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 박이랑 팀장

대형 유통업에 디자인 DNA를 이식하다

MZ세대를 겨냥한 더현대 서울의 놀라운 시도. 그 뒤에 숨겨진 주역, 현대백화점 브랜드전략팀 박이랑 팀장의 이야기.

현대백화점 박이랑 팀장

2010년 도쿄 긴자에 자리하고 있던 세이부 백화점 유라쿠초점이 문을 닫으며 일본 열도는 물론 국내 유통업계도 일순 충격에 휩싸였다. 이전에도 인구 감소로 지방 백화점이 줄줄이 백기를 들긴 했지만, 일본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이 폐업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리테일 아포칼립스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 뉴욕 메이시스, 런던의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와 데번햄스 등 시대를 주름잡던 백화점들이 문을 닫았고, 백화점 천국이었던 일본은 20여 년 만에 그 수가 40%나 감소했다.


온라인 커머스의 약진에 팬데믹까지 겹치며 위기론을 넘어 백화점 종말론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모두가 고배를 마신 건 아니다. 특히 2021년 오픈한 더현대 서울의 성과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MZ세대를 정조준한 콘셉트, 관행을 깨뜨린 공간별 포지셔닝, 무엇보다 감각적 디자인과 브랜딩 전략은 이 점포의 성공 방정식을 완성했다. 대형 유통업이 브랜드의 저력을 긍정했다는 것만으로도 프로젝트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현대백화점 브랜드전략팀의 박이랑 팀장은 이 놀라운 성취의 숨은 주역이다. 최근에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어 백화점을 실험 무대로 삼고 있는 그는 국내 디자인 생태계와 백화점 사이에서 근사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 디자이너가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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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켈리타앤컴퍼니를 거쳐 2009년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헤르쯔’를 열었다.
2014년 현대백화점의 비주얼 디자인을 총괄하는 아트 디렉터로 합류해 현재 브랜드전략팀장을 맡고 있다.
지금 돌이켜봐도 현대백화점에 합류한 것은 이례적이었어요. 스튜디오 헤르쯔로 그래픽 디자인 신에서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상황이었잖아요.

사실 2013년에도 한 차례 제안이 있었어요. 정중히 거절했는데 이듬해 다시 연락이 오더군요. 사실 저도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당시로는 꽤 이르게 스튜디오를 시작했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독립하다 보니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서 유학을 고민 중이었거든요. 두 번째 제안에 ‘이게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합류를 결정했죠.

이제 스튜디오 헤르쯔 실장보다 ‘현대백화점 박이랑’이라는 타이틀이 더 익숙해요. 자신도 그렇게 느끼나요?

글쎄요.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탓인지 솔직히 제 배경과 정체성을 인하우스나 디자인 스튜디오로 갈라놓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인하우스에서도 좋은 뜻을 가지면 디자인계나 사회적으로 더 크게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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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 산스.
현대백화점 전용 서체로, 획 끝의 상승하는 곡선과 개성 있는 상투 형태에서 손글씨의 미감이 느껴지는 고딕 계열 서체다. thehyundaifont.com 

프로젝트 총괄 박이랑 
아트 디렉션 이현송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이현이, 이현송, 차문정 
글꼴 제작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기획 및 디렉팅 구모아 
글꼴 디자인 구모아·김주경·김승환(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이노을·로리스 올리비에(lo-ol Type Foundry) 
검수 노은유, 아이린킴, 이아리, 이재민, 정희연, 황석원 
웹사이트 제작 및 개발 1-2-3-4-5 정다영, 최건혁 
영상 기획 및 제작 1-2-3-4-5 손아용, 이지수 
사운드 디자인 Millic
지금도 틈틈이 불거져 나오지만, 합류 당시 백화점 위기론이 불거져 나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맞습니다. 초기에 팀 세팅에도 애를 많이 먹었어요. 구직자들에게 백화점 디자이너가 그다지 전도유망한 업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거죠. 덕분에 오기가 생기더군요.(웃음) 대형 유통업의 위기론은 실재하지만, 역사적으로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안정적이고 든든한 환경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 이런 경향이 강한데 빔 크라우얼Wim Crouwel의 스테델레이크 뮤지엄이나 알렉세이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의 〈하퍼스 바자〉처럼 인하우스가 디자이너에게 오랫동안 꾸준히 좋은 작업을 남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것이죠. 디자이너의 지속 가능성은 개인적 화두였기 때문에 여러 염려가 있었음에도 현대백화점행을 택했던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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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백화점 브랜드 비주얼 2022 가을 캠페인.

