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시대 속 예술과 정치, 관객을 잇는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다양한 즐거움부터 저항의 기회까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지난 2월 23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영화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만나보자.

지난 23일,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이하 베를리날레)가 11일간의 영화 축제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베니스와 칸 국제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를리날레는 그중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첨예하게 다루며 예술성과 실험성을 강조한 작품 선정으로 유명하다.

특히 올해는 베를리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이 영화제를 이끌면서 그녀의 국제적인 안목과 리더십이 이번 영화제에 어떻게 반영될지 기대를 모았다. 터틀 집행위원장은 이번 영화제에서 “전문가와 일반 관객이 함께 다양성을 담고 있는 영화를 즐기는 모습에 매우 기쁘다”라고 밝히며, 영화를 통해 “다양한 즐거움과 동시에 성찰과 기억, 그리고 저항의 기회를 제공했다”라고 평가했다.

터틀의 다양성과 포용성 강조는 이번 베를리날레 초청 작품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올해 경쟁 부문에는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중견 감독들의 신작과 현재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다룬 실험적인 작품들이 대거 소개되었다. <보이후드>(2014) 이후, 에단 호크와 다시 호흡을 맞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블루문>(2025)과 올해로 8번째 베를리날레 경쟁 부문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2025), 2021년 베를리날레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신 라두 주드의 <콘티넨탈 25>(2025) 등이 포함되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을 다룬 <타임스탬프>(2025)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조명한 <유난>(2025) 등도 선보였다.
특히 경쟁 부문 출품작 19편 중 8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으로 선정되어,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이었던 영화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또한 ‘퍼스펙티브Perspectives’ 섹션을 새롭게 신설해 14편의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소개해 새로운 시각과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고 지원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양한 국적과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들의 치열한 경쟁 끝에, 제75회 베를리날레의 최고상인 황금곰상은 노르웨이 감독 다그 요한 하우거루드의 <드림즈(섹스 러브)>(2025)에 돌아갔다. ‘드림즈’는 여교사와 사랑에 빠진 17세 여학생 요하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퀴어 소녀의 성장을 그린 감독의 ‘섹스/ 러브/ 드림즈’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다. 심사 위원장을 맡은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지성으로 핵심을 찌르는”, “사랑에 대한 명상”이라고 극찬하며 “매우 독특하지만 동시에 욕망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한국 영화, 아시아 국가 중 최다 편수를 기록하다
제75회 베를리날레에 초청된 한국 영화는 총 8편으로, 아시아 국가 중 최다 편수를 기록하며 한국 영화의 국제적인 위상을 재확인했다. 특히 스페셜 갈라 부문에 초청된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 <미키 17>은 영화제 개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지 6년 만에 선보이는 이 작품은 지구 멸망 이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얼음으로 뒤덮인 우주 행성 개척 과정에서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복제 인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연으로 등장하는 로버트 패틴슨은 ‘미키 17’과 반항적인 ‘미키 18’이라는 상반된 캐릭터를 섬세하게 연기하며, 봉준호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와 조화를 이뤄 호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를 방문한 터틀 집행위원장이 트레일러를 보고 완성본 출품을 직접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민규동 감독의 <파과>(2025)와 강미자 감독의 <봄밤>(2024), 김무영 감독의 <폭력의 감각>(2024)이 각각 스페셜과 포럼 부문에 소개되었다. 또한 차재민 감독의 <광합성하는 죽음>(2024)과 이장욱 감독의 <창경>(2025)은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오른쪽)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2025) 시사회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 © Richard Hübner / Berlinale 2025
베를리날레의 봄, 영화제 활기 다시 되찾나?
올해 베를리날레는 예년을 뛰어넘는 스타 파워로 개막부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는 틸다 스윈튼의 명예 황금곰상 수상으로, 베를린의 상징이기도 한 곰 형상의 트로피를 거머쥔 스윈튼은 “비인도적인 행위가 우리가 지켜보는 와중에도 자행되고 있다”라며 “이에 맞서는 모든 이들에게 연대를 표한다”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수상은 그녀의 데뷔작 <카라바조>(1986)가 은곰상을 받으며 시작된 베를리날레와의 38년 인연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컴플리트 언노운>(2025)의 주연으로 영화제에 참석한 티모시 샬라메는 후디와 팬츠, 신발은 물론 속옷까지 모두 핑크색으로 맞춘 패션으로 레드 카펫에 등장해 독일 매체와 SNS를 장악했다. 또한 ‘미키 17’의 로버트 패틴슨과 스티븐 연, <메모리>(2025)의 제시카 채스테인과 루퍼트 프렌드 등 유명 배우들의 방문으로 현지 주민과 해외 팬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러한 대중의 높은 관심은 실제 티켓 수요의 증가로 이어졌는데, 영화제 조직위는 이번 베를리날레에서 33만 6천여 장의 티켓이 판매되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고 밝혔다. 또한 영화 산업 관계자와 언론인들의 참여율이 평균 90%에 달해 팬데믹 이후 계속 침체됐던 영화제가 회복되는 지표로 해석됐다.
축제를 넘어 정치적 연대를 위한 플랫폼으로
뿐만 아니라 이번 베를리날레의 레드 카펫은 정치적 발언의 장으로서 그 의미를 더했다. 베를린 출신 배우 베레트 베커와 안나 탈바흐는 ‘Humanity for All’이라는 슬로건으로 난민 연대를 표명했고, 심사 위원장인 헤인즈 감독은 미국과 전 세계의 정치적 위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후 활동가인 루이자 노이바우어는 그녀의 의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노이바우어는 흰색드레스 앞면에 ‘도널드&일론&엘리스&프리드리히?’라는 문구와 뒷면에 ‘민주주의는 대낮에 죽는다’는 문장이 적힌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이는 독일 내 보수성향의 기민당(CDU) 소속 프리드리히 메르츠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체 바이델과 연관 지은 것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의 정치적 행보를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영화제 참석자들의 정치적인 발언은 영화제 직전, 뮌헨에서 발생한 테러 의심 사건과 영화제 마지막 날 예정된 독일 연방의회 선거라는 긴박한 상황을 반영했다. 영화제 조직위는 극우정당 정치인의 개막식 초청을 취소하며, 우익 극단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계 인사들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폐막식과 같은 날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보수와 극우세력은 전후 독일 정치사에 기록될 만큼 압승을 거뒀다. 독일의 정치적 지형이 급격히 우경화되는 흐름 속에서, 예술적 표현과 대중성, 그리고 정치적 담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온 베를리날레가 앞으로 어떻게 그 정체성을 지켜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