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우, 연출가만큼 재해석에 능통한 무대 디자이너

act4. 무대 디자이너에게 듣는다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의 국내 창작 공연을 뉴욕 무대에 올리며 한국 공연 문화의 가능성을 알린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연출가만큼 작품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며 디자인하는 그를 통해 공연 문화에 끼치는 디자이너의 역량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박동우, 연출가만큼 재해석에 능통한 무대 디자이너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의 국내 창작 공연을 뉴욕 무대에 올리며 한국 공연 문화의 가능성을 알린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1989년 프랑스에서 열린 아비뇽 축제에서 공연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동양적인무대 디자인의 미학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1997년 뉴욕 링컨 센터에서 공연한 뮤지컬 <명성황후>는 <뉴욕타임스>에서 “진정한 스펙터클이 뭔지를 보여준다”라고 소개되었다. 연출가만큼 작품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며 디자인하는 그를 통해 공연 문화에 끼치는 디자이너의 역량을 실감할 수 있었다.


Interview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여기서 왜 해야 하는가’가 무대 디자인의 시작이다.”

국내에 ‘무대 디자인’이 전문적으로 생겨난 시기는 언제인가?

국내에서는 1902년에 생긴협율사라는 국립극장이 최초의 실내 극장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전문적인 공연이 많이 수입되었다. 신극이라 불리는 서양식 공연이 들어온 시기도 그때다. 공연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대 디자인이 필요해졌고 무대 디자이너라는 전문 직업도 생겨난것 같다. 전문적인 교육 기관이 생긴것은 1980년대 초 홍익대 대학원에 무대 디자인 전공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1992년 문예진흥원에서 무대 미술 아카데미를 만들었고 중앙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용인대, 상명대 등 무대 디자인과가 생겼다.

라이선스 공연 무대 디자인과 국내 창작 공연 무대 디자인의 차이점이 궁금하다.

라이선스 공연보다 국내 창작 공연이 힘들고 어떤 작품이건 초연이 가장 어렵다. 극작가는 전체적인 이야기만 생각할 뿐 시각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는다. 글에 충실한 무대를 연출하다 보면 시각적으로 볼거리가 없는 공연이 되고 지루해진다. 예를 들어 1999년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 <황진이>를 초연했을 때, 만약 대본대로 했다면 1막부터 마지막까지 어느 누구의 집, 또 다른 누구의 집으로밖에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옥이나 초가집의 크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극장의 무대를 채우기 위해선 상황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에서 일어나는 일을 강 한가운데 배를 띄워 열리는 잔치로 바꾸는 식으로 대본을 바꿨다.

무대 배경이 바뀌면 내용의 흐름도 바뀔 텐데, 무대 디자인에 의해 전체 시나리오가 바뀐다는 말인가?

대본을 해석하고 무대 위를 시각화하는 작업이 공연 디자인의 일반적인 순서다. 하지만 항상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 아니다. 공연 디자인은 다양한 과정과 순서를 혼합해 완성해나간다. 2009년 뮤지컬 <영웅>에서 실제 크기의 기차 모형과 영상을 혼합시킨 장면은 내가직접 제안한 것으로 대본에 없던 장면을 새롭게 넣어 만든 것이다. 극작가가 대본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상연되기 전까지 2년의 준비 기간 동안 극작 회의에 참여하며 무대에서 보여줄 시각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장면은 추가되기도하고 또 빠지기도 하며, 마지막에 죽어야 할 인물이 앞부분에서 죽기도하고 인물의 성격이 바뀌는 등 스토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000년 당시 오페라 <토스카>에서 선보인 무대 디자인은 기존에 사실적인 무대 디자인만을 연출했던<토스카>와는 달리 과감하게 생략된 모던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무대 디자인의 전반적인 흐름은 어땠나?

당시에도 다른 분야에서는 파격적인 무대가 많았다. 하지만 오페라계는 조금 달랐다. 오페라계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보수적이다. 오페라단 단장들이 대부분 성악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이탈리아 전통 오페라의 고전적인무대 디자인을 선호한다. 오페라는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콘텐츠다. 트렌드가 급변한다고 오페라가 변하진 않는다. 30년 전의 오페라나 지금의 오페라나 크게 달라진 게 없지 않는가. 음악도 그대로고 내용도 그대로인 오페라에서 무얼 바꿔야 할까? 당연히 시각적인 부분이다.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나 독일, 미국, 영국 등에서는 현대적으로 무대 디자인을 재해석하는 활동이 활발한데, 당시 국내에서만 조금 미흡해 <토스카>가 주목받은 것 같다.

디자이너의 재해석 능력이 곧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 직접 재해석해 디자인한 대표적인 공연을 소개해달라.

2010년 국립극단에서 상연한 독일 오페라 <오르페우와 에우리디체>가 있다. 연출은 이소영 씨였는데, 이전부터 이소영 씨와는 많은 작업을 함께 하며 호흡해왔기 때문에 더욱 유기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오르페우와 에우리디체>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첫 장면이 에우리디체의 무덤 주변에 요정들이 등장하고 오르페우는 읽어버린 사랑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일단 무덤이 필요한 첫 장면부터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의 모습 대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배우들이 나와 춤을 추게 했고 한국식의 흙무덤을 만들었다.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요소인 흙, 불, 물, 나무, 쇠를 작품 구석 구석에 배치했다. 제사 지낼 때 쓰는 병풍에서 힌트를 얻어 막 대신 병풍을 이용해 다음 장면이 넘어가도록 연출했다. 병풍 하나를 걷으면 저세상을 의미하는 황천이 나오는 식이다. 뮤지컬 <겜블러> 역시 그랬다. 독일 원작에선 카지노의 이름이 자금성이다. 유럽에선 중국의 자금성이 신비롭겠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원작인 유럽과 한국에서 신비로워할 나라는 어디일까? 이슬람 문화, 힌두교등이 그것인데, 나는 인도 무굴 제국을 선택했다. 타지마할 스타일의 시각적인 요소를 넣어 무대를 디자인했다. 무대 배경이 바뀌니 의상이 바뀌고 의상이 바뀌니 그에 맞는 안무가 바뀌고 음악도 편곡해야 했다. 그리고 연기 스타일까지 바뀌어야 했다.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여기서 왜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만 던진다면 디자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무대 디자인에 의해 연출이 바뀔수도 있다’는 말이 연출자의 역할과 혼동된다.

