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나아가는 법, 산산기어 ②
산산기어(SAN SAN GEAR) 인터뷰 ②
‘NCT WISH’부터 '실리카겔', ‘삼성 라이온즈’, ‘고마츠 나나’, ‘쿠리하라 하야토’까지. 지금 가장 핫한 인물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브랜드 산산기어. 매 시즌 친근하면서도 독창적인 컬렉션과 협업을 통해 ‘산산기어스러움’이라는 독보적인 감각을 구축해온 브랜드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프로젝트들과 그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름의 끝자락, 산산기어와 만났다.

얼마 전 독립영화로 10만 관객을 돌파한 일본 영화 〈해피 엔드〉의 주연 쿠리하라 하야토가 바둑돌을 손에 쥔 채 서 있는 장면은 SNS에서 많은 화제가 됐다. 그가 입고 있던 브랜드가 바로 산산기어(SAN SAN GEAR).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올해 산산기어는 NCT, 고마츠 나나, 쿠리하라 하야토 등 지금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의 얼굴들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그 저변을 넓혔다.
가장 핫한 인물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산산기어가 포커싱을 두는 곳은 화제성이 아니다. 빠르게 바뀌는 유행을 쫓아가기보다 늘 한발 앞선 ‘길’을 제시하는 것. 매 시즌 선보이는 친근하면서도 독특한 컬렉션, 그리고 다양한 협업을 통해 ‘산산기어스러움’이라는 고유한 감각을 구축해왔다. 이 말만큼 이 브랜드를 설명하는 데 정확한 표현은 없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프로젝트와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름의 끝자락, 산산기어와 만났다. 어떤 출발점에서 시작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차근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인터뷰는 1편에서 이어집니다.▼
‘NCT WISH’부터 ‘삼성 라이온즈’까지, 산산기어가 말하는’지금’의 문화 ①
— 모든 시즌이 내러티브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즌의 테마를 짜는 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산산기어를 시작할 당시, 스트리트 패션 하면 생각나는 전형적인 브랜드가 이미 너무 많았습니다. 게다가 스트리트 브랜드에서 매 시즌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방식은 흔하지 않았죠. 하이엔드 브랜드가 스트리트 무드를 차용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그 반대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스트리트 브랜드’라는 틀에 디자이너적인 성격을 더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간략히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시즌의 테마를 기획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론을 정해두었습니다. 특정 이미지를 상정하고 점진적으로 테마, 콘텐츠, 의류로 확장하여 풀어내죠. 때로는 역순으로 결과물에 담고 싶은 내러티브를 설정한 뒤, 이를 함축해 설명할 수 있는 테마로 연결 짓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슨한 원칙을 두되, 이에 얽매이지 않고 각 시즌, 시기에 가장 적합한 접근법을 선택하는 것이 산산기어의 방식입니다. 저희 결과물을 보실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결과물에 도달했는지 역으로 되짚어본다면, 더욱 깊이 있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식상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영감들은 보통 어디서 얻나요?
요즘은 정말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영화나 패션잡지와 같은 비교적 정형화된 콘텐츠는 물론, 휴대폰 속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누군가의 숏폼 비디오에서 얻기도 하고, 지인들과의 일상 속 대화 속에서 얻기도 합니다. 또 해외에서 보고, 듣고, 먹는 경험들 역시 큰 영감이 됩니다. ‘영감’이라는 단어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감각을 곤두세우고 생활하다 보면 주변에는 저희가 다 헤아리지 못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런 흥미로운 주제들로 작업들을 이어나가는 만큼 평소에 어떤 것을 향유하는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빠져있거나 추천할 만한 콘텐츠를 하나씩 추천해 주신다면?
