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섬유 아티스트 고소미: 흔적이 담긴 실로 엮은 메시지

고소미 섬유 아티스트

고소미 작가는 한지를 잘라서 꼬아 만든 실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마음은 20년 넘게 한지를 연구하도록 이끌었고, 마침내 자기만의 이름을 딴 실을 탄생시켰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든 이 실에는 작가의 흔적이 담겨있다.

[Creator+] 섬유 아티스트 고소미: 흔적이 담긴 실로 엮은 메시지

editor’s note

작가는 ‘나의 것’이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이야기와 소재, 기법을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은 작가를 볼 때면 존경스럽고, 때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고소미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 감정이 들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한지를 연구하고 물성을 공부한 끝에 ‘소미사’라는 그만의 재료를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소재를 가졌다는 건 작가에게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고소미 작가는 그 무기에 자기만의 메시지까지 더해져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위치에 있기까지 고소미 작가는 얼마나 고민하고 인고의 시간을 견뎠을까요. 그 궁금증을 안고, 소미사와 그로 만든 천과 작품이 가득한 고소미스튜디오로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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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1. 일본에서의 연구

한지는 작가님에게 가장 중요한 소재입니다. 언제부터 한지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예고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한지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한국화는 화가의 붓 자국과 한지의 번짐이 더해져 결정되거든요. 이 특성을 보면서 저와 재료의 힘이 더해져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 이상을 종이가 받아준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걸 표현하고 싶어 바람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는데, 사실 바람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바람을 보여주려면 그로 인해서 움직이는 다른 사물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죠. 하지만 저는 바람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거든요. 고민하던 중에 그림이 공중에 떠 있으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한지의 물성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왜 한지의 물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줄 열쇠라고 생각하셨어요?

한지처럼 가볍고 반투명한 소재는 작품 너머로 뒷배경이 비치잖아요. 그 특징을 이용하면 바람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지가 너무 가벼우면 작품을 보존하기엔 힘드니까 단단함도 지녀야겠다고 생각해서 물성을 연구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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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미 작가의 작업실. 한지와 천연 섬유, 실 등으로 가득하다.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 갔다고 들었어요.

아쉽게도 당시 한국에는 한지를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학교가 없었거든요. 처음엔 일본의 타마 미술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다나카 히데오 교수님을 만나면서 무사시노 미술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연구하셨나요?

섬유과에 진학해서 일본 전통 종이 ‘화지’의 원료인 닥섬유에 대해서 배웠어요. 한지도 닥섬유로 만드니까 일본의 화지를 연구하면서 한지와의 차이점까지 파악한다면, 한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화지와 한지를 시작으로 동·식물성 원단까지 배우게 되었어요. 제가 표현할 소재가 더 많아져서 이득이었죠.

한지와 화지의 차이점이 궁금해지네요. 어떻게 다른가요?

종이를 뜨는 방식이 달라요. 한지는 물질*을 좌우, 상하로 하기 때문에 닥섬유가 격자 형태로 배열돼요. 반면, 화지는 높이가 있는 틀을 사용해서 닥섬유가 가둬지고, 상하 혹은 좌우로 물질을 해요. 그러면 한 방향으로 배열되기 때문에 그를 따라 찢기가 쉬워요. 반대로 격자로 배열된 한지는 찢기가 힘들고요. 그래서 건축적인 작업이나 강도가 있어야 하는 작업에선 한지를 사용해요.

*물질: 한지를 뜨는 과정. 원료와 닥풀이 잘 혼합된 지통에 발을 담가 전후, 좌우로 흔들어 종이를 떠내는 것.

일본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내용이 지금 큰 자산이 되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연구하면서 이 특징들을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서 현미경 사진을 찍고, 강도를 실험하고, 염색테스트도 하면서 미묘한 차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죠. 5년 동안 연구만 한 것 같아요. 졸업 후에는 일본의 인쇄회사 ‘토판’*에 입사해서 닥섬유로 만든 종이에 인쇄하는 기술과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종이의 인쇄 기술도 배웠어요.

*토판: 일본 인쇄회사. 한국과 일본의 지폐를 인쇄할 때, 이곳의 인쇄 기술을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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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히데오 교수님께 사사하셨죠. 혹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교수님의 가르침이 있으신가요?

일본은 도제식 교육이 일반적이라서 한 명의 교수님이 1~2명의 제자만 두고 키우는데, 제가 히데오 교수님의 첫 제자였어요. 교수님께선 예술 활동이 작가의 자기만족이나 취미로 끝나지 않으려면 철학적인 힘을 쌓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작가라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는지를 고민하고, 최종적으로 이 작품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도 하셨죠. 그래서 교수님의 소개로 동경대학교의 철학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씩 청강했었어요. 그때 개념적인 부분을 많이 쌓았어요.

