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살아있는 연구소’, 페트리 베를린

유리벽 너머로 들여다보는 고고학의 현재진행형

페트리 베를린PETRI Berlin은 단순한 고고학 박물관이 아니라 고고학 연구의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살아있는 연구소'다. 유리벽 너머로 고고학자들이 800년 전 토기 조각을 조심스럽게 복원하는 모습, 엑스레이 장비로 유물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는 과정, 그리고 발굴된 뼈 조각들이 역사적 증거로 재탄생하는 순간까지 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살아있는 연구소’, 페트리 베를린
PETRI Berlin Florian Nagler Architekten GmbH
PETRI Berlin: Das neue Archäologie Lab in Berlin © Florian Nagler Architekten GmbH
PETRI Grabungsgeschoss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II
Das Ausgrabungsgeschoss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지난 24일 개관한 페트리 베를린(PETRI Berlin)은 단순한 고고학 박물관이 아니라 고고학 연구의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살아있는 연구소’다. 유리벽 너머로 고고학자들이 800년 전 토기 조각을 조심스럽게 복원하는 모습, 엑스레이 장비로 유물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는 과정, 그리고 발굴된 뼈 조각들이 역사적 증거로 재탄생하는 순간까지 볼 수 있다. 788년 전, 베를린이 역사에 처음 기록된 바로 그 자리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21세기 문화 소통의 실험이 시작됐다.

PETRI Loggia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Loggia,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과정의 발견,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페트리플라츠(Petriplatz)는 1237년 페트리교회 사제 지메온이 기록에 등장하며 베를린-쾰른(Cölln) 쌍둥이 도시가 역사상 최초로 언급된 곳이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8년간 이어진 발굴에서 3,787구의 중세 유해가 발견되었고, 베를린이 공식 기록보다 60년 더 오래된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 모든 발견들이 페트리 베를린 지하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페트리 베를린의 가장 큰 차별점은 이런 역사적 유물 그 자체가 아니라, 유물이 연구되고 해석되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을 대중에게 그대로 공개한다는 점이다. 지난 6년간 450억 원을 투입해 완성된 이 7층 규모의 공간은 전시와 연구를 동시에 수행하며, 기존의 박물관과 연구소의 구분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문화기관이다.

Archaeologisches Fenster PETRI Berlin I c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Christof Hannemann
Das Ausgrabungsgeschoss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und
Frühgeschichte / Christof Hannemann

페트리 베를린의 공간은 비슷한 전시장을 반복하지 않고, 각 층마다 완전히 다른 역할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었다. 먼저 지하층은 ‘고고학적 창(Archäologisches Fenster)’으로 불리는 공간으로, 중세 도시 구조를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작년 6월, 엄숙한 의식을 통해 475구의 중세 유해가 원래 매장지인 납골당(Ossarium)으로 돌아와 안장되었으며,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베를린 역사의 실제 증인들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복원 작업실에서는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유물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구석기시대 유물부터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트로이 고고학 컬렉션까지 수장고가 각 층에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마치 건물 전체가 거대한 시간축처럼 보인다. 건물의 가장 윗층에는 베를린 문화재청의 ‘프로젝트룸’이 마련되어 베를린 시내 발굴 현장의 최신 연구들을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몰켄마르크트(Molkenmarkt), 알렉산더플라츠(Alexanderplatz) 등 베를린 곳곳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어떻게 처리되고 연구되는지 볼 수 있어,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거대한 고고학적 현장임을 실감하게 한다.

Stratigraphie im Grabungsgeschoss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Stratigraphie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이러한 ‘과정의 공개’는 단순히 투명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선다. 그동안 학문의 영역에서만 다뤄지던 연구 방법론과 해석 과정을 일반 대중과 공유함으로써,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크리스토프 라우후트(Christoph Rauhut) 베를린 문화재청장은 “이제서야 고고학자들의 일상적인 작업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며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안네 슈클레비츠(Anne Sklebitz) 페트리 베를린 관장 역시 “우리는 평소 배경에 숨겨져 있던 과정들을 가시화하고 연구의 즐거움을 전달하고자 한다”며 “방문객들은 여기서 놀이를 통해 연구자의 역할을 맡아볼 수 있고, 동시에 실제 작업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하층부터 시작되는 ‘발굴 게임’에서 아이들은 직접 유물을 발견하고 디지털로 청소하며 분석하는 과정을 체험한다. 각 층마다 마련된 다양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실제 원본 유물을 참고할 수 있어, 이론과 실습이 어우러진 배움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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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amples of ‘Hacked End’ displays at V&A East Storehouse © Diller Scofidio + Renfro

