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을 멈춘 진화, 볼보 EX60

볼보자동차(이하 볼보)가 전동화 시대를 향한 거침없는 행보를 시작했다. 지난 1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순수 전기 SUV ‘EX60’을 세계 최초로 공개한 것. 글로벌 베스트셀러 XC60의 계보를 잇는 이 모델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증명해온 중추이자 새로운 전동화 전략의 기준점이다. 월간 〈디자인〉이 볼보의 초대로 스톡홀름에서 마주한 모빌리티의 미래를 디자인 관점에서 기록했다.

타협을 멈춘 진화, 볼보 EX60

엔지니어링으로 다시 쓴 디자인

“이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볼보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 토마스 잉엔라트Thomas Ingenlath의 이 말은 EX60이 ‘타협의 산물’이었던 과거 전기차 디자인과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디자인과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도 압도적인 성능을 누릴 수 있다”라고 말한 디자인 부문 총괄 대행 닉 그로넨탈Nick Gronenthal은 SUV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공기저항 계수 0.26Cd를 달성한 성취를 강조했다. 특히 전면의 공기저항을 제어하는 액티브 그릴 셔터와 매끄러운 프레임리스 도어, 유려하게 흐르는 테이퍼드 보디 실루엣은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디자이너들이 오랜 기술적 제약에서 벗어나 일궈낸 조형적 성취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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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한 볼보 EX60.

이 같은 디자인의 변화는 제조 공정의 혁신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볼보의 차세대 전동화 전용 플랫폼 ‘SPA3(Scalable Product Architecture 3)’가 있다. SPA3는 단순히 차의 뼈대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자동차를 구동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기존 자동차가 수많은 부속품이 얽힌 기계였다면, SPA3 위의 EX60은 하나의 거대한 스마트폰에 가깝다. 예전에는 브레이크, 에어컨, 조명 등을 제어하는 소형 컴퓨터가 차 곳곳에서 제각각 작동했다면 SPA3에선 이 모든 하드웨어가 하나의 강력한 ‘중앙 컴퓨터’로 통합 제어한다. 몸과 두뇌가 완벽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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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 통합을 통해 공정을 단순화한 메가 캐스팅 공법과 차세대 전동화 전용 플랫폼 SPA3.

시스템이 단순해지니 차를 만드는 공정은 더욱 대담해졌다. 수백 개의 부품을 조립하는 대신 거대한 알루미늄판을 한 번에 찍어내는 ‘메가 캐스팅mega casting’과 배터리 자체를 차체의 견고한 뼈대로 활용하는 ‘셀 투 보디cell-to-body’ 기술이 대표적이다. 기계 장치와 배터리가 차지했던 공간은 오롯이 실내 공간에 할애됐다. 그 결과 2970mm의 휠베이스를 확보하고 전폭 역시 최대 1908mm에 달해 압도적인 공간감을 완성했다. 특히 돌출부 없이 매끄럽게 펼쳐진 바닥은 시각적인 답답함을 걷어내며, 마치 안락한 북유럽의 거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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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60의 콘셉트 스케치. 볼보의 다음 100년을 보여주는 선명한 이정표이자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정수를 담았다.

자연 요소로 빚은 휴식처

EX60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점은 바로 소재와 색상이다. 볼보의 시니어 디자인 매니저 사라 에리크센 수스냐르Sara Erichsen Susnjar는 컬러와 소재를 입히는 과정을 “자동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들이 집중한 것은 ‘소재의 정직함’이었다. 가죽을 대체하는 지속 가능한 신소재 노르디코Nordico를 비롯해 결이 살아 있는 천연 애시 우드, 포근한 울 혼방 소재를 실내 곳곳에 유기적으로 배치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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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북부 도시 스카겐의 풍경에서 착안해 시트에 구현한 독창적인 패턴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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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60에 적용한 샤크핀 타입 도어 핸들.

양산 차 최초로 SSAB Zero™ 저탄소 강철을 적용했을 뿐 아니라, 재활용 소재를 역대 볼보 모델 중 가장 높은 27% 사용한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차량 시트에 새겨진 독창적인 패턴 디자인도 흥미롭다. 볼보 디자인팀은 사용자의 다양한 취향을 고려해 총 네 가지 테마의 인테리어 옵션을 마련했는데 스칸디나비아의 자연, 패션, 스포츠 등 일상의 여러 범주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를테면 ‘던Dawn’ 은 북해와 발트해가 만나는 덴마크 북부 도시 스카겐Skagen의 풍경에서 착안해 노르디코 시트에 새로운 타공 패턴을 적용했고, 활기찬 감각의 ‘카다멈Cardamom’은 스포츠웨어에서 착안했다. 이 밖에 은밀한 노란빛으로 직조한 ‘라이Rye’와 질감의 대비로 세련미를 구현한 ‘차콜Charcoal’까지 각 테마는 저마다의 페르소나로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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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60의 인테리어는 노르디코와 천연 우드 등 소재의 본질에 집중했다.

