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전자음악 작곡가 그레이코드, 지인: 소리로 시간을 건축하다

그레이코드, 지인(GRAYCODE, jiiiiin) 작곡가

그레이코드, 지인에게 작곡은 선율을 넘어 시공간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다. 진동을 세계의 구조로 바라보며 데이터와 음악적 언어 사이의 궤적을 탐구하고, 이를 시각적 형태나 시스템으로 확장한다.

[Creator+] 전자음악 작곡가 그레이코드, 지인: 소리로 시간을 건축하다

editor’s note

“빨간색은 무슨 소리일까?” 이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한 작가 듀오가 있습니다. 전자음악 작곡가 그레이코드, 지인입니다. 이들에게 작곡은 선율과 화음을 만드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음을 조직하고 기록하는 구조 전체를 다루며, 소리가 발생하는 순간부터 감상자의 경험까지 설계합니다. 건축가가 입구에서 시작되는 동선을 계획하듯, 소리로 시간을 구성합니다. 두 사람은 ‘진동’을 세계의 근원적 구조로 바라봅니다. 독일 ZKM이 주최하는 2018년 기가-헤르츠 어워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고유의 언어를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듣는 음악을 보는 미술로 확장하며, 미술관 전시부터 공연, 브랜드 협업까지 작업의 경계를 넓혀왔습니다. 최근 공개된 ‘페라리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 프로젝트 역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V12 엔진 소리를 사운드 피스로 작곡하고, 그 음악적 구조를 차량 보닛 위의 디자인으로 구현했죠. 끊임없이 소리와 형태를 오가며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축해온 두 작가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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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코드(GRAYCODE), 조태복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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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jiiiiin), 정진희 작곡가

PLUS 1. V12 엔진 사운드를 번역하다

한국을 위한 ‘페라리 12Cilindri 테일러메이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그레이코드 2024년 5월, 뉴욕의 크리에이티브 플랫폼 쿨헌팅 팀과 이재은 기획자를 만났어요. 차의 디자인과 제작 과정에 사운드를 담아내고 싶다는 제안이었어요. 엄연히 말하면 저희가 하는 사운드 작업은 페라리에 기능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물성을 다루는 저희의 방식으로 엔진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싶어 하셨죠.

지인 자동차를 경험하는 방식이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감각으로 확장되길 원했던 것 같아요. 태도에서 전해지는 존중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미 저희 작업을 공부한 상태였고, “함께 무엇을 할지 찾아보자”는 제안이었죠. 완성차 홍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트워크 자체를 만드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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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12Cilindri Tailor Made, 2026. 차량사진, COOL HUNTING 제공, 사진: Josh Ru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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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12Cilindri Tailor Made, 2026. 제작과정, 작가 제공.
V12 엔진 소리를 분석해 <Music for 12 Lines>를 작곡하셨죠.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레이코드 엔진의 본질인 ’12기통’에서 시작했습니다. 밖에서 들으면 비주기적인 소음처럼 들리지만, 정밀하게 분석하면 정비율로 떨어지는 규칙적인 하모닉 구조가 숨어 있어요. 그 배열에서 추출한 음을 12개의 재료로 삼았죠.

지인 V12 엔진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화음을 특징 삼아 약 8분 길이의 음악을 만들었어요. 12개의 음이 하모닉스를 이루며 저음에서 고음까지 긴장과 해소를 반복해요. 과정은 데이터적이고 분석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음악적인 언어와 감각으로 완성한 작업입니다.

“과정은 분석적이지만 최종 선택은 언제나 직관에 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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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12Cilindri Tailor Made, 2026.차량사진,  Ferrari 제공.
엔진 소리를 분석한 데이터가 악보로 전환되고, 차량 보닛 위의 드로잉으로 새겨지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소리에서 디자인으로의 변환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지인 처음엔 내부 사운드 제작을 고민했지만 현실적인 하드웨어 이슈가 있었어요. 논의 끝에 차량 외관 디자인 리버리(Livery)에 악보를 새기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V12 엔진이 작동할 때의 경험은 오너만이 체감하는 사적인 영역이잖아요. 그 내밀한 감각을 시각 언어로 번역해 외부로 끌어낸 거죠.

