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 틀을 깨는 법, 하종현의 단색화
국제갤러리에서 만나는 대가의 전시, <하종현> 개인전
단색화 거장 하종현 작가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3년 만에 열린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 연작 <접합>과 <접합 이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끊임없는 실험과 탐구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하종현, 그가 틀을 깨는 방법을 소개한다.

국제갤러리가 단색화 거장 하종현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인다. 2025년 3월 20일부터 오는 5월 11일까지 국제갤러리 K1 전시장과 한옥 전시장에서 작가의 대표 연작 <접합(Conjunction)>(이하 <접합>)부터 2009년 이후 시작한 <이후 접합(Post-Conjnction)>(이하 <이후 접합>)까지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5년, 2019년, 2022년에 이어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으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 아래 반세기에 걸쳐 유화를 다뤄온 작가의 지속적인 실험과 물성 탐구의 현주소를 조명하는데, 여전히 쉼 없이 진화하고, 또 확장하고 있는 작가 하종현만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배압법(背押法)의 확장과 변주
이번 개인전에서 소개된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접합> 연작 그리고 <이후 접합> 연작이다. 특히 2009년 이후 제작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 초기 <접합> 연작이 단색 중심의 정적이고 반복적인 제스처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채색, 제스처의 자유분방함, 그리고 기법의 자연미를 강조한 작업으로 초기 연작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물성 탐구를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고 변화하는 시대 풍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접합> 연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고유한 제작 기법인 ‘배압법(背押法)’을 알아야 한다. 배압법은 올이 굵은 마대 자루 뒷면에 두터운 물감을 바르고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넣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작가는 캔버스 앞면에 붓을 사용해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화면에 색을 입히는 서구의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압력을 통해 물감을 밀어내기 때문에 노동집약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점에서 배압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가의 행위와 물질의 관계가 켜켜이 쌓여가는 교감의 과정이라고도 불린다. 아울러 작가의 의도와 달리 우연에서 얻어지는 효과도 배압법만의 특징이다.
한편, 배압법 탄생 배경에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한국 전쟁 이후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대상도 자리한다. 배압법에 활용되는 마대 자루는 한국 전쟁 이후 밀가루, 철조망 등과 함께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마대 자루를 활용하면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기존의 관행을 전복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갔고 그 결과 독자적인 기법 ‘배압법(背押法)’이 탄생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대표적인 기법인 배압법(背押法)을 활용한 기존 〈접합〉 연작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기법과 의미에 새로운 변주를 가미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특히, 대부분의 작품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하종현 작가가 자신의 회화적 언어를 동시대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초기 〈접합〉 연작을 연상시키는 신작 〈Conjunction 24-52〉(2024)이 대표적이다. 초기작에서 자연의 흙색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이번 신작에서는 그라데이션을 이용해 흰색을 보다 세련되게 표현했다. 점성이 강한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강조했고, 화면 안에서 구획을 나누고, 물감의 촉각적 특성을 극대화해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점이 특징이다.


(오른쪽) 〈Conjunction 23-74〉 2023 Oil on hemp cloth 162 x 13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붓 터치의 방식에서도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접합〉 연작이 기둥 형상의 수직적인 제스처를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면, 신작 〈Conjunction 23-74〉(2023)와 〈Conjunction 22-90〉(2022)에서는 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계산된 듯한 미묘한 사선 형태의 붓 터치로 화면을 채웠다. 하종현 작가의 실험과 탐구가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선(滿船)의 기쁨
K1 전시장 입구에서는 2009년부터 제작된 <이후 접합>연작이 자리한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 작품은 ‘만선(滿船)의 기쁨’을 희열에 찬 원색의 화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 접합〉 연작은 기존 〈접합〉 연작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배압법을 응용했다. 색과 형태뿐만 아니라 회화의 화면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자체를 재해석한 것이다.


하종현 작가는 마대 자루가 아닌 나무 합판을 사용했다. 이를 일정 크기의 얇은 직선 형태로 자른 후, 개별 나무 조각을 먹이나 물감을 칠한 한지, 광목 천, 마대 천, 캔버스 천 등으로 감싼다. 이후 나무 조각을 화면에 순차적으로 나열하는데, 틀에 하나의 조각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유화 물감을 짠 다음 또 다른 조각을 덧붙여 물감이 조각 사이로 눌리며 스며 나오도록 해 완성한다.
작가는 이렇게 스며나온 물감 위로 유화 물감으로 덧칠하거나 스크래치를 해 새로운 리듬감을 부여한다. 이처럼 기존의 <접합> 연작에 변주를 가미해 시대와 발맞춰 확장해가는 작품 세계를 두고 작가는 ‘만선의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작가의 <접합> 연작과 <이후 접합> 연작은 국제갤러리의 한옥 전시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화이트 큐브 성격의 전시 공간과 달리 한옥에서 만나는 작품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니 놓치지 말자. 아울러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앞서 아트선재센터에서는 하종현 작가의 초기 활동을 주목한 전시 <하종현 5975>도 선보였다. 오는 4월 20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국제갤러리에서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