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오피스가 ‘점자 키트’를 만든 이유는?

점자 사인 제작을 위한 키트 '점킷'

'점킷'은 누구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사인을 제작할 수 있는 키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이다.

커뮤니티 오피스가 ‘점자 키트’를 만든 이유는?

커뮤니티 오피스 ‘헤이그라운드(HEYGROUND)‘가 누구나 쉽게 점자 사인을 만들 수 있는 점자 키트 ‘점킷(JUM KIT)’을 공개했다. 이번 점킷 프로젝트에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지속 가능한 순환구조를 만드는 ‘노플라스틱선데이’, 그리고 출판을 넘어 장애 인식 개선과 교육의 격차를 해소하는 ‘도서출판 점자’가 파트너로 참여해 제품을 함께 제작했다. 실제 제품 양산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약 1여 년. 이들은 점킷의 속성부터 디자인, 제작 방식까지 각자의 전문 분야를 기반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완성도 높은 제품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헤이그라운드가 기획한 ‘점킷 프로젝트’. 노플라스틱선데이와 도서출판 점자가 제작 파트너로 함께 참여했다.


커뮤니티 오피스가 점자 사인을 만든 이유?

모듈형 디자인으로 구성된 점자 키트 ‘점킷’

점킷 프로젝트에서 무엇보다 궁금한 건 프로젝트가 시작된 배경이다. 커뮤니티 오피스인 ‘헤이그라운드’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했는데 이들은 과연 어떤 계기로 점자 사인을 만들 수 있는 키트를 제작하게 된 것일까?

사회를 변화시키는 체인지메이커들이 모이는 헤이그라운드

헤이그라운드는 임팩트를 지향하는 조직 혹은 기업이 공간에 입주해 함께 일하는 커뮤니티 오피스를 지향한다. 특히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시키는 체인지메이커들이 이곳에 모여 커뮤니티를 이루고 성장을 목표로 분주하게 일한다.

이처럼 플레이어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 헤이그라운드의 주요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헤이그라운드는 공간 그 자체를 매개로 사회에 변화를 촉발하는 활동도 진행 중이다. 점킷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시다. 헤이그라운드 워크스페이스 노유리 파트장은 “헤이그라운드 팀도 ‘공간’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공간에서 환경을 해칠만한 부분을 줄여 나가고, 모든 분들이 공간을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포용하는 시도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라며 점킷 프로젝트가 시작된 배경을 언급했다.

휠체어 충전소에 부착한 점킷

특히 최근 휠체어를 이용하는 분들을 위해 문을 여닫이문에서 자동문으로 변경하고, 휠체어 충전소를 마련하는 등의 시도에 이어 시각장애인도 헤이그라운드 공간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고 싶었다고.

낯선 공간에 들어섰을 때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흔히 안내판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간에는 비장애인을 위한 시각 안내판만이 있을 뿐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및 음성 안내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현실 또한 헤이그라운드가 점킷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궁극적인 배경이다. 특히 점자 안내문의 경우 전문 업체에 제작을 의뢰하지 않는 이상 임시적으로 알루미늄 혹은 PVC 스티커로 제작하는 정도에 그치며, 점자에 대한 정보와 디자인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쉬운 모듈형 디자인

점킷은 두 개의 판과 30개의 핀으로 구성되어 있다.

헤이그라운드는 점킷 프로젝트 시작에 앞서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헤이그라운드와 같은 공간에 점자 사인을 더 쉽게 도입하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두 번째는 “오래 쓸 수 있으면서, 공간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는 점자 사인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세 번째는 “100% 지속 가능한 소재로 점자 사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이다. 흥미로운 건 이 세 가지 질문이 점자 키트 ‘점킷’이 지닌 특징과도 다르지 않다는 점. 특히 익숙하지 않은 점자 사인을 누구나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쉬운 디자인’이 주요했다.

