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개관과 아이덴티티 구축에 최적화된 해결사
최유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 개관 프로젝트와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 등을 진행했던 최유진 학예연구사. 그런 그가 최근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 전담반에 합류해 MI 및 전용 서체 개발을 이끌었다. 개관 임무를 마치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앞으로 맡게 될 전시도 궁금해진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성패를 가늠하기 어렵기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잘못 꿴 첫 단추가 가져오는 연쇄 작용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최유진 학예연구사는 오히려 이 과정을 즐긴다. 미술관 개관 프로젝트와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 등을 진행했던 그는 최근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 전담반에 합류해 MI 및 전용 서체 개발을 이끌었다. 개관 임무를 마치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앞으로 맡게 될 전시도 궁금해진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시라는 서사도 누구와 어떤 호흡으로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우연한 기회로 전시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고 들었다.
원래 내 꿈은 영화 미술 감독이었다. 특정 장소를 방문해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와 달리 스크린만 있다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의 특성이 마음에 들었다. 대학원 공부와 프로덕션 일을 병행하던 시절, 우연하게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개관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경험해보니 프로세스가 영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흥미가 가더라. 그때의 경험이 전시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와 전시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영화를 찍기 전 시놉시스를 쓰는 것처럼 전시도 기획서를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영화감독 역할을 큐레이터가 한다면 배우는 작가 혹은 작품이 된다. 저술가 옌스 호프만Jens Hoffmann이나 아트선재센터에서 출간한 책 〈큐레이팅9X0X〉에서도 전시와 영화를 비교했다. 하나의 신과 시퀀스를 설계하듯 작품을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을 구상한다는 점에서 전시 디자이너와 영화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역할이 유사하다는 관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청주관에 이어 최근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다.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는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지원 근무를 제안받고 조감도를 살펴봤더니 호기심이 생기더라. 박물관이 자리한 송도는 바다를 메운 매립지에 하이테크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다. 설계 공모에 당선된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송도 센트럴파크와 맞닿아 있는 부지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위압적이지 않고 지하 깊숙이 묻혀 있는 건축 디자인을 제안했다. 두루마리 형상을 모티프로 한 유기적인 곡선으로 자연과 융화되는 건축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다. 이전에 뮤지엄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브랜딩 업무를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보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새롭게 개발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MI를 소개해달라.
MI는 박물관의 인상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MOW 로고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영문 이름인 ‘National Museum of World Writing Systems’의 약칭이다. 박물관 전용 서체도 만들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건립 취지를 고려했을 때, 이곳에서 사용할 국문 서체에 대한 연구 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박물관에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다. 이용제 타이포그래퍼와 제목용 서체 ‘각체’와 본문용 서체 ‘해체’를 개발했는데, 각체는 서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전시켰고, ‘당대에 모범이 되는 글자체’라는 의미를 담은 해체는 곧고 반듯하게 획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디자인했다. 가로쓰기, 세로쓰기에 모두 적합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오는 5월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MI 개발과 함께 어떤 프로젝트를 맡았나?
안마노 디자이너와 협업해 전 세계 문자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영상을 제작했다. 점에서 선, 기호에서 문자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자를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미디어 아트다. 한글의 우수성만이 아닌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문자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박물관의 방향성과 결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와이즈건축은 자연과 건축, 문자와 인간이 공명하는 설치 작품 ‘감각 문자 풍경’을 미술관 야외 공간에 선보일 예정이다.
이곳에서 준비 중인 전시도 귀띔해달라.
