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디자인의 결정적 순간들

배우보다 빛나는 무대 디자인의 세계

무대 디자인은 작품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무대가 없다면 관객도, 배우도 그리고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무대 디자이너의 역할은 여기서 시작된다. 특히 무대는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가 발현되는 예술적 공간인 동시에 최신의 기술력이 반영되는 곳이다. 관객에게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시각적으로 구현해주는 현대의 무대 디자인은 어떤 모습이며 그 무대를 만드는 디자이너는 누구일까.

무대 디자인의 결정적 순간들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마주하는 공감각적 공간, 배우의 첫 연기와 무용수의 첫 움직임, 성악가의 첫 노래가 시작되기 전 관객이 가장 먼저 초대받는 공간은 바로 무대다. 공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처음 만나는 세계의 낯선 시민이 된다.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세계는 하나의 무대’라 했다. 그의 말처럼 세계를 무대라고 본다면, 반대로 무대 또한 하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6일 동안 가장 먼저 만든 것은 하늘과 땅이었다. 사람이 발 딛고 설 공간이 가장 우선되었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곳이 인류의 무대가 되었다면, 공연 예술 창작에서도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할 것 역시 무대일 것이다.


극장사와 함께한 무대 디자인

무대 디자인이 곧 극장 건축이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의 극장 건축에서 시작된 무대 디자인의 개념은 극의 배경을 설명해주고 배우가 움직이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할해줌으로써 공연 내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20세기에 이르러 공연, 특히 연극에서 현대적 의미의 연출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단순히 텍스트를 무대에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주제 의식을 발견하기 위해 배우들의 앙상블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해진 것이다. 자연히 무대 디자인 역시 그 자체로 연출적 해석이 가미되는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 연출가 자크 코포(Jacque Copeau, 1879~1949)는 현대적 의미의 무대 디자인을 처음으로 부흥시켰다. 무대장치의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고 극을 해치는 불필요한 소품을 제거해 연기는 물론 무대 위 오브제가 작품에 기여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도로 무대 위 배우들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고 극장이 배우와 관객이 보다 가깝게 만나는 장소가 되도록 했다. 또 코포는센 강 왼쪽 기슭의 소극장을 개조해 콘크리트로 상설 무대를 설치하고 ‘비외 콜롱비에 극장’이라 이름 붙였는데, 무대와 관람석 사이의 돌출 부분을 없애고 스크린을 설치하는 등 배우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줄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 소극장에서 코포는 비로소 무대와 극장이 공연과 배우 그리고 관객을 연결하는 꼭짓점 역할을 하게 했다.

연출가가 된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된 연출가

공연이 표현해야 할 부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무대 디자인의 변치 않는 첫 번째 목표이긴 하나, 현대의 무대 디자인은 공연 예술의 시각적 해설자를 넘어 그 자체가 공연의 개념을 함축하고, 그 자체로 상징이 된다. 따라서 무대 디자인은 작품의 콘셉트와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는 요소이며 때로는 공연의 콘셉트를 결정하고 이끌어간다. 또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구체화하기 때문에 ‘상황을 디자인한다’는 개념으로 무대 디자이너를 시닉 디자이너(scenic designer)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무대 디자인을 무대장치와 무대 배경, 소품만 디자인하는 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정확히는 공연의 흐름을 제시하고 주제와 의미를 고안해내는 것까지 포함된다. 무대 디자이너는 때로 관객이 집중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품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지 연출에 앞서 고민해야 한다. 이를 생각해보면 원래 무대 디자이너였다가 연출가가 되거나, 연출가가 무대 디자인을 겸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적인 연출가 로버트 윌슨(Robert Willson)이 뛰어난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한 것은 바로 이처럼 현대 공연 예술과 무대 디자인의 밀접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변화하는 과학 기술은 무대를 어떻게 바꾸고 있나

무대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일반적인 장치가 된 턴테이블, 트레드밀, 스크린 영사기, 인터랙티브 컴퓨터 이미지를 비롯해 기술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공연 또한 적지 않다. 드론이 실제로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거나 인체 공학적으로 설비된 로봇과 무용수가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첨단 장비와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무대에서 영상의 비중이 높아지는 현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어 보인다. 스크린에 배경을 투사해 무대 세트를 대폭 줄이기도 하고, 공간을 훨씬 다 양하게 사용하며 환상적인 이미지를 투영해서 극의 시각적 요소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이제 공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영상의 과도한 사용이 무대의 연극성을 훼손하고 무대를 영화화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러한 기술이 극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자리하지 않고 기능적으로만 사용된다면 무대 디자인이 배경에 불과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관객은 훨씬 대중적인 장르인 영화를 통해 환상과 스펙터클의 세계에 몇 배는 더 가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공연 예술 역시 다감각적이고 다방향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국국립극장에서 제작하는 NT라이브는 <프랑켄슈타인> <제인 에어>와 같은 공연을 할 때 영상화 제작을 위해 무대에 카메라를 배치해 작품을 촬영한다. 그 영상을 통해 관객은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도 국립극장이 2014년부터 NT라이브를 상영하기 시작했고 메가박스에서도 라이브박스라는 이름으로 해외 오페라나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굳이 공연장을 찾아가지 않아도 누구나 수준 높은 무대를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연의 개념을 바꾸는 미래의 무대 디자인

한편 디자인 분야에서 공간 재생은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다. 무대 디자이너들에게도 버려지고 잊힌 공간을 찾아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영국 글라스고(Glasgow)의 철도 길이 정원을 갖춘 우아한 트램웨이 극장(Tramway Theatre)으로 변신한 예는 유명하다. 뉴욕 브루클린의 뱀 하비 극장(Bam Harvey Theatre) 역시 오래된 극장의 원형을 유지한 채 그 에너지를 무대 디자인에 반영한다. 우리나라 서울 광장동에 위치한 구의취수장이 2015년 대규모 세트 제작을 위한 장소와 공연 연습장, 야외 공연장 등을 갖춘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로 변모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무대 디자인은 건축이나 지역, 장소와 점차 밀접해지고 그 연계성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특히 오페라나 음악의 경우 마니아가 아니라면 새로운 관객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무대가 되는 공간 자체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는 결국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 공간을 무대 디자인의 요소로 삼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미 유럽에서는 시닉 디자인의 역할이 도시 재생과 개발로까지 확장되는 추세다. 앞으로 공연 예술이 고려해야 할 새로운 관객은 관객석에 앉은 순간을 무대 경험의 시작으로 삼지 않는다. 새로운 관객은 극장과 연결되는 지하철, 주차장에서 극장 로비로 들어오는 순간순간을 공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미래의 무대 디자인은 무대뿐 아니라 공연 예술을 경험하기 위해 통과하는 모든 과정에 훨씬 더 많이 개입하게 될 것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67호(2017.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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