그레이코드 페라리 컬러 & 트림 리드 디자이너 안드레아 스킬레오(Andrea Schileo – Lead C&T Designer at Ferrari)게 저희 악보 드로잉이 담긴 책 <Data Composition>을 선물했어요. 그는 선형적 기보법을 벗어난 저희 형태에 관심을 보였고, 이후 줌 미팅에서 보닛 위에 렌더링된 악보를 보여주며 제안했죠. 울림이나 떨림처럼 몸으로 감각되는 소리에 대한 인식을 서로 공유했기에 가능한 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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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는 페라리가 재해석한 ‘한국의 미학’이 담긴 작업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티스트로서 ‘한국적인 것’의 본질을 정의한다면요?

그레이코드 제가 지금 하는 작업이 언젠가 미래의 클래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문화적 유전자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지금 만든 차를 100년, 200년 후 사람들이 보고 ‘한국적’이라 느낀다면, 그게 한국적인 거죠.

지인 주어와 동사로 의사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결과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정체를 알 수 없고,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한국적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닐까요(웃음).

PLUS 2. 개별 작곡가이자 아티스트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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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코드, 지인 작가의 작업실
두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셨나요? 각자 활동하던 두 작곡가가 듀오로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레이코드 대학원 선후배 사이였어요. 처음 팀을 이룬 건 현실적인 이유였는데요. 작업실 월세를 아껴보려고 공간을 셰어했거든요. 잘하는 후배라는 건 알고 있었고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재미있게 같이 작업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include red>였어요.

지인 첫 공동 작업이다 보니 ‘공동으로 작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각자 좋아하는 것도 취향도 다른데, 이게 어떤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가 서로 맞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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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include red, 2016. 전시전경, 작가 제공.
2016년 첫 공동작업 <#include red>부터 최근작 <phyper>까지, ‘빨강’에 대한 탐구를 이어오고 있죠. 두 분에게 빨강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레이코드 저희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은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20에서 2만 헤르츠예요. 그 범위를 넘으면 적외선이나 가시광선 같은 빛의 영역이 되죠. 빨간색은 시각 영역에서 에너지가 가장 낮은 주파수예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 물속 깊이 들어갈수록 빨간색이 가장 먼저 사라져요. 에너지가 약해서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는 거죠. 빨강을 잃어버리는 경험에서 질문이 시작됐어요. “우리가 들을 수 없는 2만 헤르츠 너머의 진동을 소리로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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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phyper, 2024.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전경, 경기도미술관 제공, 사진: 정필름.

지인 감각하는 모든 현상의 본질을 파고들면 결국 진동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만나요. 그 진동 자체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시각적으로는 빨강으로, 청각적으로는 낮은 음으로요. <phyper>는 이 개념을 평면적 오디오 비주얼을 넘어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설치 미술로 확장한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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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Giga-Hertz Award, 2018. ZKM 제공, 사진: Felix Grunschloss.
두 번째 공동작업으로 독일 ZKM의 ‘기가헤르츠 어워드’를 수상하셨죠. 그 경험이 이후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그레이코드 심사위원들로부터 “관습적이지 않다”는 평을 들었어요. 그때 한국적인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죠. 한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며 형성된 감각이 그들에게는 ‘관습적이지 않은 형태’로 보였던 거예요. 컴퓨터 음악 역사책에 나오는 거장들이 받던 상을 받으면서, 동양인 작곡가로서 서양 음악의 맥락 안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놓였다는 경험은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인 창작자는 늘 “내 작업이 어떤 피드백을 만들고 있나” 의구심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는 함정에 빠져요. 다행히 초기에 “이 작업이 음악 언어로서 정확히 읽히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이후 작업을 지속할 명분을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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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additive piece of 《+3×10^8, beyond the light velocity》 and 《35 to 20,000》, 2023. 《오프 사이트》 전시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사진: 홍철기.
함께 작업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협업하시나요? 혼자일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요?

그레이코드 같은 전공을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지인 작가도 하고, 지인 작가가 하는 걸 제가 할 수 있어요. 협업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가 있는 거죠. 다만 설득력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혀요. 지인 작가를 설득하지 못하면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인 가장 큰 차이는 내부에서 비평이 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일종의 휴먼 에러를 줄여주는 셈이죠. 곡만 쓰는 게 아니라, 그 곡을 어떻게 제시하고 보여주면 좋을지 함께 고민할 수 있고요. 서로의 지향이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느낌이에요.

