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로 진격한 한국의 디자인

2023 밀라노 디자인 위크

팬데믹 이전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올해 행사에선 국내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의 재개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공공 기관부터 브랜드, 개인 디자이너까지 밀라노 도심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전시와 디자인 프로젝트 일부를 소개한다.

밀라노로 진격한 한국의 디자인

팬데믹 이전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올해 행사에선 국내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의 재개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토르토나 인근 전시장 베이스 밀라노에서는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최혁준, 컬렉티브 ‘뉴커머 소사이어티’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역시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활동하는 노용원은 로사나 오를란디Rossana Orlandi의 플라스틱 프라이즈에 선정되어 전시를 열었다. 공간 디자인 전문 회사 ‘스튜디오 언라벨’의 수장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르동일도 이 기간 개인전 〈물질과 기능〉을 열었다. 또한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 래코드가 진행한 〈리콜렉티브 밀란〉전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공공 기관부터 브랜드, 개인 디자이너까지 밀라노 도심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전시와 디자인 프로젝트 일부를 소개한다.

컬러와 빛으로 창조한 손에 잡히는 신기루,
노루그룹의 〈미라지〉전

노루그룹은 토르토나 지구에서 신기루(mirage)를 주제로 한 전시를 열었다. 사막이나 추운 기후의 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 신기루를 모티브로 복잡하고 힘든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휴식 공간을 조성한 것. 이번 전시는 밀라노 현지의 디자인 & 컨설팅 전문 계열사 NMDS(NOROO Milano Design Studio)가 기획을 총괄했고 폴란드의 디자인 스튜디오 ‘UAU Project’와 협업했다. 지난해 12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찰스 제프리 러버보이Charles Jeffrey Loverboy와 협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이 디자인 듀오는 독창적 조형미가 돋보이는 3D 프린팅 오브제를 구상했고, 여기에 노루서울디자인스튜디오가 제안하는 트렌드 컬러를 입혀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정보(트렌드 컬러)가 작품이 되는 순간. 여기에 아크릴 조형물과 미스틱 효과를 곁들여 영롱한 아우라를 발산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브랜드의 공간 기획력과 디자인 솔루션 역량이 힘을 발휘한 것.

그 덕분이었을까? 이번 전시는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 1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현지 일간지인 〈일 조르날레Il Giornale〉는 〈미라지〉전을 ‘토르토나 지구에서 가장 볼만한 전시’로 꼽았으며 〈디진Dezeen〉 〈인테르니 & 데코Interni & Deco〉 등 유수의 디자인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노루페인트 산하 컬러 디자인 전문 연구소인 NSDS(NOROO Seoul Design Studio)는 뉴욕의 뮤 스튜디오Mue Studio와 협업해 컬러 트렌드 북 〈커버올 Vol. 07〉을 발간했다. 서울, 밀라노, 도쿄 등 주요 글로벌 디자인 거점에서 동시 발매한 이 책은 ‘모빌리티’, ‘오브제’, ‘스페이스’로 주제를 세분화해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norooholdings.com

디자인 UAU Project, uauproject.com

밀라노에서 빛난 정반합의 가치,
기아의 〈오퍼짓 유나이티드〉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기아 전시는 일종의 슬리퍼 히트sleeper hit(*)에 가까웠다. 이미 지난해 DDP에서 진행한 전시를 밀라노에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서울에서보다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순차적으로 동선을 구성한 DDP 전시에서는 기아의 디자인 철학인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를 기승전결 없이 동어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메인 통로를 중심으로 병렬 구성한 밀라노 전시에서는 스토리라인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인 포토 스폿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같은 콘텐츠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완벽히 다른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케이스다. kia.com
(*)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던 콘텐츠가 성공하는 현상.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다,
모오이의 〈비범한 일상〉전

브랜드가 꼭 자기 이름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는 없다. LG 올레드는 마르셀 반더스Marcel Wanders가 이끄는 모오이Moooi 전시 〈비범한 일상(A Life Extraordinary)〉에 협업 형태로 참여했다. 거장 디자이너의 이름값만 해도 충분한데 올해 전시는 조향 브랜드 에브리휴먼EveryHuman과 협업까지 해 한층 이목을 집중시켰다(에브리휴먼은 AI 기술을 활용해 고객에게 개인 맞춤형 향을 제공하는 네덜란드 회사다). 전위적인 디자인 사이사이로 LG 올레드 제품을 배치함으로써 거인의 어깨에 스마트하게 올라탔다. moooi.com

