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미학만의 감성으로 풀어낸 프래그런스 브랜딩
리브랜딩으로 돌아온 수집미학(SUJIPMIHAK)
은은하지만 강력한 메시지 전달 방법인 ‘수집’이라는 행위에서 출발해 개인의 취향을 브랜드로 승화시킨 수집미학. 2024년 잠시 숨을 고른 뒤, 약 10개월 만에 로우클래식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집이란 행위는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취미 혹은 연구를 위해 여러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으는 것’을 뜻한다. 하나만으로는 특별하지 않던 물건도 차곡차곡 모이면 ‘취향’이라는 개인의 미감으로 엮이고, 그 안에는 수집자의 선택과 관심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쌓인 취향들은 자신을 가장 은은하면서도 강력하게 드러내는 언어가 된다.

은은하지만 강력한 메시지 전달 방법인 ‘수집’이라는 행위에서 출발해 개인의 취향을 브랜드로 승화시킨 수집미학. 이름 그대로 ‘미학’을 ‘수집’한다는 뜻을 담은 솔직담백한 네이밍이다. 2019년 휴대폰 케이스로 첫 발을 내디딘 브랜드는 작은 이미지들 속에 자신만의 미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휴대폰 뒷면이라는 한정된 캔버스에 취향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확신에 찬 작업물들은 곧 여러 브랜드의 러브콜을 이끌어냈다. 로우클래식(LOW CLASSIC), 39ETC, 나이트프루티(NIGHTFRUTI), 머지(MERGE), 샬롬(SHALOM) 등의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의 취향을 소비로 연결시키던 수집미학은 2024년 잠시 숨을 고른 뒤, 약 10개월 만에 로우클래식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로우클래식의 크리에이티브 라인에 합류한 수집미학은 프래그런스로 완전히 새롭게 변신하며 한남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한남동의 시끌벅적한 메인 스트리트를 살짝 벗어나 조용한 대사관로를 걷다 보면 하얀 2층 집과 순백의 벽이 눈에 띄는데, 그곳이 바로 수집미학의 새로운 보금자리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이 공간은 브랜드 철학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장소다.

스토어에는 오픈과 동시에 출시한 세 가지 향의 개성이 담아낸 방들이 각각 마련되어 있다. 1층의 Room A는 ‘프롬 스틸 라이프(From Still Life)’를 위한 공간이다. 네롤리(Neloli)의 신선함, 베티버(Vetiver)의 우아함, 은은한 넛맥(Nutmeg)의 조화가 공간 전체를 감싸며 한 점의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고딕적인 오브제와 빛의 배치 또한 차분하고 절제된 무드를 더해 향이 가진 정적인 매력을 극대화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Room B와 Room C가 각각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Room B는 ‘뉴 메디슨(New Medicine)’을 위한 공간으로 짙은 시더우드(Cedarwood)와 상쾌한 그린 만다린(Mandarin), 시소(Shiso)의 싱그러움이 어우러져 허브 정원을 거니는 듯한 향을 풍긴다. 공간 한편에 중세 시대에 사용했을 법한 비커들과 가운데 위치한 유리 오브제가 놓여있어 아방가르드 한 감성과 더불어 향에 대한 공감각을 더욱 증폭시켜준다.


(오른쪽) 2층의 Room C. ‘고저스 낫띵(Gorgeous Nothing)’을 위한 공간으로, 흰 커튼과 은은하게 퍼지는 장미향이 인상적이다. 사진 수집미학
Room C는 ‘고저스 낫띵(Gorgeous Nothing)’을 담아낸 공간이다. 고전적인 장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향으로 페퍼리(Peppery)한 향취와 파촐리(Patchouli), 머스크(Musk) 등 다양한 향취가 층위를 이루며 방을 가득 채운다. 얇은 흰 커튼이 창을 가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공간에서는 기존의 장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 후각적 경험이 어우러지며 뇌리에 새로운 장미의 인상이 각인된다.