크리에이티브 디렉션 박이랑 
아트 디렉션 변우석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김수은 
프로젝트 어시스트 김민송 
그래픽 모티프 & 북 디자인 이재영(6699press) 
사진 최랄라
그 선택이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보나요?

일단 보는 눈이 넓어진 게 가장 큰 것 같아요. 실험적이고 아티스틱한 시각물에 여전히 깊은 애정이 있고, 장인 정신을 갖고 한 분야를 탐구하는 디자이너들을 존경하지만, 당시 마음 한편에 ‘많아야 몇천 명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만 계속해도 괜찮을까?’라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백화점은 절대 다수를 대상으로 한 디자인 스킬을 훈련하는 데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어요. 실제로 합류 후 몇십만원 짜리 광고 프로젝트부터 수억 원짜리 예산을 집행하는 촬영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가 대규모 프로젝트 전체를 경험하기는 어렵잖아요.

하지만 기회에는 그만큼 책임도 따르죠. 기업은 수많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고 그들을 설득하는 게 인하우스 디자이너에게는 숙명과 같습니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디자인 전문 회사 입장과는 또 다른 차원이죠.

사실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긴 합니다. 그 질문의 저변에는 미묘한 두려움도 깔려 있다고 봐요. 솔직히 그런 어려움이 없진 않아요. 프로젝트의 본질 이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하지만 소모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고 그만큼 배우는 점도 있어요. 지금도 일하면서 종종 ‘내가 이전에는 너무 나이브했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스튜디오 운영 시절에는 미감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나머지 시대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든 인하우스에 합류하든 관계없이 디자이너가 자기가 속한 세계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중요한 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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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 서울. 박이랑과 그의 팀은 공간 네이밍을 비롯한 브랜드 전략을 총괄했다.
당시 스튜디오 fnt, 홍은주·김형재, 유명상 등 다수의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가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합류 후 현대백화점의 가장 큰 변화는 국내 디자인 생태계와의 결속력 강화 같아요. 좋은 작업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현대백화점 프로젝트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의도된 결과였나요?

사실 너무나 의도했죠.(웃음) 에이전시에서도 근무하고, 스튜디오도 운영해보고, 인하우스 디자이너로도 일해보면서 늘 꺼림칙한 점이 있었어요. ‘왜 수억 원이 오가는 프로젝트는 금발의 파란 눈 디자이너가 진행해야 하는가?’였죠. 제가 스튜디오 출신이다 보니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좋은 작업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동료들을 많이 알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관행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많은 디자인 스튜디오가 기꺼이 프로젝트에 동참해주었어요. 일종의 모멘텀이 되었다고 말해주는 디자이너도 많고요.

결론적으로 성공했지만 사실 꽤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기업에서 해외의 스타 디자이너를 선호하는 것은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결정권자를 설득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디자인이 어느 정도 주관적인 부분이 있는 만큼 디렉터로서 임원진을 설득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 아찔한 판단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패기가 넘쳤는지 ‘리스크 테이킹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직접 실무를 해봤기에 그런 생각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비전도 명확하고 콘셉트도 확실하니 만에 하나 파트너의 결과물이 미흡하더라도 나와 내 팀원들이 커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겁이 없었다고 할까요?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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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 대구. 문화와 예술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디자이너가 전하는 똑똑한 협업과 브랜딩

스튜디오 fnt나 마음스튜디오처럼 수년에 걸쳐 실력을 입증한 회사뿐 아니라 페이퍼프레스나 OYE처럼 당시 떠오르던 디자인 스튜디오와도 과감히 협업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늘 적재적소에 파트너를 기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도 누가 어떤 작업을 잘하는지 분석적으로 관찰하고 공부하는 편입니다. 저는 올림픽 개·폐막식을 자주 비유로 들어요. 그 몇 시간에 달하는 행사를 콘텐츠와 디자인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획력과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죠. 어떤 기획을 하고, 실행 단계에서는 어떤 팀이 필요하며, 예산은 어떻게 투입해야 하는지부터 전개 방식이나 참관객의 반응까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게 바로 국력 같거든요. 디자인 프로젝트에도 이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3년짜리 프로젝트라고 하면 이것이 결과로 나오기까지 어떤 프로세스가 필요한지, 어떤 파트너가 필요한지 계산하고 진행하는 체계가 내재화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이 프로세스를 정착시키는 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크레디트 정리부터 결과물 사진 공유까지 한번 시스템이 세팅되고 나니 파트너 디자이너들과 일하기 훨씬 수월해졌어요.

