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경험을 확장하는 전시장의 바깥 고리

지금 전시 디자인에 주목하는 이유

뮤지엄 안에서 관람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아닌 곳의 구분은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추세다. 개방형 수장고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 중이고, 아카이브실이나 보존실 등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공간이 오픈형 전시라는 이름으로 개방되고 있다. 건축가,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로비 환경을 개선하고 도서관을 개편하는 등 오늘날 뮤지엄은 열린 공간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관람 경험을 확장하는 전시장의 바깥 고리
Ossip van Duivenbode ©Depot Boijmans Van Beuningen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
Depot Boijmans Van Beuningen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보이만스 판뵈닝언 뮤지엄은 1849년 개관 이래 약 1700명의 컬렉터에게 기증받은 15만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렘브란트, 반다이크, 모네, 세잔, 고흐, 칸딘스키, 달리, 마그리트 등 유명 화가뿐만 아니라 마우리치오 카텔란, 올라푸르 엘리아손 등 현대 작가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엄청난 양의 작품에 비해 전시실 규모는 한정적인 에 그동안 전체의 8%에 불과한 작품만 공개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2021년 개방형 수장고를 콘셉트로 한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을 개관했다. 39.5m 높이의 원형 건축물은 MVRDV 설계로 거울 처리를 한 유리 패널로 외관을 마감해 주변 풍광을 반사한다. ‘데포depot’는 네덜란드어로 창고를 의미한다. 이곳은 온습도 환경이 각기 다른 다섯 가지 타입의 수장 시스템을 갖췄다. 이에 따라 금속, 플라스틱, 유기물/무기물, 흑백/컬러 사진 등 카테고리별로 최적화된 환경에서 작품을 보존한다. 일반 뮤지엄과는 달리 기획전은 열리지 않는데 내부 공간을 걷는 것만으로도 관람 경험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보존 처리, 작품 보수 등 수장고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도 있다. 이때 계단과 엘리베이터는 이 모든 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다. 한편 지난 9월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 기간에 여성복 프랑콩Francon의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긴 계단 덕분에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런웨이 장소가 되었다. 이처럼 기획전은 없지만 루프톱 요가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람객을 유인하고 있다. 개관 이후 1년 동안 총 25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boijmans.nl/depot

디자인 MVRDV, mvrdv.nl

©Diller Scofidio + Renfro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V&A East Storehouse
런던 동부는 부촌이 밀집한 서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어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부동산 개발과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이 동부에 둥지를 튼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데 그곳에 V&A 이스트가 개관한다는 소식이다. 개방형 수장고 콘셉트의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2024년, V&A 이스트 뮤지엄은 2025년 각각 완공을 앞두고 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2018년 공모에서 당선된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Renfro가 설계를 맡았다. 이들은 관람객이 V&A 컬렉션의 심장부에 도달한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다. 건물 중정을 비워 개방감을 확보한 덕분에 이곳에 소장하는 오브제 25만여 점과 아카이브 917점을 어디론가 대여하거나 보존 처리, 촬영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한편에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카우프만 오피스를 실제 사이즈로 재현하는 등 디자인사에서 의미 있는 공간도 옮겨놓을 예정이다. vam.ac.uk

디자인 Diller Scofidio+Renfro, dsrny.com

©이주연

포도뮤지엄 라운지
제주도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이 지난 11월 라운지를 새롭게 오픈했다.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개방적 공간을 추구하는 포도뮤지엄의 가치를 알리는 전초기지다. 공간 디자인을 맡은 마음 스튜디오는 제주도 전통 가옥의 지붕을 모티브로 포도호텔을 건축한 이타미 준을 떠올리며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제주도 초가지붕이 강풍에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격자 모양으로 묶은 집줄처럼 라운지 가구에도 둥그스름한 외형에 일정한 간격으로 라인을 만들었다. 컬러를 옐로로 택한 이유는 제주도의 갈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전시를 관람한 이들이 편안하게 머무르며 독서와 휴식을 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공간 디자인 마음 스튜디오, maumstudio.co.kr