리브랜딩 이후에도 ‘수집미학’ 특유의 미감을 담은 오브제 디자인은 여전히 단단하게 이어진다. 향이라는 매개에 어떻게 미감을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소하듯, ‘더 아카이브 에디션(The Archive Edition)’이라는 라인을 만들었다. 과거의 오브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카이브 에디션의 첫 번째 제품 포터블 퍼퓸은 1800년대 영국 경찰이 사용하던 ‘휘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석고에 퍼퓸 오일을 흡수시킨 뒤, 휘슬 모양 케이스에 담아 은은한 향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새로운 방식의 퍼퓸이다. 몸에 직접 뿌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은 물론이고, 액세서리로서의 기능까지 겸비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오른쪽) 1층에 위치한 포장실. 선물을 완성하는 아틀리에를 연상시킨다. 사진 수집미학

향을 위한 Room A, B, C 외에도 공간 곳곳에서 수집미학만의 섬세한 손길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1층의 포장실은 하나의 선물을 완성하는 아틀리에처럼 꾸며져있다. 패키지 디자인에도 많은 신경을 쓴 만큼, 브랜드의 철학을 고객이 끝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성스러운 분위기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2층의 ‘기도실’은 앞으로 출시될 신제품들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플래그십스토어의 시향 도구는 물론, 의자, 테이블, 액자 등 모든 오브제가 주문 제작으로 완성된 만큼 디테일을 살펴보는 재미 또한 크니,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볼 것을 권한다.


빈티지한 제품부터 고딕양식을 적용한 오브제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수집미학
기존의 프래그런스 브랜드들이 추구하던 정제되고 깔끔한 이미지와는 달리, 독특한 미감과 과하지 않은 맥시멀리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수집미학. 리브랜딩을 통해 브랜드가 추구하는 새로운 미감과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수집미학의 김나영 디렉터와 함께 짧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Interview
김나영 수집미학 대표
— 쿠튀르적이면서도 우아하지만, 위트라는 확고한 테이스트를 가진 브랜드로 많은 사랑을 받던 ‘수집미학’이 프래그런스 브랜드로 리브랜딩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2022년에 로우클래식과 호흡을 한번 맞췄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계기로 로우클래식에 합류하게 되었나요?
2022년 <FILED>라는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로우클래식과 인연이 닿았어요. 혼자만의 영감으로 일하던 제게 로우클래식과 함께한 프로젝트는 시야를 확 넓혀 주는 계기가 되었죠. 그 이후 로우클래식 이명신 대표님과 박진선 이사님을 멘토처럼 따르며 브랜드 운영에 관한 여러 조언을 구하곤 했습니다. 개인의 취향과 영감으로 브랜드를 꾸려가던 터라, 규모가 커질수록 수집미학에 대한 정체성과 지속 가능한 운영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효율보다는 정성을, 실용보다는 감도를 중요하게 생각해 하나의 제품을 출시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었는데, 그 제품이 소비되는 기간은 너무나 짧은 것에 회의감이 들었죠. 그러던 2024년 말 우연한 기회에 이런 고민을 로우클래식과 나누게 되었고, 저를 가까이서 지켜보시던 두 분께서 저라는 개인이 잘하는 역량과 로우클래식이 함께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향을 제안해 주셨어요. 취향과 감도를 그대로 반영하지만 보다 영속적인 제품, 그것이 바로 ‘향’이었습니다.

— 쇼룸이 하나의 조향 아뜰리에 혹은 아카이브 갤러리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떤 모습을 그리며 쇼룸 구상을 했나요?
수집미학이 프래그런스 브랜드로 거듭나며 모토로 삼은 것은 ‘향을 사적 공간의 구조로 제안한다’ 였어요. 오프라인 공간을 만드는 첫 번째 목표는 시각적 이미지와 공간적 성질을 최대한 활용해 ‘향’이 공간의 일부로 자리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었어요. 이에 더해 수집미학이 그간 깊게 탐구하고 몰두하던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과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향한 실험’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고 사라지는 트렌드 속에서도 오래도록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들을 소개하는 ʻ갤러리’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을 찾다가 한남동 대사관길에 위치한 낡은 주택을 개조했습니다. 외부의 시공간과 동떨어진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오래된 주택의 골조를 살리면서 손길이 느껴지는 빈티지 가구, 옛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유니폼 등을 활용해 손때 묻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아이덴티티에 맞춰 타월 색 역시 화이트로 맞춰 제작했다. 사진 수집미학
— 처음 쇼룸을 접하고 등장 당시 센세이션했던 마르지엘라의 쇼룸이 떠올랐어요. 마르지엘라의 ‘화이트’가 미니멀리즘을 상징했던 것이라면, 수집미학의 화이트는 어떤 의미를 갖나요?
‘화이트’가 수집미학 아이덴티티의 일부가 된 이유는 ‘저’라는 사람의 취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제 작업 방식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그런 취향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오래된 사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전혀 매칭되지 않는 이미지를 조합하거나 깨끗한 바탕에 때가 탄 느낌을 선호하는데요. 미학 용어로 단순하게 말하면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연출하는 이미지가 기괴하고 복잡해서, 전체적으로 정돈돼 보일 수 있도록 바탕이 되는 컬러는 단순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이트라는 컬러에 끌리게 된 것 같습니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사물을 원래 맥락에서 떼어내 전혀 다른 환경에 배치해 낯섦과 초현실적 효과를 만드는 기법이다. 대표적으로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 속 〈구름이 들어찬 방〉이 그 예다.