PLUS 2. 소미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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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구와 시간을 거쳐 드디어 소미사(小魅絲)가 탄생하게 되었어요.

대학원 2학년 때, 히데오 교수님의 조언을 따라 섬유학과 학부 수업을 들었어요. 그래서 스피닝 기계로 양모(펠트)를 실로 만드는 법을 배웠죠. 그 과정을 보면서 ‘한지도 저렇게 꼬면 실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저는 필력을 잊지 않기 위해 집에 오면 한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썼었는데요. 작품이 아니니까 계속 보관하기엔 자리를 차지하고 막상 버리자니 아까웠거든요. 그렇다면 그 모아둔 파지를 사용해서 한번 연습해 보자는 생각에 그를 잘라서 기계에 넣고 꼬아봤어요. 당연히 처음엔 실패했죠. 그러나 한 달 정도 시도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고 마침내 실이 만들어졌죠.

종이가 실이 될 수도 있군요.

한지를 결대로 0.5cm 간격으로 끊어지지 않게 잘라서 천천히 기계에 넣으면서 결대로 꼬면 실이 만들어져요. 기계를 돌리는 속도를 조절하고, 풀이 섞인 물을 뿌리면서 수분도 공급해 줘야 좋은 실이 만들어져요.

소미사라는 이름도 너무 잘 어울려요. 어떤 뜻인가요?

히데오 교수님께서 지어주셨어요. 제 글과 그림이 담긴 파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보이지 않아도 이미 이 실에는 너의 흔적이 담겨 있다고 하셨죠. 그렇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저만의 좋은 재료가 될 거라며 제 이름을 따서 ‘소미사’라고 지어주셨어요.

너만의 재료를 찾았다는 교수님 말씀이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소미사 뭉치만 봐도 완성했다는 희열과 함께 이제 진짜로 작업할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소미사를 제작할 때 선호하는 한지가 있으신가요?

국내 한지 장인들께 주문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평면 작품을 만들 때 필요한 한지와 소미사를 제작할 때의 한지가 다르거든요. 후자인 경우, 일본의 화지를 만드는 것처럼 물질을 한 방향만 해달라고 요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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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미사를 만드는 건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한 과정인데요. 때문에 지치거나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만드는 게 힘들진 않아요. 다만, 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고통이 있죠. 그 시간이 괴로웠던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저를 위한 수련과 명상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소미사 작업을 하다 보면 스피닝 기계와 한지, 제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받기도 해요. 이젠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순간이 없어져서 오히려 자유롭게 사유할 시간이 생겼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에 작업하다가 남은 아주 작은 자투리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다른 작업에 사용하거나, 다시 갈아서 사용하기도 해요. 아주 작고 별 의미도 없는 자투리도 제가 만든 거라서 버리기 쉽지 않더라고요.

쉽게 산 물건도 버리기 힘든데, 긴 시간에 걸쳐 직접 만든 거라면 더 버리기 힘들죠. 그렇다면 소미사는 실 두께도 다르게 만들 수 있나요?

네, 한지의 두께나 자르는 폭을 조절하면 돼요. 때로는 한지와 다른 실을 섞어 꼬아서 합사를 만들기도 해요. 주로 한복에 수놓은 은사를 사용하는데, 멀리서 보면 실이 섞인 게 잘 안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반짝거리는 게 보여요. 또, 은사이기 때문에 빛을 비추면 반사되어서 일렁거리는 게 느껴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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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소미사로 바느질할 때, 일반 직물과 다른 점이 있나요?

일반 섬유는 세로(날실)와 가로(씨실) 방향으로 짜여서 실과 실 사이에 틈새가 있어요. 그 틈새로 바늘과 실이 들어가면서 바느질하는 건데, 종이는 틈새가 없어서 바늘이 들어간다는 건 곧 바느질이 아니라 구멍을 뚫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수정할 수 없어요. 그 때문에 어떤 작품이든 재단을 철저하게 하고, 실이 지나가는 길과 속력 등을 미리 계획해야 해요.

PLUS 3. 소미사로 엮고 이은 작품들

일본에서 연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계기가 있었을까요?

일본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전통 원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어요. 그 과정 중에 대구에서 조사할 일이 생겼죠. 일제 강점기에는 대구에서 일본 기모노의 오비를 짰다고 하더라고요. 조사하면서 일본보다는 한국에서 우리 걸 조사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 귀국하게 되었죠.

