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부터 <금강전도>까지, 겸재 정선의 모든 것

겸재 정선의 정수를 만나다

조선 회화의 거장 겸재 정선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 대규모 특별전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165점의 작품을 통해 진경산수화부터 문인화, 인물화에 이르기까지 정선의 화폭 속 세계와 조선 후기의 미학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인왕제색도>부터 <금강전도>까지, 겸재 정선의 모든 것

조선 회화사의 거장,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025년 4월 2일부터 6월 29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겸재 정선>전은 국내 양대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아 공동 기획한 전시로, 정선을 주제로 한 전시 가운데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국보 2건, 보물 7건(총 57점), 부산시유형문화재 1건을 포함해 국내외 18개 기관과 개인 소장품 등 총 165점이 출품되었으며, 정선의 지정 문화재 12건 가운데 8건이 한자리에 모였다.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과 정선 탄생 35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조선 회화의 흐름을 새롭게 정의했던 겸재 정선의 예술을 깊이 있게 되짚어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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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인왕제색도(좌), 금강전도(우), 사진제공: 호암미술관
Installation View of Gyeomjae Jeong Seon Part1
1부 전시전경, 사진제공: 호암미술관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1부와 2부로 구성된다. 1부 ‘진경에 거닐다’는 정선 예술의 핵심인 진경산수화를 중심으로, 그 흐름과 의미를 조명한다. 정선이 가장 먼저 그리기 시작한 금강산을 비롯해,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한양 일대를 담은 작품들이 중심을 이룬다. 정선은 금강산의 장대한 풍광을 수차례에 걸쳐 다르게 변주하며, 사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생동감을 표현했다. 또한 인왕산, 북한산, 청계천 등 오늘날까지 익숙한 한양의 풍경을 그의 시선으로 풀어낸 그림들은, 도시의 일상과 자연이 맞닿는 조선 후기의 정서를 고스란히 전한다. 개성, 포항 등 다양한 지역의 명승지를 그린 작품들도 함께 소개되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폭넓은 주제 의식과 회화적 실험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Installation View of Gyeomjae Jeong Seon Part2
2부 전시전경, 사진제공: 호암미술관

2부 ‘문인화가의 이상’은 진경산수 외에도 정선이 다채롭게 탐구했던 회화 세계를 보여준다. 자연을 통한 내면 성찰과 사유의 공간을 담은 관념산수화, 고사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인물화, 서정적인 정서가 깃든 화조화와 초충도까지, 정선의 작품 세계는 한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이 섹션은 문인으로서의 정선이 지녔던 이상과 자부심, 예술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구성으로, 당대 사대부 문인들의 미감과 교양을 함께 느끼게 한다. 회화에 문학적 요소가 더해지며 형상 너머의 사유와 의미가 확장되는 정선의 작품들은, 조선 후기 회화가 단순한 ‘그림’의 차원을 넘어 사상과 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겸재 정선의 붓으로 걷는 금강산

1부 ‘진경에 거닐다’의 첫 번째 섹션에서는 겸재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금강전도>를 만날 수 있다. 금강산은 정선의 진경산수화 여정이 시작된 장소이자, 평생에 걸쳐 가장 많이 그린 주제였다. 정선은 생애 동안 여러 차례 금강산과 관동 일대를 유람하며 수많은 풍경화를 남겼고, 그중 ‘금강전도’는 금강산 진경산수의 정수로 꼽힌다. 특히 이 작품은 금강산의 겨울 풍경, 즉 개골산을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포착하며, 거대한 산세와 수많은 봉우리들을 하나의 장대한 화면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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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 정선, 조선,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담채, 130.8 x 94.5 cm, 개인소장, 국보