Texture on Texture ©Tectonics Lab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지난해 12월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가 문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수장고였던 공간을 사용자 친화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적용해 도서관으로 리뉴얼한 것이다. 지금까지 박물관에서 발행한 전시 도록 전권을 살펴볼 수 있다. 지난 3월 5일까지 이곳에서는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특별전의 일환으로 작품과 함께 금령총 관련 도서 30여 권을 서가에 진열하기도 했다. 디자인을 맡은 이화여자대학교 김현대 교수(테크토닉 랩)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상징적이면서도 현대적 미감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기둥에서 보, 동자주, 서까래로 이어지는 전통 건축의 목구조 형식을 재해석해 공간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확장시켰다. 한편 딱딱한 열람실 의자 대신 안락한 소파를 배치해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공간 디자인 김현대, tectonicslab.com

서울공예박물관 공예아카이브실
서울공예박물관 전시2동 3층에 자리한 공예아카이브실은 평소 디자인 아카이브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다. 박물관이 소장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입수한 각종 아카이브를 보관하는 곳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개방형 수장 공간 콘셉트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공예 도면과 도안, 도구, 사진과 필름, 재료, 각종 문서까지 체계적으로 아카이빙되어 있다. 아카이브실 내부에는 소규모 기획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데 오는 5월 26일까지 소목장세미가 최승천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영감의 열람실〉전이 열린다(95쪽 참고). 한편 아키비스트가 자료를 보존 처리하는 모습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다. 아카이브실 브랜드 디자인은 오디너리피플, 기록물 보존 서가와 열람 공간의 가구 디자인과 설계는 레어로우가 맡았다. 슬라이드 형식으로 제작한 서가는 큰 힘 들이지 않고 필요한 자료를 편리하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모듈 시스템을 적용한 다목적 보존 서가는 크기가 제각각인 아카이브를 수납하기에 적합한 솔루션이다. craftmuseum.seoul.go.kr

가구 디자인 레어로우, rareraw.com
브랜드 디자인 오디너리피플, ordinarypeople.co.kr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미술 전문 자료실 ‘아트라이브러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지난 2월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아트라이브러리를 재개관했다. 기존 공간보다 6배나 커진 이곳은 미술 전문 서적과 일반 대중서, 어린이 도서까지 1만여 권의 장서를 갖췄다. 통창을 통한 자연 채광으로 쾌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에 개방형 좌석과 독립형 좌석을 적절하게 배치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신규 MI와 조화를 이루도록 아트라이브러리 사이니지를 개발한 크리스 로와 그래픽 스튜디오 구트폼은 지식 정보 플랫폼으로서 아트라이브러리의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에 자음 ‘o(이응)’을 확대해 ‘연결’과 ‘유연함’이라는 키워드를 담았고, 세로쓰기를 적용해 서가에 쌓인 책을 형상화했다. sema.seoul.go.kr

그래픽 디자인 크리스 로, chrisro.kr /구트폼, guteform.kr

©노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미술도서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2021년부터 건축가와 협업해 노후된 시설을 리디자인하는 ‘MMCA 과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와 무관하게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개선 작업이 이뤄져 눈길을 끈다. 지난 2월 리뉴얼을 마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미술도서실이 그 주인공. 이 프로젝트는 미술도서실에 근무하면서 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느낀 최현아 사서의 발의로 시작됐다. 양질의 도서 자료를 갖추고 있음에도 존재감이 떨어져 출입하는 이가 드물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간 디자인을 맡은 푸하하하프렌즈는 도서관 앞 복도와 숙직실을 로비 공간으로 개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미술도서실의 첫인상이 로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내부에는 햇빛을 최대한 유입해 따뜻하고 환한 느낌을 주고자 공간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모두 헐고 투명 창을 달았다. 공간이 보다 넓어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날렵한 외형의 책장은 레어로우가 디자인했다. mmca.go.kr

공간 디자인 푸하하하프렌즈, fhhhfriends.com
가구 디자인 레어로우, rareraw.com
사이니지 그래픽 디자인 오혜진, ohez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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