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종상가 박길종
가구무한육면각체의 비밀
기능적이면서 실없는 농담 같은, 하지만 철학적인 가구를 선보이는 길종상가. 그의 인생 첫 단독 개인전과 그의 농담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는 가구에 대한 이야기.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구조는 단순하고, 문장은 명료해야 한다고, 독자의 눈높이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해는 한다. 엔트로피가 무한 증식하는 시대이니 글이라도 쉽게 써야 난마 같은 독자의 머릿속이 조금이마나 덜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쉬운 글이 곧 좋은 글이라는 등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같은 논리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이나 이상의 시는 좋은 글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본론에 앞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길종상가 박길종의 행보가 쉽지 않은 글 같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기능적이면서 무용해 보이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 같다가도 드문드문 심오한 철학이 엿보인다. 불특정 다수를 무한 수렴할 듯 제스처를 취할 때도 있지만, 소수에게만 허락된 럭셔리 브랜드와도 제법 합이 잘 맞는다. 다층적이고 모호하며 때론 상충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다면체 같은 면모는 창작자 본인에게도 해당한다. 디자이너 같기도, 아티스트 같기도, 메이커 같기도 한 그는 종잡을 수 없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다. 그렇게 10여 년간 활동을 이어온 길종상가가 지난 8월 용산 시청각 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걸어가는 농담 같은 전시’를 보기 위해 오프닝에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건축계 종사자들이 모였고 각자의 방식대로 작품을 더듬었다.
길종상가가 걸어온 길
개인전 오픈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인지도나 활동 기간을 생각하면 이제야 첫 개인전을 여는 게 좀 의아하기도 하네요.
오프닝 때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웃음) 그룹전에 참여하거나 길종상가라는 이름으로 팀원들과 그룹전을 연 적은 있지만 저 혼자 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 전시라는 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개인전을 여는 게 망설여졌어요.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부분에 대한 갈증이 해소된 것도 있고. 그러다 2011년 〈천수마트 2층〉전으로 인연을 맺은 현시원 큐레이터에게 전시 제안을 받았는데, 작년에 10년간의 활동을 정리한 책도 나왔으니 이쯤에서 개인전을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막상 준비하기 시작하니까 하고 싶은 말이 여럿 떠오르더군요. 그렇게 신작 15점을 제작했습니다.
전시 타이틀이 강렬합니다. ‘휴거’라는 단어가 특히 인상적이네요.
‘여름 그늘’이라는 단어와 ‘휴거’라는 단어 사이에 쉼표가 있잖아요. 명료하게 양분화한 것은 아니지만 한 공간 안에서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느낄 수 있도록 했어요. 제가 소셜 미디어에 “봄에서 여름으로 걸어가는 농담 같은 전시”라는 문구를 남겼는데 실제로 올해 봄부터 전시 준비를 시작해 여름까지 이어진 제 생각과 인상을 담았습니다. 특히 ‘휴거’에 해당하는 작품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보고 제작한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는 것인데 오히려 삶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며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특정 종교의 심벌을 차용한 휴지 거치대를 제작했어요. 그런데 젊은 관람객들은 ‘휴거’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더라고요. ‘휴가’인 줄 알았다는 친구들도 봤습니다.(웃음)
원래 대학에서 순수 미술을 공부했는데 어떻게 목공을 접하게 됐나요? 길종상가가 등장하고 몇 년 뒤 메이커 무브먼트가 거세게 일었는데 혹시 그런 시대적 흐름까지 감지한 건가요?
거기까지 내다봤으면 제가 대단한 천재였겠죠.(웃음) 그렇지 않고요, 학교를 졸업할 때쯤 고민이 많았어요. 한국에서 예술가로 살아남는 게 아무래도 쉽지 않으니까. 친구들과 팀을 만들면서 활동하고 설치 작품이나 팝업(그때는 팝업이라는 말조차 생소했지만) 행사 같은 것을 소소하게 열곤 했는데, 파트타임이라도 하면서 활동할 요량으로 구인 중인 목공소에 지원했어요.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페이가 좋았는데 전형적인 목공소와 조금 달랐어요. 목공 도구도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자체 아카데미도 운영하는 곳이었죠. 처음에는 택배 포장이나 사포질같이 자잘한 업무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조금씩 기술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을 팀원들과 활동할 때 응용해보는 식으로 작업에 반영하기 시작했죠.