정선은 뾰족한 암산과 나무가 우거진 토산을 점과 선만으로 명확히 대비시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금강산의 기세를 실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도(全圖) 형식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회화식 지도이자 유람 대용의 수단으로,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와유(臥遊), 즉 머리맡에 두고 감상하며 마음으로 산천을 유람하는 문화와도 연결되었다. “금강산을 실제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그림을 편히 바라보는 편이 낫다”라는 당시 문인들의 평가처럼, 정선의 금강산 그림은 회화 너머의 철학적 사유와 심미적 감상의 매개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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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내산총람, 정선, 조선, 18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100.8 x 73.8 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금강산의 독특한 지형적 특징을 섬세한 필치와 색채로 담아낸 정선의 또 다른 걸작 <풍악내산총람>도 이번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단발령에서 바라본 시점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내금강의 복잡한 산세를 조망하듯 한 화면에 담아낸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俯瞰)의 구도를 통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위용을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녹색 바탕 위에 흰색을 덧입혀 서리가 내린 듯한 암봉은 날카롭고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짙푸른 수풀과 부드러운 곡선의 토산은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화면에 깊이와 생동감을 더한다. 사찰과 암자가 아늑하게 자리 잡은 산사의 풍경, 형형색색의 단풍이 어우러진 구성은 금강산의 자연미와 음양의 조화를 절묘하게 담아낸다. 정선이 60대 중반, 채색 기법에 있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완성한 <풍악내산총람도>는 <금강전도>와는 또 다른 회화적 묘미를 선사한다. 참고로 이 작품은 오는 5월 7일부터 6월 29일까지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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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내산 (해악전신첩), 정선, 조선, 17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2.6 x 49.6 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이와 함께 <해악전신첩>도 주목해야 한다. 제목 그대로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은 정선이 자연을 통해 체득한 철학적 통찰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711년, 정선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에서 현감으로 재임 중이던 벗 이병연의 초청을 받아 스승 김창흡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세 사람은 금강산의 감흥을 시와 그림으로 각각 표현했으며, 이듬해 이를 엮어 만든 것이 바로 (전)《해악전신첩》(1712년)이다. 이 화첩은 정선이 본격적으로 화단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진경산수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초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정선은 72세에 다시 금강산을 유람한 뒤 노년기의 원숙한 필력으로 동일한 제목의 (후)《해악전신첩》(1747년)을 완성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것도 바로 이 화첩이다. 총 21면의 그림에는 정선의 회화뿐 아니라, 그의 오랜 벗 이병연이 남긴 시와 김창흡의 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당대 명필 홍봉조가 이를 정갈하게 필사해 문인화가로서의 성격을 한층 부각시킨다.

정선은 이 화첩에서 내금강의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俯瞰) 시점으로 포착해, 수려한 봉우리들과 유려한 지형의 흐름을 한 장면에 응축해냈다. 부드럽고 세련된 필법, 생략과 강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화면 구성은 정선이 노년에 이르러 터득한 진경산수의 미학적 정점을 보여준다.

정선이 사랑한 도시, 한양을 그리다

한편, 전시의 1부 두 번째 섹션 ‘서울을 그리다’에서는 정선이 평생 머물며 애정을 쏟은 한양과 그 근교를 담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금강산처럼 유람지로서의 경외감 대신, 일상의 공간에서 발견한 정서와 사유의 흔적들을 담았다. 한양 진경은 정선의 회화 세계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정선은 북악산 자락 유란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양천현령으로 근무하면서 서울과 그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러한 생활 배경은 자연스럽게 한양 산수를 즐겨 그리게 한 동력이 되었다. 동시에 정선을 후원한 이들이 수도에 거주하던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는 점도 그의 ‘서울 그림’의 수요와 제작 배경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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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정선, 조선,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x 138.2 cm,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회장 기증, 국보

이 섹션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단연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인왕제색도>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대가로 평가받는 정선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이 그림은, 그가 76세의 나이에 완성한 말년작이자, 평생 갈고닦은 화법이 응축된 진경산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장면은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직후, 비가 개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인왕산의 풍경이다. 정선은 물기가 남은 거대한 암벽을 짙은 농묵으로 중첩해 표현하고, 인왕산 이외의 배경 산세는 빠른 필선으로 간략히 처리함으로써 중심이 되는 암산의 중량감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육중한 골격의 암벽, 비에 젖은 소나무들, 구름 너머로 돌출되는 굴곡진 산봉우리 등에서 완숙한 양감 표현과 필묵의 운용이 돋보인다. 화면 전체가 단단하게 짜여 있으면서도 자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이 그림은, 정선이 자연을 대하는 사유의 깊이와 화가로서의 기량이 모두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작품을 4월 2일부터 5월 6일까지 한정 공개한다.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에 포함되어 2025년 11월부터 2027년 상반기까지 해외에 머무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풍악내산총람>으로 교체된다. 국내에서는 당분간 이 작품을 다시 보기 어렵다. 이번 전시를 그 원본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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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경교명승첩), 정선, 조선, 1740 – 1741년, 비단에 채색 , 20.0 × 31.0 cm, 간송미술문화재단 , 보물

한양 곳곳을 즐겨 그리던 정선의 작품 중 <경교명승첩>도 주목할 만한 화첩이다. 이 작품은 정선이 65세의 나이에 양천현(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 현령으로 부임한 1740년부터 1745년 사이, 한강과 서울 일대를 주제로 제작한 진경산수화 모음이다. 특히 1741년, 정선의 오랜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이 정선에게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고 제안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의 교유가 <경교명승첩>의 직접적인 제작 배경이 되었다.

