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빚은 자연의 숨결, 김현주 작가

순수한 감각과 생명력을 머금은 공예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혹은 돌처럼 가공되지 않은 재료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김현주 작가는 자연의 리듬과 생명력이 깃든 조형 세계를 꾸준히 탐구해 왔다. 자연과 예술, 일상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지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한지로 빚은 자연의 숨결, 김현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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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HJ Studio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혹은 돌처럼 가공되지 않은 재료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김현주 작가는 자연의 리듬과 생명력이 깃든 조형 세계를 꾸준히 탐구해 왔다. 일상의 오브제부터 공간을 감싸는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친 재료는 본연의 결을 따라 유기적으로 변화하며 감각의 층위를 넓혀간다. 최근 DDP에서 열린 디올 전시 <디자이너 오브 드림스>를 비롯해 파리 메종&오브제, 레벨라시옹 등 국내외 다양한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전통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활발히 전개 중이다. 자연과 예술, 일상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지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김현주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nterview

KHJ 스튜디오 김현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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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HJ Studio

ㅡ 현재 DDP에서 진행 중인 디올 전시 <디자이너오브드림스>에서 설치 작품 ‘에테르의 정원’을 선보이셨죠. 이 작품에 담긴 의도와 출발점이 궁금합니다.

닥나무 섬유와 줄기, 한지를 주재료로 한 작품 ‘에테르의 정원’은 달항아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자연의 순환성과 우주의 기운을 품은 달항아리를 하나의 정원으로 확장시키면서 디올의 상징성과 세계관을 담아내고자 했죠. 작품 속 정원은 동서양의 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상상의 공간입니다. 프랑스식 정원에는 디올 가든에서 모티프를 얻은 은방울꽃과 장미 등을 담았고, 한국의 정원은 청화백자에서 자주 보이는 모란, 매화, 소나무 등을 중심으로 구성했어요. 두 정원이 한 공간 안에서 어우러지며, 관람객이 직접 그 안을 거닐 수 있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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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디올의 헤리티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셨나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디올의 드레스 사진들을 미리 받아볼 수 있었는데, 곡선의 우아함과 섬세한 질감 그리고 정교한 디테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마치 자연 속에서 피어나고 움직이는 식물처럼 느껴졌죠. 그런 감각을 종이로 구현한 정원 속에 온전히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디올의 드레스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면, 저는 다시 그 드레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종이 정원’을 완성했습니다. 자연과 인간, 예술이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 순환하는 관계, 그 유기적인 흐름을 이번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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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디올 가든의 벽면을 가득 채운 잎사귀들이 모두 손으로 완성된 작업이라고 들었어요.

정원의 모든 잎사귀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꽂아 완성했습니다. 마치 종이로 식물을 ‘심는’ 행위처럼 느껴졌고, 실제 정원을 가꾸는 듯한 감각을 동반하는 작업이었어요. 이 방식은 전시의 제작 단계부터 설치 이후까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잎사귀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아서 해체 후에도 종이 형태 그대로 재활용될 수 있어요. 비록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종이 역시 자연에서 온 소재이기에 정원의 풍경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람객을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새로운 세계로 이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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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활동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오고 계신데요.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오시면서 한지라는 소재에 대해 새롭게 느낀 점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한지는 제게 자연을 조형하는 가장 진실한 매개입니다. 처음에는 제 뿌리와 맞닿아 있는 친숙한 소재였기에 자연스럽게 이끌렸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거치다 보니, 한지는 단지 전통적인 소재를 넘어 매우 실험적이고 지속 가능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에서 피어나는 유기적인 아름다움, 그 안에 깃든 잠재성에 계속해서 매료되고 있습니다.

ㅡ 작가님의 작업 중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형상화한 조각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셨나요?

닥나무는 제 작업의 시작점이자, 한지라는 매체의 본질을 상징하는 존재예요. 사실 한지는 벌목이 아닌 닥나무의 1년생 가지를 잘라 수확하는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요. 수확한 가지는 찐 뒤 껍질을 벗기고, 갈색 외피를 칼로 긁어냅니다. 그다음엔 밝은 내피만을 삶아 방망이로 두들겨 섬유화하고, 이를 물에 풀어 대나무 발로 건져내 종이로 완성하죠. 저는 이 과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싶었고, 닥나무 껍질 자체를 활용해 나무 형상의 조각을 만들었어요. 2차원의 종이가 3차원의 나무로 다시 태어난 셈이지요. 재료를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본래의 상태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연성과 진정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자연에서 온 나무가 다시 예술로 순환하며 새로운 미감과 질감으로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곧 제 작업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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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최근 열린 화담채 분재 특별전 <빛과 물, 그리고 산이 깃든 작은 세계>에서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나요?

