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만난 7인의 디자이너가 만든 전시
디자인 컬렉티브 OBI 최초의 디자인 전시, <그린하우스 이펙트>
디자인 컬렉티브 'OBI'가 첫 번째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스위스 로잔예술대학교(ECAL)를 졸업한 이들이 선정한 주제는 바로 '꽃병'.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개성 넘치는 일곱 가지 디자인 제품을 만나보자.
서울 연희동에 자리한 디자인 스튜디오 BKID의 지하 전시공간에서 디자인 컬렉티브 OBI의 첫 번째 전시가 지난 12월 1일부터 오는 12월 7일까지 열리고 있다. OBI는 스위스 로잔예술대학교(이하 ECAL)를 졸업한 현역 디자이너 7명(김대중, 김유성, 김지영, 송동환, 이승목, 정지산, 칼슨 홍)으로 구성된 디자인 컬렉티브다. OBI라는 이름은 ECAL 재학 당시 재료와 공구를 구입하기 위해 자주 들리곤 했던 스위스 흐넝의 하드웨어 숍 이름을 가져왔다. 재료와 공구를 사는 상업 공간을 넘어 창작과 협업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OBI처럼 이들은 실용성과 창의성을 유쾌하게 엮어내는 작업을 지향한다.
OBI가 해석한 그린하우스 이펙트는?
디자인 컬렉티브 OBI의 첫 번째 전시에서 디자이너들은 일상 소재인 꽃과 화병을 각기 다른 디자인적 사고와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공의 경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온실효과라는 뜻을 지닌 전시 제목 <그린하우스 이펙트(Greenhouse Effect)>에서부터 현대 사회 속 환경 이슈를 상기시키고자 한 의도가 잘 드러난다.
한편, 디자이너들은 이를 단순히 환경적 관점에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연과 디자인, 인간의 감각이 만나는 장으로서 창작 활동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키우고 발전시키는 온실과도 같은 공간이라는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일까? 전시 공간에 대한 콘셉트부터 남다르다. 전시장 한가운데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고 그 안에 참여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제품이 놓여 있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과는 다른 공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다. 온실의 습도를 연출하기 위해 가습기를 가동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BKID 연희 지하 전시공간은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의 공간인 만큼 차갑고 기능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전시의 시노그래피를 담당한 김지영 디자이너는 “산업 디자이너들이 선보일 법한 뻔한 전시는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공간 연출을 통해 OBI는 전시장을 창의성이 피어나는 은유적 온실로 탈바꿈했을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자연의 순환과 생명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7가지 시선, 7개의 디자인
각자 다른 도시에서 디자이너로서 살아가는 OBI 멤버들은 약 1년간 전시를 준비했다. 과거 스위스 에칼에서 학생들끼리 디자인 전시를 만들어 본 경험들 덕분에 하나의 주제로 디자인 전시를 만드는 것이 마냥 어렵게 생각되진 않았다고 한다. 꽃과 화병이라는 소재도 다소 밋밋한 주제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만큼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OBI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화병 속에 놓이는 순간 특별한 이야기를 품게 되는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꽃을 꽂는가? 꽃이 놓이는 공간은 단순히 장식적인 것인가? 혹 아니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기시키는 창인 것일까? 등이 그 질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디자이너 각자의 개성을 반영한 7가지 디자인 제품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ECAL에서 제품 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친 김유성 디자이너는 꽃을 담고 다닐 수 있는 꽃 가방을 디자인했다. ‘레이어드 폼(Layered Form)’이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언제 어디서나 꽃과 함께할 순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물을 이용해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어 원하는 모양으로 성형했는데 이는 웻 몰딩(Wet Molding)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가죽 제품에서 보기 드문 입체적 형태를 구현한 점, 그리고 가죽 내부는 왁스를 사용해 몰딩 처리를 해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 옆에 놓인 ‘Picking Box’는 ECAL에서 럭셔리 크래프트맨십 석사 과정을 마친 김지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품이다. 꽃을 채집하고 돌보는 툴 박스와 일상 속 오브제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디자이너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저서 「월든」에서 저자가 자연 세계와의 깊은 연결에 뿌리를 둔 삶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영감을 얻었다. 자연을 단순히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감상하며 인간과 생태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3D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 틀을 완성하고, 산책 중에 획득한 나뭇가지를 손잡이로 사용하는 등 기술과 공예의 결합과 조화도 주목할 점이다.
