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바다미술제 공동감독, 김금화 큐레이터

완벽한 타협보다 미완의 상생을 위해

김금화는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다. 그녀의 작업은 국제 미술 담론을 넘어 지역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며,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야생적’ 태도로 전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 오는 9월 27일부터 열리는 2025 바다미술제의 공동감독으로 참여했다.

2025 바다미술제 공동감독, 김금화 큐레이터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큐레이터 김금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녀를 ‘국제적인 기획자’로, 또 다른 이는 ‘생태 담론을 전면에 내세운 기획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야생적’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던 이 표현이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큐레이터십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되었다고 말한다. 타협하지 않고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오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시를 만들어나가는 태도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가 들려준 지난 경험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이었다. 화이트 큐브라는 관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작가와 함께 현실적인 제약을 돌파하고, 과학자·활동가·연구자와의 협업을 통해 분야 간 경계를 허무는 그녀의 지난 전시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Interview

큐레이터 김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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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부산 바다미술제 공동감을 맡은 큐레이터 김금화. ⓒ Tobias Kruse

베를린에서 배운 ‘길들여지지 않는’ 법

그녀가 큐레이터로서의 방향을 자각한 곳은 베를린이다.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뒤 베를린으로 건너가 박물관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기획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됐고, 국립미술관에서 전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본격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베를린의 창작 환경이었다. 한국에서 관습적으로 작동하던 보이지 않는 규칙이나 고정된 기획의 틀이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를린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고, 타협 없이도 실험할 수 있는 도시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는 법을 배웠고, 그 배움(Unlearning)은 지금도 그녀의 기획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프로젝트가 베를린 쿨투어포룸 앞 광장에서 있었던 ≪제 3의 자연≫(2019-2022)이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인왕제색도에서 모티브를 얻어 백두대간을 형상화한 이 예술정원은 남북한 야생화를 한 자리에 모으려는 시도였다. 허가를 얻는 데만 1년 반이 걸렸고, 제작비는 크라우드펀딩으로 충당해야 했다. 설치미술가 한석현, 김승희와 무려 3년을 준비한 끝에 실현된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의 역할은 분명했다. 기획부터 실현까지, 작가들과 함께 현실적인 어려움을 넘어 작업적 비전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판을 마련하는 것. “큐레이터는 작가가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전시 철학이 이 현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검은 현무암 사이로 피어난 하얀 야생화들, 그리고 그 위로 스며드는 인공 안개가 만들어낸 한 폭의 수묵화가 베를린 한복판에 되살아나게 된 데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겠다는 큐레이터의 뚝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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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자연≫, 참여작가: 한석현, 김승회, 쿨투어 포럼, 베를린, 2019-2022, ⓒ Christopher F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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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자연≫, 참여작가: 한석현, 김승회, 쿨투어 포럼, 베를린, 2019-2022, ⓒ한동령.

김금화 큐레이터의 생태학적 관심은 베를린에서의 석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조경과 환경미학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단순한 공간 설계의 범주를 넘어 지구적 조건을 해석하는 키워드로 확장되었다. 그녀는 기후위기와 가부장제, 식민 권력 구조라는 세 가지 문제를 별개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겹겹이 쌓인 지층처럼 서로 맞물린 구조로 읽어내고자 했다. 생태학을 단순히 환경 문제의 언어에 국한하기보다 이를 사회적 불평등과 역사적인 권력 관계까지 아우르는 비판의 틀로 확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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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메아리≫ 전시전경, 더페이지 갤러리, 서울, 2025. 05.22 – 20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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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메아리≫ 전시전경, 더페이지 갤러리, 서울, 2025. 05.22 – 2025. 09.26.