안전 디자인의 새로운 패러다임

안전은 볼보의 브랜드 정체성이자 디자인의 근간이다. EX60에는 세계 최초로 ‘멀티 어댑티브 안전벨트’를 적용했다. 여기에는 실내 센서가 탑재되어 있어 탑승자의 체격과 몸무게, 심지어 현재의 착좌 자세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해 대응한다. 단순히 승객을 좌석에 고정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지능형 보안관 역할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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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센서가 탑승자의 자세를 포착해 11가지 프로파일 중 최적의 보호 방식을 선택하는 멀티 어댑티브 안전벨트.

사고가 발생하는 찰나의 순간, 시스템은 11개의 하중 제한 프로파일 중 가장 적합한 보호 방식을 스스로 선택해 벨트 장력을 정교하게 조절한다. 하드웨어가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을 소프트웨어가 보완하며 안전 디자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 이러한 지능형 진화의 중추에는 볼보의 차세대 통합 컴퓨팅 플랫폼, 일명 ‘후긴코어HuginCore’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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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똑똑하고 안전해지는 지능형 플랫폼 ‘후긴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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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월드 프리미어 현장에 마련한 볼보의 안전 디자인 철학 전시 존.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관찰하며 정보를 전달하는 까마귀 후긴에서 이름을 딴 시스템은 차량의 모든 센서 정보를 실시간으로 통합 처리하는 강력한 두뇌 역할을 수행한다. 후긴코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분석해 사고를 예견하고 대응의 정밀도를 높이는 능동적인 지능을 부여한다. 여기에 실내 레이더가 탑승자의 미세한 호흡까지 포착해 혹시 모를 방치 사고를 방지하는 세심함도 갖췄다.

세계 최초, 구글 제미나이를 탑재한 자동차

EX60은 이제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바퀴가 달린 거대한 스마트 디바이스로 진화했다. 세계 최초로 탑재한 구글의 생성형 AI ‘제미나이’는 이 변화의 핵심이다. 사용자는 기계적인 명령어가 아닌 “내 메일에서 호텔 예약 주소 좀 찾아줘”, “방금 산 물건이 트렁크에 들어갈까?” 등의 일상적인 대화로 차와 소통하며, 제미나이는 이러한 맥락을 정교하게 이해해 최적의 답으로 운전자를 보조한다. 디스플레이 위에서 이러한 인공지능 경험은 상황 인지형(contextual) UX·UI 디자인을 통해 직관적인 시각 질서로 치환된다. 주행 상태나 환경 변화에 따라 화면의 레이아웃이 유동적으로 변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사용자가 필요한 순간에 알맞은 정보만을 배치해 인지 부하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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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형 레이어 기반의 상황 인지형 UX·UI 디자인. 구글 제미나이를 탑재해 맥락 이해와 대화형 보조가 가능해졌다.

물리적 버튼을 덜어낸 자리는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지능형 레이어가 채웠는데, 덕분에 운전자는 현재 필요한 기능에만 직관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시각적 마침표는 타이포그래피 스튜디오 ‘달톤 마그Dalton Maag’와 협업해 EX60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용 서체 ‘볼보 센텀Volvo Centum’이 찍는다. 2027년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서체는 시속 100km의 고속 주행 중에도 정보를 즉각 인지할 수 있는 ‘찰나의 가독성’에 설계의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어를 포함해 800개 이상의 언어를 지원하는 볼보 센텀은 단순한 폰트를 넘어,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운전자의 인지 능력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정교한 디자인 장치다. 결국 EX60이 보여주는 변화의 본질은 기술의 과시가 아닌, 운전자가 오직 주행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적 배려에 있다. 물리적인 안전 설계를 넘어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운전자의 판단을 명확하게 돕는 EX60은, 볼보의 다음 100년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이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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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전용 서체 ‘볼보 센텀’. 고속 주행을 고려해 가독성을 극대화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3호(2026.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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