PLUS 3. 오선지 너머의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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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전자음악으로 확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레이코드 사실 음악사적으로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위대한 작곡가들은 당대의 가장 발전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음악을 만들어왔거든요. 피아노라는 기술이 등장했기에 피아노 곡이 나왔고, 평균율 시스템이 구축되어 베토벤 같은 음악이 탄생했죠. 저희도 GPU 시대에 사는 작곡가로서 이 시대 기술로 음악을 만드는 거예요.

지인 산업화 이후 피아노가 보급되며 피아니스트가 곡을 썼잖아요. 쇼팽이나 리스트처럼요. 컴퓨터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컴퓨터가 악기가 되는 거죠. 명령어를 통해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에서 전자음악은 시작해요. 악보를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10대 때부터 오선지에 연필로 자를 대고 곡을 쓰며 대학에 간 사람들이니까요. 악보로 음악을 기록하는 게 익숙한 일이에요. 드로잉도 그 연장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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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악보는 마치 정교한 건축 도면처럼 보입니다. 전통적인 오선지의 문법을 탈피해 음악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레이코드 방향성이 없는 악보는 저희의 고유 언어예요. 연주를 재현하기 위한 기보법이 아니라, 음악 안에 존재하는 구조를 기록하는 방식이죠. 앞뒤나 좌우 구분 없이, 어디서 시작해 끝날지 알 수 없는 동시적 사고를 담고 있어요.

지인 오선지는 음표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똑같이 연주할 수 있게 돕는 도구죠. 저희는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아요. 소리의 정보를 기록하고, 그것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담고 싶었어요. 시간이 교차하고 얽히며 발생하는 ‘현상’ 자체를 기록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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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wave forecast, 2022. 설치전경, 작가 제공.
서귀포 바다 끝에서 채집한 진동을 소리로 치환한 <wave forecast> 작업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왜 바다에 주목하게 되었나요?

그레이코드 오랫동안 컴퓨터로 디지털 작업을 하며 의문이 생겼어요. 컴퓨터가 발생시키는 무한에 가까운 랜덤 숫자는 정말 무작위일까? 어쩌면 100억 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패턴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디지털이 아닌 연속적인 아날로그 세계의 진동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제주도 끝단, 1년에 며칠만 땅이 드러나는 곳에서 실제 바다의 진동을 채집했죠. 그 바다 끝에서 밀려오는 불규칙한 진동만큼은 진짜 랜덤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인 〈wave forecast〉에서 저희가 쫓았던 건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 사이의 간극, 즉 변화였어요. 바닷물이 있을 때는 바다인데 빠지면 땅이 되는 곳이었어요. 변화로 인해 여기가 무엇이 되거나, 혹은 되지 않는 상태로 계속 존재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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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w, 2023. 전시전경, 작가 제공, 사진: 김재범.
GRAYCODE, jiiiiin, ∆w, 2023. 연주 티저영상, 작가 제공, 촬영: 박승혁.
그 작업이 11개월 뒤 송은의 <∆w> 전시로 이어졌어요. 제주에서 채집한 진동을 서울에서 다시 울리게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같은 데이터가 다른 공간에서도 공명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싶었어요. 델타(Δ)는 변화를 뜻하는 기호고, <∆w>는 ‘진동의 변화량’을 뜻해요. 제주에서 얻은 변화량 데이터를 음악적 언어로 번역하고, 서울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다시 발생시켜 본 거죠.

“변화는 우리가 실재하고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증거예요. 살아간다는 건 시간 사이의 변화량을 계속 감지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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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전시, 퍼포먼스, 출판까지 플랫폼의 경계가 없습니다. 두 분은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작업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지인 작곡을 구조적으로 보면 세 가지예요. 소리의 재료인 ‘음’을 만들고, 그 음들을 어떤 질서로 ‘배열’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저희도 그 구조 안에서 작곡하지만, 단순히 소리를 생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이라는 축 안에서 감상자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를 함께 설계해요. 그 결과물이 때로는 음악으로, 때로는 전시나 책 같은 플랫폼으로 나타나는 거죠.