그렇다면 본격적인 커머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활동하면서 알게 된 한 지인이 연결해줘서 복합 문화 공간 ‘문지문화원 사이’의 책장 등 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 시작이었죠. 이쪽으로 경력이 전무했던 제게는 제법 큰 금액이기도 했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목공소의 정직원 제안을 고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의 결정이 운명을 바꿨네요.(웃음) 지금은 제작자로 많이 알려졌지만, 길종상가 초기에는 좀 더 폭넓은 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일종의 퍼포먼스도 진행했고, 팝업 등 판매 행사를 아주 이르게 시작했습니다. 2012~2013년경에는 빈티지 의류를 100벌쯤 준비해 한두 시간 만에 완판하기도 했고, 뮤지션과 디자이너를 엮어 토크 콘서트를 진행해보기도 했죠. 스마트폰 보급과 소셜 미디어의 활성화 덕을 크게 보았습니다. 당시 재미있는 행사를 기획하면 페이스북을 보고 많은 분이 찾아주었고,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비교적 빨리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에너지가 많지 않아서 결국 한 방향으로 집중하게 됐지만요.
개인 의뢰로 제작한 맞춤형 가구도 많죠? 초기에는 노하우도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일을 했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제게 의뢰하는 분들은 대부분 문화·예술계 종사자였습니다. 디자이너, 건축가, 예술가 혹은 인접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이 먼저 알아보고 연락을 주었죠. 처음에는 가구가 들어갈 공간을 쓱 둘러보고, 어떤 가구가 필요한지, 원하는 색상은 무엇인지 들어본 뒤 ‘알겠습니다. 이때까지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고 혼자 뚝딱뚝딱 만들었습니다. 중간 과정도 공유하지 않았고요. 돌이켜보면 미흡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는데 생소하기는 의뢰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게 대다수였죠. 애초에 제 성향을 알고 의뢰한 것이다 보니 문제 삼지 않은 것도 있고요. 물론 지금은 경험이 쌓이면서 소통 방식도 발전했습니다. 일정과 예산을 맞추고, 중간 시안을 공유하고. 이전에 없었던 서비스 마인드가 생긴 거죠.
연차가 쌓이면서 달라진 점이 또 있나요?
공간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제 일은 대부분 2~3개월 안에 해내야 하거든요. 초기에는 기간이나 예산에 대한 감이 부족해서 간극이 너무 크게 벌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한이나 예산, 콘셉트를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고 최대한 조율한 뒤 작업에 들어가는 편이죠.
공간의 시대에 발 맞춘 비스포크 가구
길종상가의 맞춤 제작 방식은 요즘 디자인계에서 주목하는 비스포크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사용자 혹은 소비자들에게 어떤 의식 단계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영향권에 있지만 한 10년 전부터 30~40대를 중심으로 미드센추리 모던 가구가 크게 유행했잖아요. 해외 유명 디자이너 작품으로 공간을 연출하는 붐이 일었죠. 좀 더 젊은 층은 ‘오늘의집’에 나오는 스타일로 공간을 꾸미고 싶어 하고. 어찌 보면 유행에 편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개중에는 내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국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채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유명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말이죠. 자기만의 취향과 관점을 관철하는 것인데 이런 문화가 점차 생활화될 거라고 봅니다. 맞춤 정장처럼 우리 집의 비어 있는 저 구석에 딱 맞는, 내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제작해서 들여놓았으면 한다는 것이죠.
디자인, 미술 등 닮은 듯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필요로 길종상가를 찾는다는 점도 재미있어요.
제가 두 분야의 중간 어디쯤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디자인 쪽에서는 좀 특이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고, 미술계에서는 작품 활동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죠. 특히 순수 미술 쪽에서는 저처럼 의뢰받아 기능이 있는 무언가를 제작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많이 보편화됐지만 제가 처음 활동할 때만 해도 전시장에서 공간을 디자인하거나 집기를 제작하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았거든요. 좌대 위에 작품을 올려 배치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저처럼 활동하는 사람이 나타나니 아무래도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죠. 상업 활동과 결부되었다는 점에서 터부시하는 시선도 물론 있지만, 졸업을 앞둔 미대생들에겐 ‘저렇게 활동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 같기도 해요.
길종상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제작을 기반으로 하는 팀은 있었어요. 대부분 초기에는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합판을 주로 쓰다가 점차 스튜디오나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다양한 소재와 제작 방식을 택하더군요.
