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만난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탑골공원, 예술의 전당,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 호암미술관 희원, 휘닉스 파크... 모두 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손길이 닿은 곳이다.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녀의 조경 세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다. 건축의 그늘에 가려졌던 조경의 진정한 매력을 느껴보자.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 1941년생인 그녀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1호 졸업생이다. 1980년에는 국토개발기술사를 획득해 그녀의 이름에는 최초의 여성 기술사라는 수식어도 뒤따른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조경가라는 점.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50년간 정영선이 땅에 그려 온 다채로운 조경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를 개최한다.
조경가 정영선을 만나다
4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열리는 전시의 제목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제목은 작가가 평소 좋아하던 시인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이는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 바로 ‘조경’이라고 주장해 온 작가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정영선 조경가의 회고전이기 보다 현재진행형인 작가의 조경 세계를 조명하고자 한 것이 흥미롭다.
특히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를 두고 “조경 분야를 전시로 소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황홀하고 기적이다. 그간 조경은 건축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환경조경학과의 1호 졸업생이자 선배인데 후학과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오늘날까지도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시를 한다면 조경이라는 분야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전시에 응했다.”라며 전시에 임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제7전시실을 비롯해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까지 총 세 곳에서 열린다. 그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7전시실에서는 1970년대 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행해 온 크고 작은 60여 개의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가의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한다.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총 517개의 기록 자료를 통해 프로젝트에 임하는 조경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은 야외 정원이자 신작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정영선 조경가가 직접 조성했다. 3년간 유지될 두 개의 야외 정원 중 전시마당은 미술관 중정이다. 이곳에는 양치식물과 내음성이 강한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심었다. 더불어 미술관 주변에 자리한 인왕산의 거칠고 힘찬 생명력을 중정 안에 담아내기 위해 언덕과 자연석도 배치했다. 덕분에 화이트큐브인 미술관 안에서도 관객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전망이다.
미술관 뒷마당이자 보물 제3151호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의 앞마당인 종친부마당에서는 한국 고유의 정원 문화의 정수를 마주할 수 있다. 바로 차경(借景)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차경을 통해 인왕산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조경을 설계했다. 마당은 전면부를 낮은 기단으로 정리해 시야를 확보했고, 인왕산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미술관의 느낌과 어우러지도록 미술관 건축물의 마감과 유사한 석재를 사용했다. 대신 관목류를 이용해 전통적인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정영선 조경가의 말에 따르면 조경은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다. 이것이 바로 조경의 매력이다. 야외 전시장 두 곳이 지닌 아름다움의 진면모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봐야 한다. 그녀가 전시 기간 내 한 번 더 발걸음 해보기를 권하는 이유다.
조경을 바라보는 일곱 가지 시선
7전시실에서 만나는 정영선의 조경 세계는 크게 7개의 묶음으로 구분되어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 ‘정원의 재발견’, ‘조경과 건축의 대화’,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식물, 삶의 토양’. 특히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그녀의 대표작은 연대기를 벗어나 주제 중심으로 선별해 소개한다.
첫 번째 묶음인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땅의 기억과 역사를 기념하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작업을 소개한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능케 한 사례들을 모았다. 2002년 슬럼화돼 가는 ‘탑골공원 재정비 사업’과 조선인의 자체 자본으로 건설된 경춘선을 공원화 한 ‘경춘선숲길'(2015~2017), 비움의 미를 강조한 ‘광화문 광장 재정비'(2009)가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서울 아시안 게임, 서울 올림픽 대회, 대전 엑스포 등 주요 국제 행사 개최를 위해 국가 주도 사업에 참여한 사례를 선보인다. 이는 1987년 정영선 조경가가 세운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특히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및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 엑스포’93 박람회장'(1993)은 국가 경제 발전과 도약을 위해 조성된 대규모 복합 시설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묶음에서는 여가 생활의 수요 증가에 따라 개발된 ‘휘닉스 파크'(1995), ‘예술의 전당'(1988) 등 문화시설과 레저시설에 적용한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전통 정원의 요소를 현대 조경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프로젝트 중에서는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이 대표적이다. 조경가 개인에게 이 프로젝트는 전통 정원 요소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는데, 한국 전통 정원의 시퀀스를 실험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되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건축과 조경의 시너지를 엿볼 수 있는 프로젝트도 눈길을 끈다. 조민석 건축가와 함께 한 ‘제주 오설록'(2011, 2023) 프로젝트와 남해 ‘사우스케이프'(2013)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땅의 조건을 읽고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조경가와 건축가의 각기 다른 시각과 이를 융합해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묶음은 자연에 맞닿아 있다. 정영선 조경가는 콘크리트의 도시 기반 시설에 다양한 생명체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선유도 정수장이었던 공간을 공원으로 탈바꿈한 ‘선유도 공원'(2001)이 대표적. 이곳에는 조경가로서 그녀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프로젝트를 위해 자비를 들여 생물학자들을 초빙해 공원의 현황과 문제를 파악하고 시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기존 환경에 인조적인 힘을 최대한 가하지 않기 위해 기존 구조를 활용한 동선부터 그 안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퀀스까지. 조경가의 현실적인 고민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은 조경가로서 그녀가 평생에 걸쳐 좇던 철학이다. ‘국립수목원'(1987), ‘완도식물원'(1991), ‘원료식물원(2019)’, ‘서울아산병원'(2007), ‘원다르마센터'(2011)은 정영선의 생각이 녹아든 대표적인 프로젝트이다.
땅에 쓰는 시(詩), 조경
정영선 조경가는 이번 전시에서 ‘조경을 땅에 쓰는 시(詩)’로 비유한다. 실제로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고. 백일장을 나가면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짓기에 능했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조경가 정영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중에서도 ‘시’는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경가로서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에도 대부분의 영감을 시에서 얻는다. 지금도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면 시를 찾아 읽고 떠올릴 정도. 개인부터 국가사업까지 조경가 정영선이 수행해 온 다채로운 프로젝트의 면면을 살펴보며 과연 어떤 시를 떠올렸을지 궁금해하며 전시를 살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욱이 정영선 조경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도 오는 4월 17일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함께 살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