이상엽 최근에 인상 깊게 본 것은 가스파 노에(Gaspar Noé)의 영화 〈Enter the Void〉 오프닝 시퀀스였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크레딧 롤을 맨 앞에 배치했는데, 강렬한 시각효과와 사운드 디자인으로 구성해 일반적인 크레딧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영화 시작 전, 시청각을 극적으로 자극하며 독립적인 체험을 제공하죠. 관객을 첫 장면으로 이끄는 방식이 폭력적이면서도, 영화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크레딧 롤만으로도 이토록 사이키델릭한 몰입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세훈 산산기어는 매 시즌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바이어들을 초청하는 쇼룸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26SS 시즌 파리 패션위크를 진행하기 위해 출장을 나가는 타이밍에 맞물려, 평소 좋아하던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 작가의 사진전이 퐁피두센터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방문했어요. 작가 특유의 색감과 퐁피두의 공간감이 어우러져 사진집으로만 보던 감상보다 더욱 크게 와닿았던 전시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님의 작업 중 음악 관련 작업물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 LP 판을 구매했는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들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최민석 지속적으로 온라인에서 접하기 어려운 ‘좋은 감각’들을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진집인데,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이크 브로디(Mike Brodie)의 〈A Period of Juvenile Prosperity〉 였습니다. 처음에는 날것 그대로의 순간을 담은 이미지에 반해 책을 구매했는데요. 알고 보니 그가 실제로 화물열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돌며 젊은 부랑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작업이었습니다. 최근 제가 추구하고 있는 미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다시 확신했고, 책을 구입한 것이 더욱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 옛날 인터뷰를 찾아보니 모든 시즌의 테마에 디스토피아적인 스토리가 들어있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조금 밝아진 느낌이 있다고 느꼈어요.
산산기어가 받아들이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은 계속 변해왔습니다. 예전에는 이를 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했다면, 지금은 추상과 은유를 통해 희석시켜 저희가 추구하는 미학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5SS 시즌 에디토리얼에서는 반복적으로 리스폰하는 ‘고마츠 나나’라는 인물을 통해 탈출구 없는 공간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또 b.Eautiful 과의 협업에서는 ‘Haikyo Moe’라는 테마로 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드러냈습니다. 반면, NCT WISH와의 ‘WISH GEAR’ 프로젝트에서는 디스토피아 세계관 속 소년병의 모습을 상상하며 처연함과 비장함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려 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지 않다 보니, 전체적인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은 이전보다 한층 더 부드럽게 변해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 25SS, NCT와의 협업, 그리고 로고까지 칼이나 활 등 다양한 무기가 연상되는 조형적 요소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디스토피아적인 주제와 연관이 있는 건지, 그리고 이유가 있다면?
산산기어의 로고가 기하학적인 동시에 유기적인 형태를 띠는 것처럼, 저희는 양면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데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칼, 톱, 활 같은 무기를 연상시키는 조형적 요소는 양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오브제라고 생각하는데요. 날붙이가 주는 아슬한 긴장감 속에서도 유려함과 조형미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긴장감에서 디스토피아적 무드를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가 집중하는 지점은 바로 그 안에 함께 자리한 위태로움과 아름다움의 조화입니다.



— 서브컬처 요소들을 과하지 않게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비결이 있나요?
문화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서브컬처와 대중문화로 나눈다고 했을 때 하위문화는 어딘가에서 태동해 견고해짐과 확장을 반복하며 결국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곤 합니다. 반대로, 엄청나게 커진 대중문화 역시 주류와 비주류로 재분류되면서 새로운 서브컬처를 만들어내죠. 다시 말해 ‘문화의 순환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힙합을 들 수 있는데요. 미국에서 80 – 90년대 초 태동기와 성장기를 거쳐 9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일명 골든 에라(Golden Era) 동안 완전한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했고, 이후에 세부적인 장르로 나누어지고 파생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서브컬처적 요소를 잘 활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감각을 열어 놓고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 문화에 대해 취향이 확고해진다면, 우리가 즐기는 것들이 더 이상 서브컬처가 아니게 될 테니까요. 그렇기에 브랜드 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가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고, 자신의 취향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는데 거침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억지스럽거나 어설프지 않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농도를 조절하며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브랜드에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 때, 새로운 서브컬쳐가 생성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대중문화로 변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국내 문화의 저변이 확장되고 볼륨이 커지길 기대하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 산산기어의 방향성을 다시 설정하는데도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소비자가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또 그 반대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 외부에서 바라볼 때 산산기어의 색은 고프코어를 지향하고, 테크웨어를 만드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생각하는 산산기어의 색은 무엇인가요?