요즘에는 소재도 합판보다 묵직해지고 전체적으로 작업이 볼드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흐름이라 저는 오히려 어떻게 해야 굵은 줄기에서 비켜 나갈지 고민합니다.
사진 김동규 자료 제공 소다미술관
디자인 협업 김재환 자료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그렇다면 요새 길종상가는 어떤 소재에 ‘꽂혀’ 있나요?
글쎄요. 저도 다른 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합판, 포마이카, 아크릴, 금속 순으로 다루는 소재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특정 소재에 천착한 적도 있고. 하지만 이제는 소재에 대한 집착이 좀 덜어진 것 같습니다. 어떤 재료든 적재적소에 맞게 쓰고 잘 매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길종상가의 작업이라고 했을 때 으레 떠오르는 것, 기대하는 것을 오히려 배제하려고 해요. 사선이 많다거나, 컬러풀하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이번 신작들도 컬러를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사용한 나무도 자세히 보면 수종이 다양하고, 금속도 처리 방식을 조금씩 달리해서 변주를 주었죠.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소재뿐 아니라 제작 방식도 늘 고심해야 할 것 같아요.
여느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예산과 제작 일정이 허락된다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려고 해요. 물론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제 방식으로 소화하려고 애쓰죠. 예를 들어 〈커피사회〉전의 경우 공간 입구를 장악해달라는 제안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단을 높이 쌓고, 패브릭 커튼에 주름을 넣고, 간접 조명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작년에 공공디자인페스티벌 주제전에 참여했을 때는 같은 공간에서 전시하는 다른 작가들을 보고 방향을 설정했어요. 당시 라인업 대부분이 디자인 베이스이다 보니 모던하고 깔끔한 결과물을 만들어 올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달리 파라솔과 선풍기 같은 기성품, 오브제를 섞어서 설치미술 같은 작품을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길종상가의 디자인에 어느 정도 키치한 유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에르메스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쇼윈도를 수년째 작업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사실 에르메스라는 브랜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유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요. 실제로 에르메스 쇼윈도 프로젝트를 위해 아시아 워크숍에 참여해보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키워드가 ‘유머’, ‘수작업’ 그리고 ‘작가 정신’입니다.
재미있네요. 워크숍에서 에르메스는 주로 어떤 가이드를 주나요?
일단 에르메스가 정한 다음 시즌의 큰 주제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여러 레퍼런스를 제공하는데 디자인보다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많이 보여줘요. 이 브랜드가 작가들의 생각과 작업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얼마나 존중하고 좋아하는지 느껴지더군요. 주제는 동일하지만 참여 작가마다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양하죠. 이처럼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브랜드이기에 작가 마인드가 있는 창작자를 선호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포맷으로 글로벌 매장의 쇼윈도 디자인을 통일하는 일반 브랜드와는 다르죠.
사진 김상태 자료 제공 에르메스 코리아
국내 제작자 문화는 개성 있는 독립 서점이나 F&B 문화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이런 열기가 한풀 꺾였다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프로젝트의 양 자체가 줄진 않았나요?
걱정하는 것과 다르게 코로나19가 유행한 첫해에만 조금 힘들었고 이후로는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금방 회복했습니다. 최근에는 오히려 그동안 억눌렸던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욕구가 더 폭발한 것 같아요. 이런 경향은 성수동이나 을지로3가 근처만 가도 금세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인테리어의 감도나 수준이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습니다. 공간을 소비하는 층이 넓어지고, 웹상에서 레퍼런스와 노하우가 빠르고 쉽게 공유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죠. 인스타그램상에서 아예 특정 공간을 따로 모아 소개하는 인플루언서까지 등장했잖아요. 이것 역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길종상가도 가구나 집기 중심에서 인테리어로 영역을 확장하는 게 보여요. 길종상가의 공간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에게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듯 저도 저만의 색깔이 있고, 그걸 좋아하는 클라이언트가 의뢰한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림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이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공간 전체에 일관된 콘셉트를 부여하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꼼꼼하게 손대는 것도 제 공간의 특징입니다. 한때 상업 공간에서 노출 천장이 트렌드인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예를 들어 지난해 오픈한 보스베이글웍스는 3단 우물천장을 적용했는데 정성 들인 몰딩과 아름다운 벽지로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어요. 현재 작업 중인 LP 바는 LP의 소리골을 공간으로 확장해 천장과 벽의 시각적 통일성을 부여했고요. 이 밖에도 최근 작업한 카페 두 곳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