“저는 한국적인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동시대 미술 담론 속에서 한국과 베를린,
그리고 다른 문화들이 정체성이 어떻게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하고 싶어요.
제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국제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담론이 현재 어떤 형태로 가능하고 필요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그녀가 활동하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더욱 다층적으로 드러난다. 서울에서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베를린에서는 ‘한국인 큐레이터’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녀는 종종 번역의 고뇌를 마주한다. 한국 작가의 작업을 베를린에 소개할 때, 맥락을 세세하게 설명하면 작품이 교육 자료처럼 굳어버리고, 설명을 줄이면 전혀 뜻밖의 오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독일작가들을 한국에 소개할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어떤 문화적 맥락도 다른 문화권의 시선을 거치면 곧잘 ‘이국적인 신비주의’로 소비되기 쉽다. 이는 그녀 뿐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하는 많은 창작자와 기획자들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경계의 불안정성에서 오히려 힘을 얻는다. 실패와 오해의 가능성을 품은 번역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는 의미있는 예술 실천이자, 독창적인 시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성 또는 베를린이라는 미술씬에 집중하기 보다 국제적인 미술 담론 속에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담론을 넘어 예술 실천으로서의 ‘생태’

이러한 그녀의 관심사는 한국과 유럽을 가로지르는 작업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갯벌랩(Getbol Lab)’ 프로젝트다. 한국 서해안의 갯벌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만큼 독자적인 생태적 가치를 지닌 장소다. 그러나 김금화 큐레이터는 이를 단순한 지역적·민족적 아이콘으로 소비하는 대신 독일 와든해와 비교 연구하며, 지역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담은 지구적 논의로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사운드 아티스트, 조경사학자, 생태 연구자 등이 참여해 과학적 데이터를 예술적 장치로 번역했다. 대기질 수치가 소리를 내는 조형물로, 습지의 지표가 설치 작업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과학적 엄밀성과 예술적 상상력을 잇는 새로운 매개자로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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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들(Nägel)≫ 전시전경, 소냐 쇤베르거(Sonya Schönberger), 성 마태오 교회, 쿨투어포룸, 베를린, 2025, ⓒ Christof Zwi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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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과의 대화: 울림들(Speaking to Ancestors: Reverberations)≫, 사잔 마니(Sajan Mani), 훔볼트 포럼, 베를린, 폴린 두트루뉴(Pauline Doutrougne)와 공동 기획, 2024, ⓒPiotr Piet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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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과의 대화: 사랑받지 못한 자들(Speaking to Ancestors: The Unloved Ones)≫, 댄 리(Dan Lie), 폴린 두트루뉴(Pauline Doutrougne)와 공동 기획, 츠빙글리 교회(Zwingli Church), 2024, ⓒPiotr Pietrus.

물론 그녀의 기획이 항상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21년 플로팅 유니버시티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 ≪지구의 아상블라주(Terrestrial Assemblage)≫에서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작품을 야외에 설치했는데, 생태 전문가들이 연락해서 ‘그 자리에 개구리 알이 많이 있으니 설치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어요. 저와 작가는 그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생태미술을 내세웠지만, 정작 생태 환경의 실제 조건을 고려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이후 그녀는 ‘생태’라는 담론을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현실과 부딪히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충돌과 긴장을 전시 기획의 일부로 수용한다. 광장, 늪지, 갯벌 같은 비제도적이고 살아 숨 쉬는 장소로 전시를 확장하는 것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다. 이는 실제 생태계와 직접 소통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전시 기획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녀만의 큐레이터십이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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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아상블라주(Terrestrial Assemblage)≫, 마르코 바로티(Marco Barotti), <에그(Egg)>, 플로팅 유니버시티 베를린(Floating University Berlin), 2021, ⓒMarco Barotti.

올해 9월 27일에 개막하는 부산 바다미술제는 그녀의 커리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예정이다. 스위스 출신 큐레이터 베르나 피나(Bernard Vienat)와 공동감독을 맡은 이번 미술제는 ‘밑 물결’을 키워드로 다대포의 생태계를 깊이 파고든다. 날씨와 보안, 허가 문제 등 야외 전시의 현실적인 제약에 대해 묻자 그녀는 되레 그 틈새에서 가능성을 본다고 말한다. “비전이 100이라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때가 많더라구요. 큐레이터의 역할이 그 간극을 조율하고 상생을 모색하는 열린 프로세스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기획의 동력으로 삼는 그녀가 앞으로 미술과 현실, 자연이 만나는 접점에서 어떤 새로운 풍경을 그려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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