그간 진행한 수많은 협업 사례 중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너무 많지만 아무래도 스튜디오 fnt와 진행한 BI 프로젝트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현대백화점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각인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프로젝트였고 대중의 호응도 좋았죠. 현대백화점의 캐릭터 ‘흰디’를 그린 독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크리스토프 니만Christoph Niemann도 있습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비즈니스 파트너로 교류하기는 했지만, 창작하는 동료로서 해준 조언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기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스스로 더 이상 크리에이티브해지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것을 느꼈다고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자기 삶과 환경을 크리에이티브해질 수밖에 없도록 세팅하는 것으로. 집과 작업실의 거리는 도보 15분으로 정하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나 이메일을 쓰는 시간 외에는 철저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식이었는데, ‘너도 언젠가 크리에이티브의 한계가 느껴지면 이런 시도를 해봐’라고 말해주었어요. 흥미롭고 고마운 조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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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백화점의 캐릭터, 흰디를 활용한 사례.
백화점은 업의 특성상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이미지가 쉽게 휘발될 수밖에 없다.
흰디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스토리텔링을 축적하는 장치로 기획했다.
캐릭터 초기 디자인 도안은 크리스토퍼 니만이 맡았지만, 최초 기획과 이후 빌드업은 현대백화점 내부에서 진행했다. 

디자인 크리스토프 니만
해외 디자이너들과도 여전히 활발하게 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백화점에 합류하지 않았으면 아마 몰랐을 것이 몇 가지 있어요. 국내 디자인 생태계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경험적 한계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번은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토닉Thonik과 협업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희는 아주 큰 스케일의 공간이나 공공 디자인 영역에서 그래픽을 힘 있게 다뤄본 팀이 필요했는데 국내에는 이런 특수한 경험을 해본 팀이 없더군요. 반면 네덜란드는 원래 그래픽이 강한 나라일 뿐 아니라 건축가와 초기 기획 단계부터 긴밀히 협업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보편화되어 있어요. 경험적 한계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산업 구조 내지 협업 구조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반적으로 그래픽 디자이너는 공간 프로젝트의 가장 말미에 합류해요. 공간에 대한 충분한 사전 이해나 협의 없이 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런 관행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영국의 사진작가 팀 워커Tim Walker와 일할 때도 많은 것을 느꼈어요. 무엇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수많은 스태프가 자기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업무에 회색 지대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협업 과정에서 보고 배운 장점을 조직 내부에 도입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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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100. 연간 발생하는 폐지는 약 8700톤에 달한다.
이것을 재생지로 만들어 쇼핑백을 제작하고, 자원 소비와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게 프로젝트의 목표다.
지난해 2월 공개한 이래 소셜 미디어상에서 많은 화제를 낳았고, 2022 코리아디자인어워드 브랜드 부문과 iF 디자인 어워드 패키지 디자인 부문에서 위너로 선정됐다. 

디자인 현대백화점 브랜드전략팀 
협업 서울대학교 DISCO 랩(지도 교수 이장섭)
더현대 서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드문드문 MZ세대를 겨냥한 백화점들의 전략이 보이기는 했지만, 더현대 서울은 극단까지 밀어붙인 느낌이었어요.

당시 회사에서 제 역할이 조금 바뀌었어요. 디자인을 총괄하는 아트 디렉터로 시작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브랜드 전략을 책임지게 됐죠. 남양주의 현대프리미엄아울렛에 스페이스원이라는 새로운 네이밍과 브랜드 전략을 이식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프로젝트가 더현대 서울이었는데 당시 제 역할은 이 스토어의 포지셔닝, 즉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톤앤매너로 버벌과 이미지를 구사할지 전략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100% MZ세대를 겨냥한 전략을 주장했는데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통적으로 백화점의 주 매출은 40~50세대에서 나오는 데다 백화점 위치가 여의도이다 보니 젊은 층을 공략하자는 의견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어떤 전환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더 이상 백화점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시설을 잘 갖춰놓으면 기성세대는 절로 이곳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짜 초점을 맞춰야 할 대상은 백화점에 관심이 적은 MZ세대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서울’이었어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인 콘텐츠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이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런 광범위함과 애매함이 존재하죠. 그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질문도 받았고요. 그러나 이런 서울의 면면이 저는 해체주의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되레 일관성 없는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전통적인 백화점 그래픽에서 보기 어려운 결과물이었죠. 솔직히 오픈 당시 저희가 완벽한 밑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더현대 서울이 맡아야 할 역할을 설명하고 콘셉트를 명확하게 하자 놀랍게도 내부 직원들이 여기에 부응해주더군요. 가장 트렌디하고 힙한 콘텐츠를 유치하기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며 명확한 네이밍과 방향성이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미술관에서 제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작은 규모의 미술관도 소통이 쉽지 않은데 이렇게 스케일 큰 플랫폼이 이것을 해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더군요. 저는 콘셉트를 명확히 한 게 비결이었다고 봐요. 작은 과녁을 하나 만들었는데 내부 관계자들이 여기에 화살을 적중시키고 있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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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디자이너들의 모임 ‘코드 파인딩 클럽Code Finding Club’의 그래픽 아이덴티티 개발. 2019년에 진행한 개인 작업이다.
결국 브랜딩의 힘이라는 것이군요. 확실히 요즘은 모두가 브랜딩을 외치는 시대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브랜드의 효력이 실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어요.