오랜 시간 일본에서 공부하셨기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쉽지 않았죠. 지금은 순수예술,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주시고 함께 하자는 제안도 많이 받지만, 초창기에는 제 작품을 공예로 봐주시는 시선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한국화를 전공했기에 제 작업을 순수예술로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또, 지인도 없어서 그룹전보단 개인전만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부산의 카린 갤러리와 계약을 맺으면서 조금 더 빨리 적응하게 된 것 같아요. 제 작품이 알려지기 전에는 대학교에 강의도 나가고, 영화 의상 제작도 하면서 수입을 벌었어요.

그러던 중, 조명 작업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셨죠.

설치 작품만을 해오던 터라 제 작품이 조명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건축과 협업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첫 작업이 제주도의 스테이 ‘잔월’에 설치된 조명이었는데, 건축주의 제안으로 제작한 작품이에요. 처음에는 내 작품은 조명이 아닌데 왜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시대가 변했으니까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자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반응이 너무 좋은 걸 보면서 제 힘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요. 이전 조형 작품으로는 전달되지 못한 부분이 빛의 힘을 빌려서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마 조명은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브제라 대중이 더 가깝게 받아들인 게 아닐까요? 이젠 조명 작업도 프로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는데요. 조명을 제작하실 때, 특별히 고려하는 점이 있으신가요?

발광체인 전구가 드러나 눈이 부신 걸 보고 이후부터는 한지를 더 감싸서 주 광원을 예쁘게 잘 가리려고 해요. 또, 그림자의 음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느 부분에 레이어를 더 쌓아서 그림자의 대비를 줄 것인가, 벽에 조명 빛이 비쳐졌을 때 어떤 그림자를 생기게 할 것인가 등을 고민하기도 해요.

그림자의 명암은 한국 수묵화의 농담과 비슷하죠.

조명을 켜면 공간에 선이 가득 차는 것 같아요. 거리에 따라서 그림자의 선명도도 달라지고, 그림자의 질감이 쌓이면서 공간이 훨씬 더 깊어 보여요. 이런 세심한 부분을 알게 되면서 빛과 그림자에 대해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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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처럼 공간에 둘 오브제를 작업하실 때,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시나요?

먼저 건축주와 인터뷰해요. 저에겐 건축주에게 이 건물(공간)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이야기를 듣고 건축주의 결에 제 작품을 담을 수 있겠다고 느끼면 작업을 시작하죠.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는 저 역시 진심을 쏟기가 어려워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간혹 제 작품만을 공간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세요. 그럴 땐 이곳의 주인공은 건축주이지, 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려요.

저 역시 공간의 이야기가 진실한 곳일수록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느낀다고 생각해요. 이젠 작품이 주인공이 되는 설치 작업과 전시에 대해서 여쭤보고자 해요. 작가님께는 대표적인 시리즈가 있는데, 그중 다양체 시리즈는 모두 형태가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와이어로 구를 만드는데, 수작업이라 다 다른 형태로 만들어져요. 똑같이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거죠.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와이어로 구를 만드는 과정이 사람의 인생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각기 다른 다양체의 형태는 자기만의 고유한 모습을 가진 우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하고요. 대량생산이 익숙해진 세상에선 기준을 벗어나면 하자품이 되잖아요. 그런데 생명체에겐 그런 기준을 댈 수 없고, 오히려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어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엄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다양체를 구상했어요.

작가님의 작품에선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요. ‘나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라는 말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위로이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에 담긴 메시지는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제가 받은 상처들을 보듬다 보면 나 역시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 어느 날은 제일 작은 사람처럼 느껴졌다가 다음 날이 되면 제일 잘 나가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결국, 우리가 일희일비하는 건 단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 순간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단단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조명 작업으로 대중에게 알려지셨지만, 작가님의 뿌리는 설치 작업이죠. 꾸준히 작품을 보여주고 계시는데요. 설치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시나요?

작업으로 풀고 싶은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매일 그 이야기를 가시화할 방법을 구상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스케치하죠. 이렇게 축적했다가 아, 이젠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직관적으로 느끼면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요. 때로는 작품에 맞는 공간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요. 시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제 바람과 개념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으세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롯이 제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모순된 점도 많을 거예요. 결국, 절대적인 것은 없고 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 같아요.

1월에 공개한 희녹과의 콜라보레이션과 전시도 그렇고, 점점 작가님의 설치 작품이 더 주목받는 기회가 많아진 것 같아요.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을 작업하면서 저를 알아봐 주는 분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제 이전 작품을 찾아보고 요청하는 분도 생겨났어요. 이런 경험을 하니까 대중과 연결되는 작품도 필요했구나 싶더라고요. 결국 작가란 내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게 성공했을 때 매우 기쁘거든요. 저와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이 늘어났다는 건 제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라서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요.

