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시대 미술의 지금,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
20인의 예술 세계를 만나다
청담동에 자리한 미술관 송은(SONGEUN)에서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이 열리고 있다. 본선에 오른 동시대 미술 작가 20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송은문화재단이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을 12월 17일부터 오는 2025년 2월 22일까지 선보인다. 송은미술대상 본선에 오른 작가 20인의 신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사운드 등 여러 매체를 아우른다. 올해 공모에는 총 598명의 작가가 지원했는데 지난 2월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오른 구나, 구자명, 김원화, 노상호, 박종영, 배윤환, 손수민, 송예환, 안유리, 얄루, 업체eobchae, 오묘초, 유아연, 이승애, 이혜인, 조재영, 진민욱, 최장원, 추미림, 탁영준 작가가 올해 송은미술대상전의 주인공이다.
송은미술대상이 특별한 이유는?
연말이면 어김없이 소식이 전해지는 <송은미술대상전>은 2001년 제정된 미술상이다. 송은문화재단 설립자인 故 송은 유성연 명예회장이 한국 미술 문화 발전을 위해 진행한 공익사업의 뜻을 기리고자 설립됐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상제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둔 송은미술대상은 초기에 공모제와 전체 심사 과정에서 외부 심사위원의 개별 심사로 운영해왔다. 이후 2011년 전시 형식의 최종 심사 단계를 추가하며 개편을 진행했고, 지난 2021년에는 기존의 전시 형식 심사 단계를 유지하되 국내 신진 작가 군이 지원할 수 있도록 기준 자격을 완화하고 본선 전시 참여 작가를 20인으로 확대하는 등 또 한 번의 개편을 단행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개편을 거듭해 기회의 문을 넓히고, 공정성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분명 눈길을 끈다.
본선에 오른 20인의 작가는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해 신작을 선보이고, 전시 기간 중 외부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대상 1인을 선정한다. 대상을 수상한 작가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상금은 물론 3년 이내 송은에서의 개인전 개최 지원, 송은문화재단과 까르띠에 코리아의 후원 아래 작품 2점을 송은문화재단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매입, 서울시립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 1년 입 등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창작자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편, 대상을 수상하지 못한 본선 작가들에게는 <송은미술대상전> 작품 제작비를 지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의 델피나 재단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할 자격을 부여하며, 선정된 1인에게는 12주간 델피나 재단 레지던시 활동을 지원한다. 매년 40여 명의 작가를 초청하는 델피나 레지던시는 국제적인 예술 플랫폼을 구축하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글로벌 아트신으로 활동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20인의 예술 세계를 만나다
<송은미술대상전>은 송은의 지하 2층 전시 공간부터 1층 로비와 2, 3층 전시장까지 전관에 걸쳐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본선에 오른 20인 작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송은이 주목한 20인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 면면을 살펴보자.
1층 로비에서는 최장원 작가의 신작을 가장 먼저 마주한다. 그는 건축과 미술의 경계에서 건축적 요소를 일시적으로 해체하거나 혹은 이에 내재된 조형성을 재맥락화해 장소의 의미를 확장하는 실험을 작품을 통해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행려자(行旅者)의 파빌리온: 일시성과 가벼움에 관하여>(2024)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다. 고대 신전의 기둥과 원시 오두막을 연상케하는 작품 외형은 태초의 건축을 상징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 속 건축을 환기하며 수평적인 상호작용을 이룬다. 건축이라는 주제 아래 신화적 상상과 동시대적 감각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Photo: STUDIO JAYBEE
2층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동선에는 개방형 오디토리움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는 탁영준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컨템포러리 댄스 필름 연작의 세 번쨰 작품 <월요일 날 첫눈에 똑떨어졌네>(2024)를 선보인다.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구전되는 유기적 구조를 안무적 맥락 위에서 변주한 작품이다. 노르웨이의 저술가 라스 뮈팅의 소설 「자매 종」(2019)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이야기, 기억, 공감으로 직조한 안무 조각들을 필름 속에 풀어냈다.
2층 전시장에서는 오묘초 작가의 <딱 걸린 진화의 현장>(2024)과 진민욱 작가의 신작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오묘초 작가는 도래할 세계의 종말과 인류의 범주를 벗어난 생태를 상상하며 파괴된 현실을 딛고 새롭게 자랄 생명의 서사를 소개한다. 아울러 직접 집필한 공상과학 소설에 기반해 조각, 설치, VR 영상 등을 활용해 작품에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의 작가의 전반적인 작품 제작 과정도 흥미롭다.
진민욱 작가는 고전문학의 키워드를 일상에서 채집한 이미지로 재구성해 소외된 주변 서사를 그려내는 작품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는 단가(短歌) 편시춘(片時春)을 토대로 작성한 자작시 ‘봄조각’을 신작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작시의 시어들은 4폭의 병풍 위로 흩뿌려지듯 안착하는데 전통적 소재 선택과 화면 구성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현대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2층 전시장 안쪽에는 구자명, 노상호, 업체eobchae 세 작가(팀)의 작품이 자리한다. 가운데에 놓인 구자명 작가의 신작 <소프트웨어 빼돌리기>(2024)는 북한의 선전 웹사이트 속 코드 구조를 알파폴드 및 유전체 브라우저와 같은 생물학적 방법을 거쳐 단백질과 DNA로 변환시켰다. 작가는 소프트웨어의 형태를 조각으로 물질화하는 작업을 이어왔는데, 이번 신작은 ‘자금 세탁’ 개념을 차용했다. 작품은 코드의 출처와 내용을 은폐하거나 재구성해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변환술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노상호 작가의 신작 <홀리-중력과 은총>(2024)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는 일상적인 감각을 ‘성스러움’으로 치환한다. 그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이 만든 글리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서로 호응하지 않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 눈길을 끈다. 그 옆으로는 김나희, 오천석, 황휘로 구성된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 컬렉티브 ‘업체eobchae’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신작 <d.raft>(2024)는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합의가 이뤄지는 방식과 종교 집단이 계시를 받아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상동성을 그려낸 그래픽 노블 작업이다.