— 기도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떤 기획으로 준비된 곳인가요?
향수(perfume)의 어원은 ‘연기를 통해서’라는 뜻의 라틴어 ‘per fumare’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고대부터 오랜 시간 ‘향’은 신과 영적 교감을 나누는 도구였고, 치료나 치유의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향이 주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캐릭터성을 ‘기도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시각적으로 풀고 싶었습니다. 기도실은 내년 방향용 제품라인이 출시되면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예정입니다.



— 3가지 프래그런스 모두 중성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매력이 있더라고요. 각 향은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며 기획했나요?
‘정물화로부터’라는 이름의 ‘프롬 스틸라이프(From Still Life)’는 전혀 다른 장소의 사물을 켜켜이 쌓아 올린 정물화처럼, 서로 다른 향취들(네롤리, 베티버, 넛맥)이 뒤섞인 향입니다. 개성이 강한 노트가 짙은 명암처럼 생동감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정물화의 고요한 정취가 느껴져서 ‘From Still Life’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뉴 메디슨(New Medicine)’은 가만히 맡아보면 맑고 가벼운 식물향과 오래된 목재향이 동시에 느껴질 텐데요. 중세 연금술사의 실험실 속 유리 실린더에 담긴 식물들의 이미지에서 착안하여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식물을 상상해 만든 향입니다.

‘고져스 낫띵(Gorgeous Nothing)’은 기존 프래그런스 시장이 장미 향에 부여했던 인위적인 캐릭터성에서 벗어나, 장미에 대한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장미의 본질에 더 다가가고자 한 실험적인 향입니다. 〈The Gorgeous Nothings〉은 에밀리 디킨슨이 봉투 조각에 남긴 무제의 시편들을 모아낸 책 제목에서 차용한 표현으로, 제목 없는 시와 여백을 통해 무한히 확장되는 그녀의 시학을 상징합니다. 이 표현을 통해 도전적인 의미도 전달하고 싶었어요.

— 로우클래식이라는 패션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라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오브제들을 출시할 계획인가요?
로우클래식은 사옥인 미래빌딩에서 다양한 문화 전시나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데요. 이 점이 제가 로우클래식과 함께하고 싶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로우클래식의 크리에이티브 라인으로 합류한 수집미학 역시 기존에 시도하지 못했던 보다 과감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저 역시도 많은 기대가 됩니다. 나아가 수집미학과 결을 같이 하는 작가님들을 모시고 다양한 협업을 진행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가져 보고 있습니다.

프래그런스 브랜드로 리브랜딩한 만큼 출시하는 오브제는 ‘향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에 집중될 것 같아요. 다만, 기성의 프래그런스 제품들은 ‘소모품’의 성격이 강했는데, 수집미학의 제품들은 ‘소장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나하나 정성 들여 만들 생각입니다. 오픈과 함께 발매한 제품 중 ‘포터블 퍼퓸(Portable Perfume)’처럼 오브제 성격이 강한 제품들은 ‘아카이브에디션(Archive Editon)’으로 소량 제작해 선보일 예정입니다. 다음번엔 ‘리드 디퓨저’를 소개하게 될 것 같습니다. 향뿐만 아니라 용기, 패키지까지 일반적인 형태를 비틀어 보다 새롭고 미학적인 프래그런스의 세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