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아트 위크에 참여한 한국 작가의 개인전

'K-아트'를 지우면 남는 것 : 이배, 윤지영, 김진희 베를린 개인전

베를린 아트 위크 기간 동안 한국 작가 이배, 윤지영, 김진희가 나란히 개인전을 열며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베를린 아트 위크에 참여한 한국 작가의 개인전

지난 9월, 베를린 아트 위크(Berlin Art Week) 기간에 맞춰 세 명의 한국 작가가 나란히 개인전을 열었다. 프리즈나 아트 바젤 같은 대형 국제 아트페어가 부재한 베를린에서, 50여 곳 이상의 갤러리와 전시 기관이 참여하는 베를린 아트 위크는 도시 전체가 국내외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요한 이벤트다. 참여 갤러리들은 이 시기에 맞춰 전속 작가의 신작이나 새로 합류한 작가의 개인전, 혹은 공들여 준비한 기획전을 선보인다. 따라서 이배, 윤지영, 김진희가 이 때에 맞춰 동시에 개인전을 연 것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가의 위상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로 볼 수있다. 하지만 이를 ‘K-아트 열풍’이나 ‘한국 현대미술의 약진’이라는 집합 명사로 묶는 순간, 정작 세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취한 것들이 희석된다. 세 작가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뿐, 작가의 세대와 경력, 작업 방식, 전시 공간의 성격 등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환원주의를 잇는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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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Lee Bae, Syzygy, Esther Schipper, Berlin, 2025. Courtesy the artist, Johyun Gallery and Esther Schipper, Berlin/Paris/Seoul.
© Andrea Rossetti

에스더 쉬퍼 갤러리에서 열린 이배의 개인전 ‘Syzygy(삭망)’은 30년간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가 베를린에 새 거점을 마련한 의미를 담았다. 전시명 ‘시지지(syzygy)’는 천문학에서 태양과 지구, 달이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현상을 가리키지만, 점성술에서는 천체의 정렬, 시학에서는 운율의 짝, 연금술의 우주론에서는 정신과 물질, 어둠과 빛, 존재와 무의 신성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배는 이 우주적 배열의 개념을 숯으로 만든 먹물의 붓질과 그것을 입체화한 청동 조각으로 풀어냈다.

이배는 홍익대에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에게서 미술을 배웠고, 1990년 파리로 건너가 이우환을 도왔다. 한국 단색화와 일본 모노하(물질 그 자체의 존재를 탐구한 1960-70년대 일본 미술 운동)를 잇는 계보 위에 있지만, 박서보의 반복 행위나 이우환의 관계론과는 다른 지점을 탐구한다. 이배에게 핵심은 물질의 ‘순환’이다. 나무가 불에 의해 숯이 되고, 숯이 가루가 되어 먹물이 되고, 먹물의 궤적이 청동이 되는 과정이 그의 작업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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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Lee Bae, Syzygy, Esther Schipper, Berlin, 2025. Courtesy the artist, Johyun Gallery and Esther Schipper, Berlin/Paris/Seoul.
© Andrea Rossetti

전시장을 가득 채운 붓질은 목탄 잉크를 사용한 것으로, 각각의 붓질은 밀도, 굴곡, 습도, 길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작품의 맥락은 여전히 서예적이지만, 서예와 달리 이배의 기호는 단어나 관념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호흡으로 측정되는 말의 리듬에 가깝다. 손이 입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다. 청동 조각 시리즈 <Brushstroke A3(붓질 A3)>(2025)는 벽면 서예의 3차원 변주다. 탄소가 청동으로 탈바꿈하며 시간성과 물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회화와 조각 모두 시간과 움직임의 선형성이 특징이며, 정렬 혹은 ‘시지지’가 그 조직 원리다. 이런 작업 방식은 이번 아트 위크에서도 주목받았다. 영국 미술지 FAD Magazine의 비평가 폴 케리-켄트는 베를린 아트 위크 전체를 리뷰하며 함부어거 반호프의 페트리트 할릴라이, C/O 베를린의 율리안 로젠펠트, 율리아 슈토쉑 재단의 마크 레키 회고전 같은 주요 전시들과 함께 이배의 개인전을 ‘가장 좋았던 전시’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이배 Lee Bae 개인전
<Syzygy>

기간 2025. 09. 11 – 2025. 10. 18
장소 Esther Schipper, Potsdamer Strasse 81E, 베를린

몸으로 쓰고 물질로 기억하다

윤지영은 2023년 세계적 권위의 ‘DAAD 아티스트-인-베를린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12개월간 베를린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매년 전 세계에서 약 20명의 예술가만을 선발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발전시킨 작업은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전시에서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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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Jiyoung Yoon: Seeing Things the Way We See the Moon, daadgalerie 2025. © Marvin Systermans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2024)를 마주하게 된다. 실리콘과 실 등으로 만든 이 거대한 그물은 큐레이터 멜라니 루미기에르의 표현대로 ‘강렬한 신체적인 현존감과 거의 고통스러운 존재감’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는다는 이미지는 극단적이지만, 생존을 위한 절박한 행위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부를 외부로 꺼내 도구로 만드는 이 행위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 사용된 실리콘과 밀랍 같은 재료는 즉각적으로 피부와 살을 연상시킨다. 유연하고 반투명하며, 온도와 압력에 반응하는 이 재료들은 살아있는 신체의 속성을 닮았다. 비디오 작품 <호로피다오>(2024)에서 이는 더욱 복잡한 층위를 드러낸다. 제목은 그리스어로 걷기와 뛰기 사이의 동작, 거의 춤에 가까운 움직임을 의미하며, 작가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의 아이 같은 기쁨의 감각’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들은 작가를 향한 우정을 나타내는 소망들을 말하고, 작가는 이를 19세기 말에 발명된 음성 기록 장치인 포노그래프 실린더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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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Jiyoung Yoon: Seeing Things the Way We See the Moon, daadgalerie 2025. © Marvin Systermans

