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녹지 않는 눈사람이 있다?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접근으로 고정된 관념을 유쾌하게 뒤흔들며 대중과 소통하는 현대 미술가 듀오 ‘피터 피슐리 & 데이비드 바이스’의 작품 세계로 안내한다.

언제나 녹지 않는 눈사람이 있다?

겨울이 되면 ‘눈’이라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눈이 찾아오면, 누구나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요즘 들어서는 금손들의 눈사람 작품들이 온라인을 통해 선보이며 화제가 되기도 한다. 조건 없이, 부담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드문 시대에 눈사람은 이렇게 우리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사한다. 자연이 선사하는 선물을 무해하게 즐긴 결과물은 아쉽게도 햇볕이 나고, 기온이 오르면 사라지게 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눈사람을 만들고 기뻐했다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에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모습이 변하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은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든다. 아마도 겨울이라는 계절에 한정된 일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열광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주인공 엘사, 안나에 이어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던 캐릭터가 있다. 바로 눈사람인 ‘올라프’다. 두 자매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기반해 탄생한 이 존재는 이야기에 유쾌함을 선사하며, 사람들에게 동심의 중요성을 느끼게 했다. 눈사람이기에 따뜻해지면 녹아버리는 운명이었지만 엘사의 마법으로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올라프가 현실 세계에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놀랍게도, 몇십 년 전에 ‘녹지 않는 눈사람’이 이미 만들어졌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이들은 바로 스위스 출신의 현대 미술가 듀오 ‘피터 피슐리와 데이비드 바이스(Peter Fischli & David Weiss)’다. 1987년 선을 보인 이들의 작품 ‘눈사람(Snowman)’은 일 년 내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눈사람을 냉장고 안에 보관하는 독특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들이 특이한 눈사람을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조각품’이기에 친근함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자르브뤼켄(Saarbrücken)에 있는 뢰머브뤼케(Römerbrücke) 화력 발전소의 의뢰로 제작한 작품이며, 발전소의 초과된 전력을 활용하여 일 년 내내 눈사람을 유지시킬 수 있게 했다.

언뜻 보면 단순히 눈사람을 냉장고에 넣어 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이들은 냉장고 안에서 눈사람을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 세 개의 구리 구체 틀에 서리가 쌓이도록 설계하는 과정을 거쳤다.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 작품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얼굴’이었다. 냉장고의 냉기로 인해 서리가 끊임없이 쌓여 얼굴 표정을 원하는 대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눈사람의 눈과 미소는 매일 새로 그려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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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amazon.com

처음 선을 보일 때부터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발전 과정을 거치며 여러 미술관에 전시되어 왔다. 최근 버전은 발전소의 전력 대신 공기압축기를 사용하며, 대략 가정에서 사용하는 창문형 소형 에어컨과 거의 같은 비율로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작품의 진화 과정과 함께 과거부터 현재까지 눈사람의 문화적 의미의 변화를 담은 책을 출판하며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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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fmoma.org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이들처럼 녹지 않게 하려면 기술적인 아이디어와 장치가 필요하다. 또한 스스로 유지될 수 없으며 누군가 돌봐주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신비롭기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작품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전기의 중요성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기후 위기와 연관시키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듯하다.

전시와 동시에 화제를 모으며 다양한 의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지만, 작가들의 의도는 눈사람만큼 단순했다. 피슐리는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발전소 앞에 설치될 작품을 의뢰받았을 때 작품이 발전소의 전력을 필요로 하는 형태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는 기후 위기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지만 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순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창조한 작품은 녹지 않는 눈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1979년 첫 만남 이후 바이스가 20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작업을 함께하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접근으로 고정된 관념을 유쾌하게 뒤흔들며 대중과 소통하는 데 주력했으며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상황을 활용해 미술의 경계를 탐구했다. 흔한 것조차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아 항상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노력했던 이들은 조각, 설치, 사진, 영화,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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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youtu.be/-Lm48xH6PaY

이들의 대표작으로는 〈일이 진행되는 방식(The Way Things Go/Der Lauf der Dinge)〉(1987)이라는 30분짜리 실험 영화가 꼽힌다. 빈 창고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상호작용하며 일어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리 법칙에 따라 구르고 회전하고 점화되는 과정이 마치 거대한 도미노처럼 연결된 듯 느껴진다. 평범한 소재들도 놀라운 무언가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상은 창의적이고 유쾌하며 은근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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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guggenheim.org

1981년에 선보인 ‘갑작스러운 이런 전반적인 시각(Suddenly This Overview)’은 인간 역사의 다양한 사건을 상상력 있게 재현한 점토 조각품 시리즈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역사와 지식을 중요도와 관계없이 아우르며, 일종의 목록을 만들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관적인 시선으로 선택된 사건들을 파노라마처럼 엮어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소하고 단순해 보이는 것들에서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려는 듀오의 작업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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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resenhuber.com

이들은 작품 제작을 위해 평범한 공예 재료인 비소성 점토를 선택했다. 이 소재는 손쉽게 형상을 빚고 수정할 수 있어 신속하게 3차원 스케치를 제작하는 데 적합했다. 이 작품은 첫선을 보인 이래로 계속해서 백과사전적 범위를 계속 확장하며, 30여 년에 걸쳐 600개 이상이 제작되었다. 백과사전을 표방한 만큼, 개별로 있을 때보다 대규모로 모여 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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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erpentinegalleries.org

2013년 서펜타인 갤러리에 설치되었던 ‘다른 바위 위에 있는 바위(Rock on Top of Another Rock)’는 이름 그대로 커다란 화강암 바위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올려져 완성된 작품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이 기묘하고 놀라운 대비를 이루며 주변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노르웨이 공공 도로 관리국의 의뢰로 첫 선을 보였던 이 작품은 듀오 특유의 유머와 진지함이 느껴지는 부조리의 감각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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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erpentinegalleries.org

피슐리는 야생의 자연 속에서 돌 위에 돌을 올리는 것은 무언가 표시를 남기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행위이며, 길을 걸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을 찾고 싶을 때 이런 표시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매우 원초적이고 단순한 행위이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생각과 반응을 이끌어내는 ‘의도된 표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의 덕(Duck)*을 참조했다고 한다. 단순히 사람들이 차를 멈추고 내려서 사진을 찍게 만들기 위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사진만 찍고 지나가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고차원적인 철학과 유머가 담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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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erpentinegalleries.org

심오한 철학과 독특한 유머의 조화가 느껴지는 이들의 작품은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전시회인 도쿠멘타(Documenta), 독일 뮌스터에서 10년마다 열리는 국제 현대미술 전시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 베니스 비엔날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전시회에 소개되며 널리 알려졌다. 여섯 번이나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이들은 1995년에는 스위스를 대표하였으며, 2003년에는 수많은 질문을 담은 설치작품 ‘질문들(Questions)’(1981-2002)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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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matthewmarks.com

이들의 작품은 유럽과 북미 전역의 여러 박물관에서 대규모 전시 주제로 다뤄졌으며, 최근까지 꾸준하게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멕시코시티의 무세오 후멕스(Museo Jumex)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이들의 작품을 회고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재 피터 피슐리는 취리히에서 거주하며 작업 중이며 그와 더불어 유산을 보존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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