디자인 마르셀 반더스, marcelwanders.com
협업 에브리휴먼, everyhuman.com / LG 올레드, lgdisplay.com

복잡다기한 도시의 매력,
〈DDP 서울라이즈〉전

올해 서울디자인재단은 밀라노 슈퍼스튜디오에서 종킴디자인스튜디오와 DDP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브랜드관을 선보였다. 공간은 크게 둘로 나누어 구성했는데 디자이너들이 만든 13종의 DDP 브랜드 상품을 전시한 전이 공간이 미디어 스페이스인 포컬 포인트를 감싸는 구조였다. 포컬 포인트에서는 박재성 작가의 ‘자각몽: 5가지색’ 등 DDP에서 진행한 서울라이트 프로젝트를 감상할 수 있었다.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선망’이라고 한다면,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서울이야말로 가장 좋은 브랜딩 사례가 아닐까? 〈DDP 서울라이즈〉전은 DDP를 중심으로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도시, 서울의 오늘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seouldesign.or.kr

공간 디자인 종킴디자인스튜디오(대표 종킴), jongkimdesign.com

묵직한 공예의 선율,
〈공예의 변주〉전

올해로 11회를 맞이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KCDF)의 밀라노 한국공예전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PPS 구병준 대표가 총감독을, 건축가 조병수가 공간 디자인을 맡아 분청사기 작가 윤광조, 낙화장 김영조 등 공예가 20명의 작품 62점을 정갈하게 연출했다. 모든 것이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는 시대에 오히려 무겁고 진중하게 접근해 공예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현장에서 원목 전시대의 존재감이 너무 커 작품 하나하나에 몰입하기 어려웠다는 평도 있었다. 한편 올해는 본전시 외에도 로사나 오를란디 갤러리에서 한국의 젊은 공예 작가 6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상품 기획 전시도 함께 진행했다. kcdf.or.kr

전시 총감독 구병준 @byungjunkoo
공간 디자인 조병수 @byoungcho_arch

디자이너의 기억법,
설수빈의 리멤버런스

영국 사우스햄프셔 지역의 발전소 ‘폴리Fawley’는 브루털리즘 양식이 돋보이는 지역의 명물로 영화 〈스타워즈〉의 촬영지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건물이 노후하면서 결국 철거를 결정했는데 당시 지역 주민들이 이 매력적인 건물을 없애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영국 의회는 건물 일부를 남기길 권고했지만 디벨로퍼는 철거를 고수했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 출신으로 영국 RCA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설수빈 작가는 건축은 사라져도 그 기억만은 보존되길 바랐다. 그는 철거 현장에서 폴리 내부에 사용한 핸드레일 일부를 가져와 가구를 제작했는데 건축의 양식을 가구로 이식해 눈길을 끌었다. 전시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합당한 내러티브가 뒷받침될 때 서스테이너블의 가치가 견고해진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남산 힐튼호텔을 주제로 한국에서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라고 뜻을 밝혔다. @subin.seol

디자이너들이 번안한 자개의 매력,
〈머더오브펄 테이블〉전

KCDF의 〈공예의 변주〉전이 전통 공예를 모던한 연출로 품는 형식이었다면, 두손갤러리가 트리엔날레에서 선보인 〈머더오브펄 테이블〉전은 전통 공예의 DNA 깊숙이 현대 디자인이 침투한 모습이었다. 통영의 자개 장인과 차영희, 스테파노 조반노니Stefano Giovannoni, 엘레나 살미스트라로Elena Salmistraro 등 6명의 디자이너가 협업해 현대적 감각에 맞는 자개 테이블을 탄생시킨 것.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가 살아생전 스케치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완성한 테이블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dusongallery.com

참여 디자이너 차영희, 스테파노 조반노니, 마르셀 반더스, 엘레나 살미스트라로, 알레산드로 멘디니, 마르코 차누소 주니어Marco Zanuso Jr.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40호(2023.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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