점킷은 점자핀 30개, 기초가 되는 뒤판 1개, 점자를 고정하는 앞판 1개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점킷 구성품인 핀과 판은 흰색과 검은색 조합을 지닌다. 이는 생산 공정상 비용 발생에 따른 현실적인 고려 사항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각 장애인 중에서도 저시력 시각 장애인에게는 색상 대비가 뚜렷할 때 점자 사인을 인지하기 쉽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아울러 주변 공간의 환경과 무던하게 잘 어우러지는 흰색과 검은색 조합은 점킷이 지닌 미니멀 디자인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양한 공간에 맞춰 사용할 수 있는 점킷

미니멀한 점킷의 디자인과 함께 주목할 건 점킷이 모듈형 점자 사인이라는 점이다. 점킷 프로젝트에서 제작을 담당한 노플라스틱선데이 이건희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체형 점자 사인은 여러 상황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상황마다 새롭게 제작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뿐만 아니라 그만큼 비용이 들어가는 점 또한 단점으로 꼽힌다. 반면 점킷은 모듈형으로 제작해 사무실부터 재활용 쓰레기장까지 각 공간의 이름과 기능에 맞게 변형해서 활용할 수 있다.


100% 지속 가능한 점자 키트

점킷은 100%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점킷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재료이다. 헤이그라운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환경을 해치지 않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노플라스틱선데이에게 점킷의 제작을 의뢰했고, 100%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을 사용한 점킷이 탄생했다.

노플라스틱선데이는 끊어진 자원 순환 고리를 회복하고, 플라스틱 쓰레기의 지속 가능한 순환구조를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 헤이그라운드로부터 점킷 프로젝트에 대한 연락을 처음 받고선 낯설고도 새로운 느낌을 받아 도전해 보고 싶었다고. 무엇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더불어 또 다른 사회 문제인 시각 장애인의 접근성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점역을 표시하기 위한 점자 핀 디자인 모습

하지만 이내 이들은 한 가지 물음에 부딪혔다. 바로 제품의 최종 고객이자 사용자가 시각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사용자가 느끼는 사용성을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 게다가 단순히 키트를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글을 점자로 번역하는 점역도 필요했다.

‘점자’는 크기가 작고, 질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공하는 단계, 생산단계에서 플라스틱 소재와 위치 등 다양한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사용자, 설치자, 유지 보수 이해관계자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용성 측면에서 우선순위를 설정해야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많은 논의가 필요했죠.

노플라스틱선데이 이건희 대표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헤이그라운드와 노플라스틱선데이는 도서출판 점자로부터 전문가의 자문을 구했다.


점자 키트에 진정성을 더하다

점킷 프로젝트에 자문을 전해준 도서출판 점자의 고영곤 매니저(왼쪽)와 김예형 팀장(오른쪽)

헤이그라운드가 시작한 점킷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면 제품의 사용자가 될 시각 장애인의 직접적인 검수 일지 모른다.

사실 다양한 점자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형식적인 점자 설치물들도 많이 접했어요. 항상 고민거리였는데, 처음 헤이그라운드 측과 미팅을 할 때 이미 점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오신 게 느껴졌어요. 진정성 때문에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도서출판 점자 경영사업부 사업기획 팀장 김예형

도서출판 점자는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곳으로 이번 프로젝트에는 고영곤 매니저가 함께 참여해 사용성에 대한 자문을 전했다. 그는 “간판이나 표지판을 보고 싶을 때,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가야 했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불편했어요. 점킷으로 공간에 점자 사인이 많아진다면 정보를 충분히 알 수 있겠죠. 접근성이 유용해질 것 같아요.”라며 점킷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아울러 도서출판 점자는 한글을 점자로 번역해 주는 점역 엔진 사이트도 개발해 제공한다.

실사용자의 입장에서 사용성에 대한 자문을 전해준 고영곤 매니저

이처럼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점자 키트 ‘점킷’은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 습득력 차이를 재고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쉬운 디자인,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재료 선택, 여기에 사용자를 고려한 진정성이 더해진 점킷을 일상 속에서 조금 더 자주 마주칠 수 있다면 어떨까? 점킷이 불러 올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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