산산기어의 색을 굳이 정의하자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저희만의 시각으로 비틀어 새롭게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시즌에 바둑을 활용한 것도 기존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것이고, ‘순환’이라는 키워드 역시 게임에서 익숙한 이미지를 현실로 끌어와 표현한 사례였습니다. 이렇게 흔한 소재를 위트 있게 해석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다 보니 그것이 곧 브랜드의 색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멋에 대한 미묘한 경계를 정확히 짚어내고, 현대적으로 캐치해 풀어내는 감각 또한 ‘산산기어스러움’이 아닐까 싶어요.


패션이라는 한정된 장르 속에서 정체성은 ‘서브컬처를 베이스로 하는 스트리트 브랜드’이고, 이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해 왔습니다. 직접적으로 ‘고프코어’를 지향한 적은 없음에도 저희를 보면 ‘고프코어’ 혹은 ‘테크웨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는 이유는 그 시기의 스트리트 패션의 무드가 고프코어로 대변되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내부적으로도 이런 키워드들을 브랜드를 구성하는 일부 요소로 받아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산산기어에는 그 이상의 레이어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유틸리티를 기반으로 문화적 맥락을 읽고 풀어낼 줄 아는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산산기어는 독특한 절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 매력 포인트입니다. 사실 손이 많이 가는 옷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뜻일 텐데, 이런 공정을 많이 선택하는 이유가 있나요?
산산기어가 사용하는 절개는 외형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기능과 미감을 동시에 살리는 장치로 사용되죠. 움직임의 편안함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브랜드의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절개뿐 아니라 디자인 전 과정에서 구조적 실험과 디테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디자인팀과 소싱팀이 많은 전문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물론 이렇게 하면 손도 많이 가고 제작 단가가 올라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의복’이 아닌 ‘패션’을 하는 브랜드이기에 그런 부분에서 타협을 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 다음 시즌 테마를 살짝 스포일러해 주신다면?
다음 시즌 테마는 〈Intra〉입니다. 디지털에 지나치게 몰입된 시대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며 자기 내면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과정을 어떻게 하면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실험하는 시즌이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지금 현재 가장 주목하고 있는 패션 브랜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엽 일본의 ‘Jianye’라는 브랜드를 좋아합니다. 콘셉트도 재미있고 옷들의 개성도 뚜렷한 브랜드입니다. 표현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산산기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늘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세훈 ‘House of Moseori’.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닿아 있는 브랜드입니다. 평소에는 웨어러블 한 의류를 선호하지만, 모서리의 컬렉션은 마치 동화 속에서 나온 듯한 매력이 있어요. 그래서 매 시즌 볼 때마다 한 벌쯤은 꼭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민석 최근 들어 ‘Rayon Vert’ 제품을 꽤 구매했습니다. 밀라노 기반의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이자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철학이나 소재와 그래픽 디자인과 의류의 결합에 대한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실용주의에 대한 집착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듭니다. 파리에 갔을 때 쇼룸에 방문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 패션계에는 브랜드의 기점은 3년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벌써 브랜드를 운영한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산산기어의 목표나 방향성은 어떻게 되나요?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저희 스스로도 놀라운데요. 산산기어의 최종 목표를 단순하게 말해보면 슈프림(Supreme)이나 스투시(Stussy)처럼 하나의 ‘현상’이 되는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현상이란 특정한 문화적 행위가 반복되며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실제로 종종 ‘산산기어스럽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불가능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곤 합니다.
물론 목표가 ‘현상’이 되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양가적인 감정도 생깁니다. 저희만의 방식으로 패턴과 디테일을 차별화해 선보였던 아이템이 어느 순간 비슷한 제품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보면서 저희가 만든 흐름이 널리 퍼졌다고 느껴져 기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려움도 느끼기도 하죠.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패션 업계라면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늘 다음 스텝을 제시하는 것이 최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패션산업 전체로 봤을 때는, 국내 도메스틱 브랜드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정 규모의 성장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반면 일본에는 글로벌하게 인정받는 브랜드가 많잖아요. 한국에서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봐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산산기어만의 언어와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