여기서 그녀의 작업은 역사적·정치적 차원을 획득한다. 포노그래프 실린더는 1930년대 독일에서 식민지 나미비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측정 연구에 사용된 바 있다. 타자를 기록하고 분류하던 폭력의 도구였던 셈이다. <호로피다오>(2024) 말미에는 이 실린더들과 그 안에 담긴 모든 정보가 녹아내려 작가의 머리 주형으로 변형된다. 이 과정은 조각 작품 <간신히 너, 하나, 얼굴>(2024)로 구현되었다.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갔지만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얼굴 조각은, 친구들의 음성을 담은 왁스를 녹여 작가 자신의 얼굴로 주조한 것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던 식민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기술이 우정을 기록하는 도구로 전환되고, 타인의 소망이 작가의 몸으로 현현한다.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해진 소망들을 물질로 형태화시키고, 이를 다시 신체화시킨 이 작업은 자아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됨을 의미한다. 나아가 기억이 어떻게 물질이 되고, 물질이 어떻게 다시 신체가 되는지 탐구한다.

윤지영 Jiyoung Yoon 개인전
<Seeing Things the Way We See the Moon>

기간 2​​025. 9. 10 – 2026. 01. 04
장소 daadgalerie,Oranienstraße 161, 베를린

경계 없는 시선, 무게 없는 초상

김진희의 회화는 ‘빛’에서 시작된다. 강렬한 명암 대비 대신 단색조 표면 위에 펼쳐지는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이 있다. 빛은 극적인 서사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공기와 분위기를 생성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윤곽선은 흐릿하고, 색의 전환은 점진적이며, 만화적 간결함과 회화적 섬세함이 공존한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의 시각 언어를 회화로 번역한 결과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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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ee Kim, Caught Your Eye, 2025, Acrylic on canvas 60 x 100 cm. 사진제공 FWR Galerie

FWR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No one is watching but everyone is on stage(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에서 작가는 인물화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선보였다. 그녀의 인물화는 권력이나 신분을 재현하는 유럽의 전통적인 인물화는 결이 다르다. 그보다 현재의 사회적·미디어 환경 속에서 개인이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고 표현하는가에 대해 관찰한 결과에 가깝다. 소셜 미디어 세대에게 자아는 온라인 플랫폼의 롤모델과 가족, 친구, 일상이라는 현실적 환경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작가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바로 그 진동 속에 위치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탈범주적 태도다. 그림 속 인물들은 특정 젠더, 인종, 문화, 종교로 규정되지 않는다. 피부색, 머리 스타일, 의상은 어떤 정체성도 명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나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무도 아닐 수 있다. 대표적으로 <Faces of Today>(2024)에는 여러 얼굴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고, 어떤 얼굴은 고개롤 돌리고 있으며 또 다른 얼굴은 눈을 감고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다. 작가가 포착한 것은 개별 정체성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며 공유하는 자의식, 치로, 불안, 기대 등과 같은 감정의 결이다. 이는 특정 배경에 속한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문화와 세대를 넘어 공유되는 보편적 정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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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ee Kim, Faces of Today, 2025, Acrylic on canvas 180 x 200 cm. 사진제공 FWR Gal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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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ee Kim, Faces of Today – Two of Us, 2025, Acrylic and pastel on canvas, 90 x 100 cm. 사진제공 FWR Galerie

FWR 갤러리는 작가의 강점으로 ‘회화의 높은 완성도’와 ‘국제 미술 맥락 속에 자신을 확실히 자리매김하려는 야심’을 꼽았다. 2007년 KIAF에 참가한 바 있는 갤러리는 현재 서울의 디스위켄드룸(ThisWeekendRoom)과 협력하며 김진희, 박지나 등 여러 한국 작가들을 유럽 무대에 소개해왔다. 최근 FWR을 포함 베를린의 여러 로컬 갤러리들이 서울과의 교류를 확대하며 분점을 설립하는 배경에 대해선 ‘분단국가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공감대’와 ‘지난 10여 년간 확산된 한류 문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 작가 세대의 교체 성공’과 그에 따른 ‘작업의 질적 변화’라고 강조했다. 이전 한국 작가들이 유럽 미술을 절충적으로 차용한 데 비해, 동시대 작가들은 뚜렷한 개성과 독창적 언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갤러리는 ‘한국 작가들의 기술적 완성도가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과 서사가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개방적’이라고 설명했다. 특정 문화나 정체성에 갇히지 않는 열린 시선이 베를린 관람객과 컬렉터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베를린에서 세 명의 한국 작가가 보여준 것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조형 언어로 자신만의 미적 세계를 밀어붙이는 집요함, 그리고 동시대와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국적은 출발점일 뿐, 도착지는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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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view: Jinhee Kim, NO ONE IS WATCHING BUT EVERYONE IS ON STAGE, FWR Galerie, Berlin, 2025. 사진제공 FWR Galerie

​김진희 Jinhee Kim 개인전
<No One Is Watching but Everyone Is on Stage>

기간 2025. 9. 10 – 2026. 01. 04
장소 FWR Gallery, ​Jägerstraße 5,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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