상설전은 소장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특별전은 ‘문자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모티콘이나 동시대 문자를 조명함으로써 문자를 둘러싼 문화 현상을 소개할 계획이다. 세계 문자를 소재로 하는 만큼 문명사에 획을 그은 500여 점의 유물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로제타석(*)처럼 원본을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디지털로 복제품을 만들거나 영상을 제작했다. 문자의 가치와 맥락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큐레토리얼 관점과 전시 디자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유물 그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전통적인 박물관과 차별되는 전시 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 고대 이집트어로 법령이 쓰인 화강암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MI를 활용한 디자인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2013년 서울관을 오픈하고 나서 1여년간 공간을 운영해보니까 각 전시실을 찾기 어렵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동선 선택이 지유롭지만 그만큼 방향 감각을 놓치기 쉬운 건물 특성 때문이다. 이에 건물 내 사이니지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부서별로 인쇄 홍보물 디자인이 천차만별이었기에 전시, 교육, 필름 & 비디오 등 프로그램별로 체계적인 디자인 가이드라인의 도입이 시급했다. 이에 2015년부터 미술관 로고를 활용한 ‘MMCA 서울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리뉴얼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1차 연도에는 스튜디오 니모닉과 협업해 건물 내외부 사이니지 디자인을 개선했고, 2차 연도에는 스튜디오fnt와 인쇄 홍보물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구축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전으로 해외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이타미 준의 초기 작업 중 본인의 아틀리에로 지은 ‘먹의 집’에서 영감을 얻어 먹색 공간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연출했다. 이 전시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 수상을 계기로 심사위원의 추천을 받아 2016 독일 디자인 어워드에 자동 출품되었는데 ‘전시 공간의 시적 아름다움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상을 수상했다. 해외 어워드 수상이 대내외적 성과로 인정받는 분위기도 있지만 사진 한 장에 권위를 사고파는 공모전의 속성에 대한 비판도 공존하기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전시 디자이너로서 느끼는 요즘의 경향은 어떤가?
현대미술 전시 영역에서는 작가들의 요구가 굉장히 구체화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미술관에 작품을 운송하고 매뉴얼대로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전시 공간의 경험 자체를 작품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큐레이터나 전시 디자이너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품의 배치, 공간 조성 방식, 조도까지 세세하게 지정하고 드물게는 교육이나 홍보 영역까지 관여하는 경우도 있다. 간혹 협업에 완벽하게 실패한 느낌이 드는 상황도 발생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능한 영역을 찾아내는 것이 전시를 만드는 사람의 일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아이웨이웨이: 인간미래〉전을 맡았을 때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전시 공간으로 할애된 6전시실과 7전시실 사이의 긴 통로를 연결해 자연스럽게 동선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아이웨이웨이 측은 구명조끼를 엮어 만든 작품 ‘구명조끼 뱀(Life Vest Snake)’을 천장에 매달자는 영리한 제안을 했고, 우리 측은 전시실 중간 복도에 그의 작업을 다룬 각종 서적을 모은 아카이브 존을 연출하는 아이디어를 냈던 기억이 있다.
협업과 관련해 기억나는 작가가 또 있다면?
크지슈토프 보디츠코Krzysztof Wodiczko는 여러 면에서 존경할 만한 작가였다. 2017년 전시를 준비할 때 그는 가벽을 많이 세우는 것을 확고하게 반대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넓은 전시실 면적과 높은 층고 때문에 작품 구현 효과가 우려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에 의자이면서 가벽 역할을 하는 낮은 벽을 세워 양방향으로 작품을 배치하는 안을 고안했고, 여기에 작가도 찬성했지만 영상을 투사하는 벽면은 의견이 맞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시도한 끝에 작가는 한참 어린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경험치를 믿어주었고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도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발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그의 따뜻한 조언, 그리고 작업 방향과 삶의 태도, 언행이 일치하는 순간을 목격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시라는 서사도 누구와 어떤 호흡으로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디자인 전시를 위한 전시 디자인 방법론이 있을까?
매체나 장르적 특성, 시대 배경, 기획 의도에 따라 전시 디자인이 달라지기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 전시는 작가의 작품이 중심이 되는 현대미술 전시와 달리 사물이나 사건이 중심이 될 수도 있고, 현상이나 이념이 부각될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아카이브가 작품의 위상 못지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때로는 아카이브를 거치하는 전시대나 주변 환경이 더 주목받는 아이러니한 결과도 발생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전시라도 디자인을 장식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 해석을 바탕으로 절제되고 응축된 언어로써 전시 디자인을 풀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