저도 예전에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어요. ‘브랜딩이라는 거 결국 다 말장난 아냐?’ 아마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확실히 효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도의 비즈니스 전략이라는 것이죠. 사실 제가 수립하는 브랜딩 프로젝트는 장기 비전에 속해서 당장 수익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봤을 때 브랜딩은 엄청난 기여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든 브랜드든 호감을 갖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대중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응원하게 된다는 뜻이죠. 현대백화점 대구가 더현대 대구로 새롭게 포지셔닝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브랜드에서 낙수 효과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쟁 백화점과 각축전을 벌이는 경북 상권에서 회사가 브랜드의 힘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무적입니다.

프로젝트 100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형 유통업체에서 쉽사리 하지 못한 시도라서 더 인상적이었죠.

유통업에서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분 중 하나가 운송이고, 그중에서도 종이 박스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죠. 저희도 어느 정도 이 점을 예상은 했지만, 조사해보니 그 양이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운 가설을 훌쩍 뛰어넘었죠. 프로젝트 100의 당위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지속 가능성은 일하는 방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봐요. 인식을 바꾸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실질적으로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서는 세팅값부터 바꿔야 했어요.

그다음 한 일은 폐기물을 추적하는 것이었는데, 고무적인 것은 저희가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유관 부서에서도 ‘또 다른 폐기물로 뭐가 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것과 고객이 버리는 것을 추적해서 새롭게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시그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타 백화점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론칭하기 시작했죠. 시스템을 바꾸는 게 이 프로젝트의 본질이었고, 지금은 다음 단계를 검토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종이라는 물성 자체를 생산할 때나 종이를 성형할 때 디자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을지 살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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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작업으로 진행한 달력 프로젝트.
18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백과사전(〈Encyclopedie, ou Dictionnaire Raisonne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에서 영감을 받았다.
박이랑은 지금도 꾸준히 개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타이포잔치에서 선보인 작품 ‘기업의 유령들’을 즐겁게 감상한 기억이 있습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게 흥미로워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고 싶었어요.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운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을 향한 격려와 응원이기도 했죠. 제 개인적으로 노동 시장의 유연화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싶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모든 디자이너가 발 벗고 나설 필요가 있다는 입장인데, 조직에 소속된 디자이너라도 좀 더 유연하게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기업에 속하든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든 구분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활동하는 문화가 형성된 곳도 있잖아요. 저는 이게 개인뿐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도 윈윈하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스튜디오나 인하우스에 소속되어 주어진 일만 하면서 60~70대까지 행복하게 작업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봐요. 자꾸 여러 방식으로 문을 두드리며 기회를 만들고 경험을 쌓는 게 롱런하는 비결 같습니다. 그게 꼭 디자인일 필요는 없어요. 외국에서 라이터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도 많잖아요. 그게 무엇이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죠.

그렇다면 디자이너 박이랑에게는 어떤 활동이 있나요? 당장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연마시키는 장치 말이에요.

음악도 있고 영화도 있죠. 음악의 경우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음악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감상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크레디트를 보거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할 때 디자인 신의 상황을 자주 대입해봐요. 영화를 보면 감독은 감독대로, 배우는 배우대로 존중받잖아요. 그들은 또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스태프들을 챙기려고 노력하고. 저는 이런 문화가 아직 디자인계에 정착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집단 창작에서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최상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문화적 역학을 관찰하고, 이런 분위기가 정착된 디자인 신을 상상하면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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