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귀환
스웨덴 출신 추상미술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7월 19일부터 10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아시아 첫 순회전으로, 회화·드로잉·기록물 등 139점을 통해 작가의 사유와 감각을 탐구한다.

스웨덴 출신의 선구적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세계가 2025년 7월 19일부터 10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국내 최초 대규모 회고전으로 펼쳐진다.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전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협력을 통해 성사된 아시아 첫 순회전으로, 작가의 회화, 드로잉, 기록물 등 총 139점이 전시된다. ‘추상미술의 기원’으로 불리는 그녀의 작품은 회화의 질서와 감각의 흐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이번 전시는 연대기적 배열을 넘어 그녀의 사유를 따라가는 서사 없는 구성으로 관람자의 해석과 감각을 열어둔다.

시대를 앞선 추상의 언어
힐마 아프 클린트는 생전 단 한 점의 추상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시대를 앞서 있었던 그녀의 실험은 당대 미술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 ‘적절한 소환’은 바로 이 맥락에서 출발한다. 전시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 “왜 지금, 우리는 그녀를 다시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시선으로 그녀의 작업을 감각하고 사유하는 방식을 탐색한다. 특히 부산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달리 한국 추상미술과의 비교, 신지학, 여성주의 미술의 맥락을 포함한 도록과 전시 구성으로 그녀의 사유를 보다 촘촘히 드러낸다.
전시는 초기 자연 관찰 드로잉부터 후기의 자유로운 수채화까지 망라한다. 초기작인 1880년 <나선형 계단에 관한 조형 습작>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형태의 움직임을 실험하며 이후 추상으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1922년작 <보리에 대하여>는 꽃과 나무를 세밀하게 관찰한 수채화로 자연 연구와 추상의 접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후기작 중 하나로 이번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7개의 장면을 통해 힐마 아프 클린트의 사유가 시간의 결을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응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장면 1. 대면’은 그녀의 자연에 대한 관심과 관찰이 드러나는 초기 드로잉으로 시작하며, ‘장면 2. 상징의 미로’에서는 신지학과 인지학이라는 사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질서를 탐색하는 과정을 담는다. ‘장면 3.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작가의 대표적인 연작인 <신전을 위한 회화>를 통해 그녀의 사유가 가장 정제된 형태로 구현되는 순간을 조망한다.

‘장면 4. 단순한 침묵’부터 <신전을 위한 회화> 이후 제작한 작품 <원자>, 1908년 작 <무제> 등 주요 연작과 다양한 기록물을 함께 소개한다. 색채와 구도의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작가가 남긴 사후 작품 공개에 대한 지시 등 기록 중심의 자료를 통해 작품 형식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제시한다.
전시의 마지막인 ‘장면 7. 흔적의 직조’에 이르러서는 전시와 연계한 영화 상영,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작가의 예술 세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작품에 대한 관객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처럼 이번 회고전은 초기의 자연 연구에서 출발해 영적 탐구와 직관적 추상으로 확장되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평생의 사유를 따라간다. 그녀에게 추상은 단순한 조형 언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지도였으며,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부터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그 지도를 21세기의 시선으로 다시 펼쳐 보이며, 추상의 기원을 동시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최초의 추상
한편 힐마 아프 클린트는 흔히 ‘최초의 추상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1906년부터 시작된 <신전을 위한 회화> 연작은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 실험보다 수년 앞선 작업으로, 그녀의 이름을 미술사에 새기게 한 결정적 이유다. 그러나 그녀의 추상은 단순히 형태를 해체하거나 새로운 미학을 실험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힐마 아프 클린트가 탐구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물질 너머의 질서였다.

그녀의 회화에는 신지학과 인지학에서 비롯된 상징과 기호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선형과 원형, 대칭 구조는 에너지의 흐름과 의식의 확장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언어이며, 이는 <10점의 대형 회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캔버스에 인간의 탄생과 영적 성장을 단계적으로 담아낸 이 연작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사유가 집약된 ‘시각적 경전’이라 불릴 만하다.

아울러 색채는 그녀의 추상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파스텔 톤과 원색의 대비, 부드러운 곡선과 엄격한 구조는 감각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특히 <백조> 연작의 흑백 대칭 구도는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 대립과 화합이라는 이중성을 상징하며, 추상이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 인간 의식의 균형을 탐구하는 도구임을 보여준다. <제단화>에서 금속박과 강렬한 색채를 결합한 방식은 영적 중심의 이미지를 구현하며 그녀가 추상에 부여한 신성성을 강조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에서 자연은 단순한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는 열쇠다. <인식의 나무> 연작은 가지와 뿌리의 형상을 통해 내면의 성장과 의식의 분화를 표현하고, 후기 수채화인 <보리에 대하여>에서는 꽃과 나무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자연의 패턴과 추상의 언어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초기작 <나선형 계단에 관한 조형 습작>에서 이미 시작된 이러한 관심은 그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추상은 한 세기를 넘어 이제야 동시대의 감각으로 읽히고 있다. 이번 회고전은 그녀를 단순히 ‘미술사적 최초’라는 타이틀로 호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초기의 자연 연구에서 출발해 영적 탐구와 직관적 회화로 확장된 사유의 지도는 오늘날 관람자의 해석을 통해 다시 쓰이고 있다.
힐마 아프 클린트에게 추상은 세계를 설명하는 도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통로였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전시는 바로 그 통로를 현재의 감각 속으로 다시 열어, ‘최초의 추상’이 품고 있던 질문을 우리의 시대와 나란히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