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프레 강변에 흐르는 느림의 미학, 플루스바드

문화시설의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곳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만으로는 부족하다. 제국의 영광, 공화국의 실험, 분단의 상처, 통일의 혼란이 켜켜이 쌓인 이 도시에 새로운 문화 공간이 탄생할 때마다 자연스레 그 장소의 역사적인 지층을 마주하게 된다. 2023년 문을 연 플루스바드(Flussbad) 역시 예외는 아니다. 베를린 동쪽 슈프레강이 유유히 굽이치는 자리, 한때 시민들의 여름 피서지였던 강변 수영장에 자리잡은 플루스바드는 '모두가 건강히,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며 시작됐다.

슈프레 강변에 흐르는 느림의 미학, 플루스바드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만으로는 부족하다. 제국의 영광, 공화국의 실험, 분단의 상처, 통일의 혼란이 켜켜이 쌓인 이 도시에 새로운 문화 공간이 탄생할 때마다 자연스레 그 장소의 역사적인 지층을 마주하게 된다. 2023년 문을 연 플루스바드(Flussbad) 역시 예외는 아니다. 베를린 동쪽 슈프레강이 유유히 굽이치는 자리, 한때 시민들의 여름 피서지였던 강변 수영장에 자리잡은 플루스바드는 ‘모두가 건강히,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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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Reethaus). 사진촬영 José Cuevas ⓒ Flussbad

플루스바드의 역사는 베를린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7년, 이곳에 개장한 ‘리히텐베르크 야외 수영장(Stadtbad Lichtenberg)’은 8시간 노동제와 유급휴가제를 도입하며 ‘여가의 민주화’를 추진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실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5만 제곱미터 부지에 네 개의 야외 수영장과 다이빙대, 모래사장을 갖춘 이곳은 하루 만 명이 찾는 명소였다. 특히 인근 발전소의 온배수를 활용한 난방 시스템 덕분에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어, 산업과 자연, 여가가 조화를 이룬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상향을 구현한 곳이다. 그러나 2차 대전으로 문을 닫은 이곳은 1950년에 완전히 폐쇄됐고, 이후 동독 세관 건물로 쓰이다가 통일 후에는 아예 버려졌다. 자연이 점령한 이 폐허에 불법 레이브 파티가 열리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1990년대에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성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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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 사진촬영 Clemens Poloczek ⓒ Flussbad

현재 플루스바드는 바이마르 시대의 모더니즘적 이상, 동독의 경직된 통제, 9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자유로운 에너지가 층층이 쌓인 이 곳에 새로운 문화 실험을 펼치고 있다. 네오 브루탈리즘 건축가 아르노 브란들후버(Arno Brandlhuber)와 무크 페체트(Muck Petzet), 모니카 고글(Monika Gogl)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곳은 전시장과 공연장은 물론이고 호텔과 레스토랑, 창작 스튜디오 그리고 종합적인 웰니스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확장 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공간들이 고정된 기능에 묶여 있지 않다. 다양한 건축가와 디자이너, 아티스트들이 돌아가며 참여해 공간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한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플루스바드는 단숨에 완성되기 보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중에서도 지하에 위치한 공연장 ‘리트하우스(Reethaus)’는 고대 신전을 연상시키는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다.

시공간을 유영하는 몰입의 시간

지난 7월 27일, 리트하우스에서는 특별한 청음회(Listening Experience)가 개최되었다. ‘AIR in Resort’라는 이름으로 일반 대중에게 문을 연 리트하우스에서, 영국의 MSCTY_Studio가 일본의 음악가 요시무라 히로시(Hiroshi Yoshimura)의 곡들을 재해석하여 선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요시무라는 1980년대 일본에서 ‘칸쿄 온가쿠(환경음악)’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에릭 사티(Erik Satie)의 ‘가구 음악’이나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앰비언트 음악과 계보를 같이 하지만, 요시무라의 음악은 특정 공간과 상황, 시간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다는 점에서 더욱 섬세하고 의도적이다.198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등장한 그의 음악이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디지털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가 만들어 낸 ‘공간과 어우러지는 음악’에서 위안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음악에 MSCTY_Studio는 일본의 불교 승려이면서 동시에 비트메이커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타츠미 아키노부(TA2MI)와 영국의 실험음악가 스캐너(Scanner)의 보컬을 더했다. 전통 불교 철학과 현대 전자음악, 서구의 실험 정신이 만나 요시무라의 40년 된 음악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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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 사진촬영 Clemens Poloczek, ⓒ Fluss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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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 사진촬영 Clemens Poloczek, ⓒ Flussbad

리트하우스의 입구를 지나 지하로 내려서자,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둥근 아치형 천장과 거친 콘크리트 벽면이 만드는 공간감은 마치 고대 신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줬고, 그 속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이내 흘러나온 신디사이저의 몽환적인 선율은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혀 독특한 반향을 만들어냈고, 원곡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층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열대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는 베를린의 지하 공간을 순식간에 태국의 숲으로 변모시켰다. 물리적으로는 베를린에 있지만 청각적으로는 태국에 있고, 시간적으로는 1984년과 2025년이 중첩되는 초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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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 사진촬영 Daniel Faro. ⓒ Flussbad

특히 TA2MI의 불교적 보컬이 더해지자 승려의 목소리가 가진 특유의 진동과 울림은 단순히 음악적 요소를 넘어 영적 차원의 경험을 만들어냈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은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머물렀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고, 누군가는 천장을 바라보며 음악과 건축이 만드는 시너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부모를 따라 온 아이들조차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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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하우스, 사진촬영 José Cuevas. Flussbad

고대 건축을 재해석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안에 ‘머무르는’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청음회가 끝나고 야외 정원으로 나오니 따뜻한 여름 햇살이 얼굴을 감쌌다. 슈프레 강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물결이 만들어내는 무아레 패턴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 몰입의 경험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강변의 풍경이 평소보다 훨씬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천천히 흘러가는 슈프레 강처럼, 이곳 플루스바드에서 예술과 일상은 그렇게 천천히, 자연스럽게 섞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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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Daniel Faro. ⓒ Fluss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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