PLUS 4. 흔적에 남긴 메시지

작가님의 주요 콘셉트를 하나 꼽자면 ‘흔적’이죠. 작가님의 흔적은 무엇인가요?

제 작품에는 그를 만들면서 들어간 물리적인 시간과 제 손길 그리고 제 생각도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즉, 작품을 만드는 그 모든 과정이 제 흔적인 거죠. 실을 꼬아서 만들고 감는 행위 자체도 흔적을 담은 시간이죠. 처음 소미사는 제 그림과 글로 흔적을 보여줬다면, 이젠 비가시적인 흔적을 담기 때문에 점점 색이 빠져 백색에 가까운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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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지로 돌아올게요. 한지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성격으로 비유하자면 우유부단함이라고 할까요? 다시 설명하면 한지에는 ‘확실하게 이것이 아니어도 된다.’, ‘명확한 위치가 아니라 그 사이에 있어도 충분히 아름답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한지는 제가 가진 힘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표현해 주고, 그 과정에서 제가 계산하지 않은 것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계기를 만들어 줘요. 그래서 한지를 연구하면 할수록 한국인 정서와 참 잘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의 옛 건축물이나 정원을 보면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두거나, 기둥으로 사용하잖아요. 억지로 재단하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아름답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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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연순직물과 함께 만드는 소창 제품. 소미당에서 구매할 수 있다.
주재료가 한지이다 보니 다른 지역의 장인이나 소재와 협업하는 경우가 많으시죠. 때로는 한지가 아닌 소재와도 협업하시고요.

처음엔 전주 한지만 사용했었는데, 작업하면서 한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안동, 문경, 원주의 장인들과도 협업하고 지역민 대상으로 아카데미를 열어서 제가 연구했던 내용을 공유하거나, 지역 소재의 새로운 쓰임을 함께 찾기도 해요. 처음엔 재료가 부족할까 시작한 건데 이젠 지속할 생태계를 만드는 걸 중점으로 여기고 있어요. 명맥이 끊어진 후에 복원하는 건 어렵고 오류가 생길 가능성도 높거든요. 미미하더라도 지속되어야 뿌리를 제대로 알 수 있고, 앞으로 발전 방향도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엔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셨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이 본인이 사는 지역의 소재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알아야 그를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역의 젊은 층과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소재에 대한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작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전시했어요. 그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KBS에서 방영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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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실험과 연구를 하셨는데 혹 새롭게 연구하고 싶은 소재가 있으신지 궁금해요.

당연히 한지 작업은 앞으로 계속할 거고요. 나무, 금속과 같은 다른 소재와 결합도 해보고 싶어요. 또, 지금 대마 농사를 짓고 있는데요. 천 평은 삼베 작업을 하시는 김수자 선생님께 원료로 제공하고요, 나머지 천 평에서 재배하는 대마는 현대식으로 삼베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사용하려고 해요. 투명한 삼베를 만들어서 한지와 결합한 후, 한지의 은은함과 삼베의 단단함이 더해지는 소재를 만들고 싶어서요.

작품활동 외에도 지역 소재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노력하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정말 하시는 일이 많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저는 개념이 먼저인 작가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저의 개인적인 사건에서 작품을 시작했다면, 앞으로는 여러 공동체가 함께 지지할 수 있는, 사회적 이슈를 담은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한지 외에 여러 가지 소재를 다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럼에도 작품의 맥락과 결을 변하지 않을 거예요.

PLUS LIST

고소미 작가에게 흔적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3

– 고소미 스튜디오

고소미 스튜디오는 제가 예전에 살던 집을 개조한 곳이에요. 리모델링하면서 2층의 내장재를 떼는데 재미있게도 가족의 생애에 맞춰서 증축했던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가족의 시간이 흔적으로 남아있고, 제가 그 안에서 다시 작업한다는 사실이 이 공간의 매력인 것 같아요. 작가에겐 작업실은 나만의 공간이자 세상이니까요.

–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아이들의 옷을 보면 아이들의 하루가 보여요. 오늘도 신나게 놀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죠.

– 소통하는 시간

시간도 하나의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사람들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돼요. 그런 순간이 저에겐 정말 큰 흔적으로 남는 것 같아요.

TIPPING POINT

고소미 작가의 작품에는 만드는 사람의 시간과 손길, 생각과 마음의 흔적이 담겨있다.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동안의 시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일본에서 한지를 연구하고 소미사를 탄생한 순간, 그리고 각기 다른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닫기까지의 작가의 경험과 고민까지. 정말 이 얇은 실 안에 정말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사실에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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