디자인계의 지도로 재구성한 것은 다름 아닌 아카이브 전시의 힘이었다.
다음으로 열린 그래픽 디자인 듀오 진달래 & 박우혁의 〈진달래 & 박우혁: 코스모스〉전은 그래픽 디자인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초기 작업에서부터 영상과 퍼포먼스의 영역으로 확장된 최근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이었다. 진달래 & 박우혁은 20여 년간 자신들이 구축해온 작업 세계를 무질서와 혼돈의 우주 공간 속 만물의 조화와 질서를 뜻하는 ‘코스모스’에 빗대었다. 불규칙하고 실험적인 시도로 가득한 그들의 작업을 한데 모아 새로운 질서를 도출하기 위한 일종의 개념적 제안이었다. 자유로이 유영하던 활자와 텍스트, 기호와 패턴이 한 공간에 모이자, 부유하던 그래픽 파편들이 다시금 정렬되면서 진달래 & 박우혁의 작업 여정이 드러났다.
일상의실천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한동안 회자될 만한 아카이브 전시와 도록을 남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디자인의 책임과 역할을 고민하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한 일상의실천의 지난 10년간 여정은 ‘일상’과 ‘실천’이라는 소박하면서도 무거운 두 단어를 구체적 실체로 그려내기 위한 분투였다. 전통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는 문제의식을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발언해온 이들이다. 일상의실천이 남긴 발자국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스튜디오의 정체성을 넘어서는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의 일상적 단면이었다.
오브제와 가구, 가장 날것의 아카이브
송봉규, 소동호, 양정모 디자이너는 ‘시팅 서울Seating Seoul’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의자를 아카이빙한다. 일련의 활동은 한 대화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송봉규 디자이너는 BKID 스튜디오에 전시된 ‘아이언 캐스트Iron Cast’ 가구를 살펴보던 한 해외 디자이너로부터 서울에도 의자 디자이너가 있느냐는 다소 나이브한 질문을 받고 머리가 멍해졌다고 한다. 국내에도 의자 디자이너가 많지만 이들의 각개분투가 가시화되지 않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이에 2020년 문화역서울284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디자이너들의 의자를 전시했고, 지난해 DDP에서 전시를 이어나가면서 디자이너들의 느슨한 연대를 위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와 함께 디자이너 홍은주·김형재의 도움으로 시팅 서울 웹사이트를 구축해 2009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50점이 넘는 의자를 업데이트하고 자세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지난달 BKID 스튜디오 전시장에서 열린 〈Appendix: Research And Practice〉전은 완성품이 아닌 그간 BKID가 거쳐온 여정의 뒤안길에 남은 부산물(appendix)을 보여준 자리였다. 제품을 디자인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성된 여러 부산물(프로토타입, 리서치, 일러스트레이션과 기록사진 등)을 다양한 형태로 소개했다. 그간 결과물에 비해 사소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부산물. 전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부산물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이너들의 고민과 시행착오의 흔적, 그리고 그 안의 잠재된 가능성이다. “사소한 것과 비장한 것이 똑같은 일상적 어조로 펼쳐지는 곳이 아카이브”라 했던가. 결과물과 부산물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BKID의 시선을 빌려 디자이너의 노력과 실천을 엿볼 수 있었다.
웹 아카이빙과 별개로 물성이 있는 사물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3차원 아카이브다. 물건의 표면에 남은 사소한 낙서와 의도치 않은 흔적은 미처 언어로 치환되지 못한 무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 면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을 만들어오고 있는 길종상가의 작업과 그 안팎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무렵, 두 권의 책 〈길종상가 2021〉과 〈사포도〉가 탄생했다. 먼저 〈길종상가 2021〉이 개인과 단체, 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사물과 공간의 형상으로 다듬어내는 길종상가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책이라면, 〈사포도〉에서는 길종상가의 지난 시간을 나란히 걷다가 멀어지기도 하며 궤적을 그린 필자 7명의 사유가 펼쳐진다.
같은 해에 나온 〈Stool 365〉는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 동안 제로랩이 365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인스타그램으로 공개한 각양각색의 스툴을 기록한 책이다.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어 더 재미있는 스툴의 형태와 재료를 탐색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툴이 전시된 장소에 대한 기록, 작가 인터뷰 등을 수록한 모음집으로 눈길을 끈다.
가구 스튜디오 스탠다드에이는 지난해 브랜드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10 Years 5 Chairs: A Journey Through the Classic〉전을 열었다. 새롭게 출시한 ‘Chair 07’을 포함해 지난 10년간 디자인한 의자 5점을 통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다양해진 소재와 정교해진 가공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말과 글 대신 재료와 형태로, 5점의 의자는 스탠다드에이의 10년 치 무게를 우아하게 담아냈다.
한편 자체 디자이너 브랜드 ‘리버럴 오피스’를 론칭한 SWNA의 〈The Chemical Reaction〉전이 11월 30일까지 열린다. 스튜디오 소속 디자이너들이 함께 작업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화학 반응chemical reaction’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성을 토대로 지금까지의 작업과 그 과정, 신작을 소개하는 전시다. SWNA는 이번 전시를 기념해 지난해 스튜디오 10주년을 맞아 출간했던 〈일상에 영감을, SWNA: 깨뜨리고 뒤흔들고 비틀어보기〉의 2쇄를 펴냈다. 지난 10년간의 작업물과 작업에 대한 과정, 생각 등을 통해 그들의 디자인 철학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오는 10월 2일에는 10주년을 맞은 더퍼스트펭귄이 그간의 프로젝트를 기록한 〈워크 인 프로그레스Work in Progress〉를 발간한다. 책의 기획 의도에 대해 “지난 10년간 우리가 만들어온 ‘점’으로써 결과를 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써 과정을 밝히고 기록”하는 데 있다고 밝힌 최재영 디자이너는 기록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전력을 다해 도망감으로써 다음 10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