한편 정지산 디자이너는 꽃 한 송이를 위한 화병을 디자인했다. 꽃을 지지하는 줄기와 물을 담는 그릇으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제품의 이름은 ‘fountain’. 그 이름처럼 분수를 연상시킨다. 그는 화병 자체의 형태보다 여백이 주는 평온함을 강조했는데 꽃과 물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이승목 디자이너는 세라믹을 활용한 화병 ‘Round’를 선보였다. 흥미로운 건 화병 옆면에 동그란 구멍을 뚫었다는 점이다. 꽃의 모양, 색상, 길이에 따라 꽃꽂이를 다채롭게 연출할 수 있다. 평범한 꽃도 개성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인 스튜디오 베이직먼트의 김대중 디자이너가 소개한 두 가지 제품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화병을 돌려 꽃의 기준에 맞추는 ‘Screw Vase’는 자연을 자신에게 맞추는 이들에게 자신의 기준을 자연에 맞출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하나의 캐릭터처럼 표현한 ‘Speaking Vase’는 입을 벌려 말을 하는 듯한 형상도 눈길을 끈다. 어떤 말을 던지느냐에 따라서 쓰레기통이 되기도, 혹은 화병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송동환 디자이너는 상식처럼 굳어진 행동에 질문을 던진다. 화병 속 물을 갈아주기 위해서 화병을 기울이는 번거로움을 꼭 겪어야 하는가? 그는 액체를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옮길 때 파이프나 튜브를 통해 중력과 압력차를 활용해 액체를 이동시키는 ‘사이펀 효과(Siphon effect)’를 화병에 적용했다. ‘Syphon Vase’는 사이펀 효과를 적용한 직관적 디자인 덕분에 꽃이 상하지 않고도 신선한 물로 교체가 가능하다.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돋보인다. 반면 칼슨 홍의 ‘Potential’ 시리즈는 정반대의 개념으로도 디자인이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리즈는 세 가지 제품으로 구성된다. ‘vase with wheels’, ‘vase with legs’, ‘vase in the box’는 꽃을 위한 화병 그 이상의 제품 가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롭고 신선한 시각임은 분명하다.
뻔한 디자이너 전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린하우스 이팩트>전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흥미로운 작품은 바로 김지영 디자이너가 제작한 AI 비주얼이다. 비닐하우스를 빠져나오면 마지막 관람 순서로 각 디자이너의 오브제를 바탕으로 제작한 AI 비주얼을 만날 수 있다.
김지영 디자이너는 패션과 뷰티 업계에서 인공지능 생성 기술을 활용한 비주얼 디렉터로도 활동 중인데 AI 비주얼을 통해 뻔한 디자이너의 전시를 벗어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패션 브랜드가 한 장의 캠페인 이미지를 통해 제품이 지닌 이야기에 고객을 몰입시키듯이 디자이너들이 상상했던 이야기를 비주얼로 풀어냈다. OBI 디자이너들마다 화병을 디자인할 때 상상한 이미지와 영감을 얻은 레퍼런스를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프롬프트를 작성하여 비주얼을 제작했다.
예를 들자면 정지산 디자이너의 제품 비주얼을 위해 프롬프트에 ‘A cylindrical object made of iron stands on the Uyuni Desert, photorealistix, high resolution’라고 입력했다. 이는 디자이너가 상상한 미니멀한 자연 배경과 홀로 서 있는 꽃의 이미지, 그리고 참고한 이미지 중 하나인 ‘우유니 사막’을 활용한 것이다. 이후 프롬프트에 따라 인공지능이 제작해 준 비주얼을 두고 디자이너와 소통하며 컬러톤을 맞춘 뒤 제품 이미지와 합성해 비주얼을 완성했다.
물리적인 제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품의 비주얼을 함께 감상하며 하나의 제품에 얽힌 다채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전시는 오는 12월 7일 토요일까지 열린다. 디자인 학교 중에서도 기업과 브랜드와의 협업에 적극적이며, 동시에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 교육으로도 잘 알려진 ECAL만의 디자인 미학부터 필드에서 활동하며 느껴온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갈증까지 디자이너의 뻔하지 않은 전시가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