2층과 3층 전시장을 잇는 복도에는 배윤환, 유아연 작가의 작품이 놓여 있다. <3시에 추는 춤>(2024)은 배윤환 작가의 작업으로 일상이 변칙과 우연으로 전개되는 비선형 소설과 닮았다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작가는 최근 지구를 인격화해 개인과 환경이 대등하게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이미지와 영상으로 담아낸다. 제주도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번 영상 작업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반복과 변주라는 두 축을 끊임없이 구르는 돌멩이와 두더지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유아연 작가는 개인의 특수성이 자본주의에 의해 기형적으로 상품화되는 과정 속 신체를 오브제로 배치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이어지는 작업 경향 속에서 신작 <Elevator>(2024)와 <Escalator>(2024)는 스크롤을 내려 데이터를 가소적 형태로 변환하는 ‘Scrolling’과 스크린 밖으로 미끄러져 물리적 창을 깨뜨리는 ‘Slipping’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제안한다.
3층 전시장에서는 조재영, 이혜인, 송예환, 추미림, 김원화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조재영 작가의 조각 설치 작업 <쌍둥이 정원>(2024)은 독특한 외형과 강렬한 붉은 색상으로 눈길을 끈다. 신체를 소재로 삼지만, 신체의 온전한 형태가 아닌 부분을 종이로 형상화했다. 변형과 변질을 반복하며 새로운 기관 또는 몸체로 독특한 형상을 갖추어가며 특정 도상 또는 기능으로 명명할 수 없는 조각을 완성했다. 그 뒤로는 이혜인 작가의 회화 작업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본 오래된 재래시장 골목 가게를 중첩된 면과 선으로 그렸다. 재개발을 수십 년째 기다리며 쇠퇴해 가는 풍경 중에서도 골동품으로 가득 찬 주점과 붉은색 조명이 새어 나오는 유흥업소를 실제 크기에 가깝게 캔버스로 옮겼다.
함께 놓인 송예환 작가의 <정지된 정보의 바다>(2024)와 추미림 작가의 4점의 영상 작업은 웹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송예환 작가는 ‘웹서퍼’라고 불리는 동시대 인터넷 사용자의 수동적 자세를 무기력하게 물속에 잠기는 서퍼에 비유했다. 설치 작품은 수면 아래의 세계로 침체되고 규격화된 웹 공간을 상징한다. 반면 추미림 작가의 신작 영상은 웹과 도시를 작동시키는 동력인 데이터를 탐구한 작업이다. 디지털과 도시라는 이질적인 두 환경에서 중첩된 타임라인을 제시하고 데이터가 구축한 복합적 관계망을 파악한 작품이다.
김원화 작가의 <인간의 거울>(2024)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친근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유발하는 미지의 대상으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작가는 거울 터널을 구축해 미디어 환경을 다각적으로 인식시키는 인공지능 잠재 공간을 관객에게 상상하게 한다.
지하 2층 전시장에서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구나, 박종영, 얄루, 이승애, 안유리, 손수민 작가의 설치 및 영상 작업이 주를 이룬다. 기존 언어 인식 체계로는 구현이 어려운 이해의 공백을 페인팅과 입체를 빌려 메우는 구나 작가는 <상아뼈그레이보철정물화와 상아빛브라운블랙초상화, 그리고 블루블루스물빛실물>(2024)을 선보인다. 작가는 신체에 가해진 고통 후 다르게 받아들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성을 고찰한다.
박종영 작가는 <Multi-persona>(2024)를 통해 현대 사회의 감시와 통제 메커니즘 등 디지털 환경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이야기한다. 비디오 설치 <신인호 월드 투어>(2024)는 얄루 작가의 신작이다. 86세 K 팝 아이돌이자 해적인 ‘신인호’의 여정을 공상적으로 그린 해양 어드벤처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조형, 사운드, 텍스트를 오가며 내러티브에 시각적 생동감을 더했다.
드로잉 애니메이션 <XXXX>(2024)를 선보인 이승애 작가는 비물질적 대상의 실체를 포획하고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이번 작품은 시베리아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동북아시아의 무속적 전통과 생명체의 영속, 생자의 평안을 작품으로 재사유한다.
안유리 작가의 <은막(銀幕)의 방랑자>(2024)는 두 명의 실존 인물을 조명한다. 리샹란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행세를 하며 가수와 배우로 활동한 야마구치 요시코와 청나라 공주이자 일본 스파이로 활동한 가와시마 요시코가 주인공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치사회적 격변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변모하는지 추적한다.
손수민 작가도 거시적이 사회 구조와 현대 사회의 복잡성이 개인의 일상에 침투해 만드는 균열을 주목하며, 개인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력을 탐구한다. 영상, 설치, 퍼포먼스, 출판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각도로 탐구해오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언더그라운드>와 <뮤직박스> 두 작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