PLUS 4. GPU 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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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예술을 만들기 위해 작곡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작업 내내 품고 계신다고요. 그 질문에 대해 현재 내리고 있는 잠정적인 답이 있나요?

지인 정확한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가 스스로의 태도를 점검하기 위해 계속 던지는 질문이죠. ‘나는 여전히 이 지향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경계선 같은 거예요.

그레이코드 작곡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작업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시대의 기술과 상황을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죠. 레퍼런스가 없고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어요. 지금은 동시다발적인 시대잖아요. GPU처럼 한 프레임 안에 수많은 정보가 동시에 생성되는데, 음악은 동시적일 수가 없어요. 사건의 연속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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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10^-33cm, 2019. 전시전경, 베를린 한국문화원 제공.
컴퓨터와 데이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작업하시죠. AI 같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갖고 계신가요?

그레이코드 2019년 ZKM 커미션으로 AI를 주제로 한 <e^ix, it’s necessary>를 작곡했어요. 그때 내린 결론은 AI는 굉장히 빠른 계산기라는 거예요. 다만 AI는 정답이 있어요. “80년대 스타일 음악을 만들어줘”라고 하면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 안에서 답을 도출하죠. 그런데 저희 음악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의 시간과 AI의 시간은 다르다.

지인 최근 느끼는 건데 컴퓨터 작업 중 에러가 생기면 해결하는 과정이 거의 80% 줄었어요. 덕분에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에 또 다른 걸 할 수 있어요. 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AI는 시간을 컨트롤해 주는 도구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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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공기에 관하여 Quivering Air, 2025. 연주전경, 작가 제공, 사진: 이화림.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속하고 싶나요?

지인 뚜렷한 한 곳에 고정되기보다 다양한 맥락에 놓일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는 K-pop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저희 작업이 참조될 수 있으면 좋겠고요. 시간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레이코드 지금 하는 게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해요. 10년간 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다이내믹하게 변화하고 싶어요. 모든 작업을 한 줄로 엮었을 때 관통하는 하나의 지점이 생기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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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CODE, jiiiiin, 공기에 관하여 Quivering Air, 2025. 연주전경, 작가 제공, 사진: 이화림.
곧 예정된 작업이나 계획이 있나요?

지인 오는 3월, 서서울미술관 개관 프로젝트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이번엔 완성된 작품만이 아니라 설치 과정과 리허설, 연주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공개하기로 했어요.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간 자체를 관객과 공유하는 거죠. 저희 작업이 완성품으로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작가가 관여하고 책임지며 하나하나 만들어간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PLUS LIST

그레이코드, 지인이 요즘 좋아하는 소리 3

– 퓨어톤 (Pure Tone)

순음, 혹은 사인 웨이브라 불리는 퓨어톤은 그레이코드, 지인 음악의 주요소다. 다른 배음 없이 오직 하나의 주파수만 존재하는 소리. 브라운관 TV가 꺼질 때 들리던 “삐—” 하는 음을 떠올리면 된다. 낮은 영역으로 내려가면 몸 전체를 울리는 진동이 된다. 귀로 듣기 전 몸이 먼저 감지하는 소리.

– 엘리안 라디그 (Éliane Radigue)

2019년 ZKM 기가헤르츠 어워드 공로상을 받은 프랑스 작곡가. 그레이코드, 지인은 2018년 수상 후 이듬해 ZKM 연주에서 그녀와 같은 무대에 올랐다. 연주자가 공간 안에서 공명 지점을 찾아가며 소리를 쌓아 올리는 <OCCAM XXII>(2018)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그레이코드의 솔로 프로젝트 <musing forest>의 피아노 곡 ‘May’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 킹누(King Gnu)

2026년 현재 자주 듣는 제이팝 밴드. 밀도 있는 구조 위에 감각적으로 치고 나오는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자극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음악이라고.

TIPPING POINT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빨강’의 주파수를 묻던 질문은 제주 바다의 물결로, 다시 페라리 엔진의 하모닉 구조로 이어졌다. 고정된 선율이 아닌 유동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악보. 그들 작업은 소리에서 시각으로, 시각에서 퍼포먼스로 확장된다.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는 태도. 시간의 흐름을 직선으로 따르기보다 동시적인 구조로 조직하는 방식처럼 그레이코드, 지인의 세계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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