오늘날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를 그린 <경교명승첩> 속 작품 <압구정>은 조선 시대 한강변의 풍경과 문화 공간을 정선의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정선은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언덕 위에 기와집과 초가집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가장 높은 언덕 위에는 권신 한명회가 세운 정자 ‘압구정’을 중심에 두어 이 지역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강 건너에는 중종 대부터 독서당이 있던 두무개가 자리하고, 그 너머로는 짙은 녹색의 남산이 부드럽게 화면을 감싼다.

아울러 채색 기법에서도 정선의 회화적 완숙미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언덕은 연둣빛으로 칠하고 그 위에 짙은 초록을 덧입혀 깊은 그늘의 느낌을 살렸으며, 멀리 있는 산들은 옅은 군청색으로 표현해 거리감을 효과적으로 확보했다. 특히 후경에 위치한 남산은 화면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한 녹색으로 채색된 소나무 숲이 강조되어 시각적 무게 중심을 형성하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지형적 정체성을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이처럼 <경교명승첩>은 단순한 도시 풍경의 기록을 넘어, 삶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정선의 감성과 문인의 교유 속에서 해석한 회화적 일기이자,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진경산수의 또 다른 결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붓으로 그린 문인화가의 정체성

전시의 2부 ‘문인화가의 이상’에서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외의 또 다른 예술 세계가 펼쳐진다. 정선은 단지 산수를 그린 화가에 머무르지 않고, 문인화가로서 고사인물화, 화조영모화, 초충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자신의 시적 감수성과 철학을 화폭에 담았다. 2부에서는 정선이 화폭을 통해 구현한 문인의 이상과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예술을 통해 추구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작품이 <여산초당>과 <독서여가도>다. 두 작품은 자연 속에서 사유하며 살아가는 문인의 이상적인 삶의 장면을 그려내며, 정선의 예술 철학이 진경산수를 넘어 인물화와 공간의 조화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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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초당, 정선, 조선, 18세기, 비단에 채색, 125.5 x 68.7 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여산초당>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여산초당기』에 묘사된 공간을 정선의 감수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초당에 앉아 백련이 핀 연못을 바라보는 인물은 조선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주변의 소나무와 대나무, 수직 절벽의 필선 등은 정선 특유의 진경화풍으로 채워졌다. 문학과 회화가 만나는 이 작품은 정선이 진경의 정신을 정형산수에까지 응용하던 70대 중반 이후의 화풍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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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가도 (경교명승첩), 정선, 조선, 1740-1741년, 비단에 채색, 24.0 x 16.8 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독서여가도>는 정선이 자신을 투영한 인물화로도 주목받는다. 사랑방 툇마루에 앉아 붉은 해당화를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은 고요하고 맑은 정신세계를 상징하며, 배경에 놓인 책장과 부채, 그림 속의 그림은 모두 정선 자신의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화폭 전체가 그의 서재이자 자화상처럼 읽힌다. 정선이 인물화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욱 희귀하며, 문인화가로서 그의 고아한 미의식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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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상정거 (퇴우이선생진적첩), 정선, 조선, 1746년, 종이에 수묵, 25.4 x 40.0 cm, 삼성문화재단, 보물

한편, <퇴우이선생진적첩>에서는 문인화가로서 겸재 정선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서화첩은 정선이 그린 네 폭의 그림과 퇴계 이황(1501~1570)의 친필 「회암서절요서」, 송시열의 발문, 정선의 둘째 아들 정만수와 친구 이병연의 글이 함께 엮인 복합적 구성으로, 예술과 학문, 가문과 정신이 한데 모인 특별한 기록물이다. 무엇보다도 이 화첩의 제작 배경에는 흥미로운 가족사가 얽혀 있다. 퇴계 이황이 남긴 글은 그의 손자 이안도, 외손자 홍유형을 거쳐, 사위 박자진에게 전달되었고, 이 글은 다시 송시열에게로 이어져 발문이 더해졌다. 박자진은 다름 아닌 정선의 외조부였다. 이처럼 퇴계에서 시작된 학문의 계보가 자신의 외가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은, 정선에게 가문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그는 이 서첩에 자신의 그림을 더함으로써 정신적 유산을 회화로 승화시켰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뿐 아니라, 그의 문인화와 인물화를 통해 조선 후기 회화의 폭과 깊이를 다시금 되짚는 자리다. 산과 강, 사랑방과 초당, 그리고 가문의 기억까지. 정선은 자연과 삶을 하나의 시선으로 꿰어내며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은 조선의 풍경을 그린 것이자, 그 안에 깃든 정신과 정체성을 그려낸 것이기도 하다. 겸재의 붓끝에서 피어난 ‘참된 경치(眞景)’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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