〈산〉이라는 제목의 닥 조각으로 참여했는데요. 닥섬유만으로 입체를 구성한 이 작품은 화담채의 분재와 함께 전시되었죠. 분재가 거대한 나무를 축소한 형태라면, 제가 만든 산 조각은 웅장한 산을 응축해 낸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실내에서도 자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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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작가님의 작품명에는 ‘눈 덮인 대지’, ‘너울’, ‘산’처럼 자연의 서정성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작가님께 자연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자연은 언제나 위안과 영감을 주는 존재예요. 이를테면 봄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가을 단풍에 감탄하게 되는 감정처럼요. 저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아요. 제 작업을 통해 관람객도 잠시나마 평온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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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실제로 작업 구상이나 제작 전에 자연을 직접 관찰하시기도 하나요?

특별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는 않아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를 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업실 앞 녹지 공간을 바라보며 잎, 꽃, 곤충, 하늘, 새 같은 작은 요소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요.

ㅡ 부채, 함, 그릇처럼 일상적인 기물로도 작가님의 작업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이러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도 현대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용성을 기반으로 하되, 그 안에 저만의 제스처와 감각을 담아내려 해요. 손에 쥐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작지만 특별한 감각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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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이나 사용자가 느끼길 바라는 가장 큰 감정은 무엇인가요?

‘편안함’입니다. 그 감정이 전달된다면 제 작업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느낄 것 같아요.

ㅡ 국립민속박물관, 제네시스, 폴렌느, 논픽션, 푸투라 서울,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등 다양한 브랜드와 공간을 위해 한지 부채를 만들어 오셨어요. 각기 다른 고유의 색과 패턴을 구현하는 과정은 어떠했나요?

처음에는 사계절의 나무에서 착안해 분홍, 녹색, 노랑, 흰색처럼 자연에서 비롯된 색들을 중심으로 작업했어요. 이후에는 검정, 오렌지, 라임, 레인보우처럼 보다 확장된 색감으로 실험의 폭을 넓혀갔고요. 마음에 쏙 드는 색이 나왔을 땐 큰 기쁨이 있지만, 팬톤 컬러를 기준으로 수십 번 테스트를 반복해도 원하는 톤이 나오지 않을 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죠. 특히 한지는 고채도의 색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더 섬세하고 감각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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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작가님만의 색이나 패턴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색을 선택하려 해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색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ㅡ 장인과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합죽선 장인 선생님과 함께 부채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요. 부채 개발을 하면서 전통 방식의 합죽선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무형문화재 이수자 선생님께 협업을 제안드렸죠. 감사하게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함께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장인의 손길이 닿은 공예의 깊이와 제 작업이 어우러지는 그 순간이 참 감사했고,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ㅡ 한지 외에도 돌이라는 소재를 다루어 오셨는데요. 돌은 작가님께 어떤 감각을 자극하는 재료인가요?

돌의 단단한 속성이 마음에 들어요. 자연이 만들어낸 고유한 패턴과 질감이 매력적이죠. 햇빛에도 거의 변화가 없는 재료라는 점도 흥미롭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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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앞으로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소재나 협업 분야가 있다면요?

무엇보다 종이를 활용한 새로운 기법을 계속해서 개발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디올, 에르메스, 폴렌느 등과의 협업을 통해 한지라는 소재가 가진 가능성을 해외에도 조금씩 알릴 수 있었는데요, 앞으로도 다양한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한지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ㅡ 전통 공예 외에 첨단 기술과의 결합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전통에만 머물기보다 현대 기술을 접목하는 작업 방식을 따르고 있어요. 3D 디자인 후 수작업으로 마무리하거나, CNC나 레이저 커팅 기계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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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메종&오브제, 레벨라시옹 등 국제무대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계신데요. 최근 해외에서 ‘K-공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걸 느낀 순간이 있으신가요?

프랑스 파리만 해도 이제는 한국 문화가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고 느껴져요. 우선 거리 곳곳에 한식당이 눈에 띄게 늘었고요. (웃음) 전시장에 오신 관람객들 역시 한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세요. 어떤 분은 자녀가 한국에 있다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넷플릭스 시리즈를 통해 한국 문화를 알게 됐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런 반응들을 마주할 때마다, 한국 공예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ㅡ 작가님이 생각하는 공예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는 무엇인가요?

잘 만들어진 공예에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마음이 보는 이에게 전해질 때, 비로소 그 공예의 진정한 가치가 생긴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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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에 대해 들려주세요.

당분간은 한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실험과 작업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한지가 가진 가능성을 더 확장시키며, 자연과 조화로운 방식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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