페트리 베를린의 이러한 시도는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개방형 수장고’ 트렌드의 발전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1976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박물관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이제 글로벌 문화기관의 필수요소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2015년 개관한 LA의 더 브로드(The Broad)는 3층 전체를 ‘허니콤(Honeycomb)’이라 불리는 독특한 구조의 수장고로 조성해 2천여 점의 소장품을 공개했다. 2021년 완전 공개형 수장고로 문을 연 로테르담의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은 15만여 점의 소장품과 더불어 작가 작업실, 복원 스튜디오, 큐레이터 연구실까지 미로 같은 동선을 통해 개방했다. 올해 5월에는 런던 V&A 박물관이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V&A 스토어하우스를 개관했다. 25만 점의 유물, 35만 권의 도서, 1천 개의 아카이브를 보유한 이곳은 예약을 통해 누구나 보존 현장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이처럼 전 세계 문화기관들이 기존의 폐쇄적 수장 방식에서 벗어나 관람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관심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Schaufenster im PETRI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Schaumagazin mit archäologischen Funden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Schaufenster im PETRI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II
Schaumagazin mit archäologischen Funden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한국의 ‘보이는 수장고’가 마주한 새로운 과제

한국에서도 ‘열린 박물관’으로 관람객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시도들이 본격화되었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국내 최초 ‘개방형 수장고 미술관’으로 개관했고, 2021년 국립민속박물관이 파주에 대규모 개방형 수장고를 선보였다. 국립박물관단지 통합운영지원센터도 관람객이 직접 수장고 안으로 들어와 수장고에서 이루어지는 업무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보여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경우 ‘관람객이 유리창을 통해 대표 소장품의 수장, 보존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페트리 베를린처럼 연구 과정 자체를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도 ‘수장형 전시’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큐레이터가 선별하고 해석한 결과물을 전시하는 기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도 우려스럽다. 2028년 개관 예정인 이 수장고는 지금까지 공개된 계획을 보면, ‘보이는’이라는 가시성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인상을 준다. 2003년 바젤에 설립된 샤우라거(Schaulager)를 설계한 헤르조그 앤 드뫼롱(Herzog & de Meuron) 당선작의 건물 외관만을 부각시키는 홍보 역시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개관을 불과 2년여 앞두고 있음에도, 시민과 방문객이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이곳을 지식 생산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까지 공개된 바 없다. 개방형 수장고의 본질적인 역할과 기능에 대한 고민 없이, 단지 ‘완성된 결과물’을 전시하는 데만 머물러 있는 듯해 아쉽다.

Restaurierung eines Fundes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Claudia Bullack.JPG
Während des Restaurierungsprozesses eines Briefbeschwerers in Form eines Bären aus dem
19. Jh.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Claudia Bullack
Schaufenster im PETRI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1
Hands on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물론 해외 사례들을 무조건 벤치마킹할 필요는 없다. 각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박물관이 처한 현실적인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 시민들이 직접 역사적 해석에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고, 연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논쟁까지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진정한 ‘개방’의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페트리 베를린은 시민들을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방문객은 앱을 통해 유물 복원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파편화된 토기 조각의 패턴 분석이나 고고학적 도면 작성 등 크라우드소싱 프로젝트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시민 고고학자 프로그램에서는 일반인이 실제 발굴 기법을 배우고, 베를린 시내 소규모 발굴 프로젝트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접근법 역시 흥미롭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동일한 유물에 대해 전문가의 해석뿐 아니라 일반 시민, 지역 커뮤니티, 심지어 어린이들의 시각까지 아우르며 유물에 대한 다층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PETRI Restaurierung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uer Vor und Fruehgeschichte David von Becker
Ausstellungansicht „Entdecke die Archäologie“ im PETRI Berlin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 David von Becker

오늘날 박물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소장품을 일방적으로 진열하는 전통적인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대중의 공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박물관은 어떻게 대중과 소통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 사회가 지향하는 문화 민주주의의 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박물관이 단순히 유물을 보관하거나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지식 생산의 현장’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현시대가 요구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트리 베를린의 실험이 주는 시사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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