연출자는 공연의 전체적인 개념을 리드하고 각 크리에이티브팀이 제각각 갖고 있는 개념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무대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의상 디자이너, 배우 등 모든 스태프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이다. 배의 ‘선장’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1987년부터 연극, 오페라, 뮤지컬, 발레 등 다양한 분야의 무대 디자인을 연출했다. 장르마다 성격이 다르듯 무대 디자인의 특징도 다를 것 같다.

발레는 지금껏 두 작품밖에 못 했지만 전통 발레의 경우 춤출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현대 발레는 무용극이라 할 정도로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 근본적으로 발레는 춤출 수 있는 공간 확보가 관건인 것 같다. 오페라는 수 백년 전부터 이어져 오는 콘텐츠다. 이야기와 음악이 항상 똑같은 상황에서 뭘 바꿔야 할지 생각해본다면 무대밖에 답이 없다. 아까 말했듯 여기서 왜 이 공연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뮤지컬은 성격 자체가 대중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뮤지컬은 장면이 자주 바뀌고 관객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어할 요소가 들어간다.

오페라는 몇백 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이있는 공연인 만큼 역사도 알아야 하고 문학적 지식도 폭넓어야 작품 해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굳이 역사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햄릿>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400년이 넘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연되고 있다. 중요한것은 ‘너희가 해석한 <햄릿>은 무엇이냐’이다. 그저 영국이나 미국에서 공연한 것을 답습한다면 그들은 우릴 보며 코스프레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예로 2008년 <리어왕>의 무대를 디자인할 때 경복궁 경회루를 모티브로 디자인했다. 그러니 의상도 한복을 현대화시킨 디자인으로 변했다. 그리고 문화 자체에 대한 지식보다 세상에 대한 해석 능력이 필요하다. 어느 날 공부를 한다고 쌓이는 지식은 아니고 늘 살면서 다져나가야 할 숙제다. 무대 디자이너를 표현하는 것 중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는 말이 있다. 독서도 하고 여행도 하며 늘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은 국내 무대에서 뉴욕 링컨 센터로 자리를 옮겨 상연했다. 해외와 국내 공연 디자인의 차이와 관객들의 공연 문화 수준이 궁금하다.

공연 문화 수준은 공연 시장의 규모와 거의 비례하는 것 같다. 우리도 이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왔고 주머니에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 공연 문화 수준도 발전해야 할 텐데, 주말에 여유가 생기면 갈비 먼저 뜯으려는 인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공연 문화와 디자인이 해외에 나가 성공하고 발전하려면 모든 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철물점에서 파는 제품의 질도 좋아야하고, 동대문 시장의 천도 좋아야 하며,길거리에 차도 덜 막혀야 한다. 공연 시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변화되진 않는다. 경제는 어느 날 갑자기 성장할 수도 있지만 공연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국내 공연 시장이 제대로 형성된 지 100년이 조금 넘었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성장했는데 우리는 100년 만에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인 편이어서 짧은 시간 내에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 같다. 해외여행자 수가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돌아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느끼고 스스로 발전하리라 본다.

현역에서 활동한 지 35년이 되었다.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달라.

현역 생활은 여느 디자이너처럼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디자이너는 정년이라는 게 없는 직업이다. 미국이나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나이 70이 넘도록 현역에서 활동하는 무대 디자이너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비교적 수명이 짧다. 이유는 수직적인 관계 때문이다. 젊은 연출가가 나이 먹은 디자이너에게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를 불편해한다. 우리나라는 나이 서열을 중요하게 따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 같다.

공연 디자인은 어떤 영향에 의해 변화하나?

예전에는 작화 중심의 평면 디자인이었다면 지금은 입체적으로, 물감 대신 조명과 영상으로, 정지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변화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요즘 LED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같이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이 공연 디자인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표현해내고 싶은 것을 구현해주는 것이 결국엔 기술이니까. 그리고 디자이너의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환경을 변화시킨다. 아이폰 하나로 3년 전과 지금의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뀐 것과 같은 이치다.

좋은 공연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앞으로 공연 디자인이 발전하려면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까?

좋은 해석이 우선이고 이것을 디자인으로 어떻게 잘 구현했는지, 자인 외의 다른 요소, 즉 배우들의 연기에는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무대 디자이너의 개성이 얼마큼 반영되었느냐이다. 고증을 토대로만 디자인한다면 무난한 공연은 될 수 있지만 훌륭한 공연이 되기는 어렵다. 현재 국내 공연 시장 자체가 아직 미성숙 단계다. 그러다 보니 뮤지컬을 보고 나면 뭘 보더라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스타 배우에게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니 기획사에선 스타 마케팅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공연을 즐겨 찾는 관객이 많아질수록 다양한 시각으로 공연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공연 시장의 규모도 커질뿐더러 질적으로도 좋아질 것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10호(2012.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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